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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photo Feb 27. 2024

원하는 모양으로 찌그러질 수 있다면

휴직을 했다. 어지러운 마음에 “점신” 어플로 전화 사주를 보기로 했다. 물론 내 앞길은 삽질이든 호미질이든 스스로 해보아야겠지만 사주 선생님이 혹 수맥이라도 잡아주실까 싶어서였다. 수많은 사주 선생님들이 어플 목록에 떴다. 누구에게 내 운명을 여쭤봐야 하나 아주 고민이 되었다. 이왕이면 발음이 좋은 분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티브이 볼륨을 낮추고는 상담사 음성 소개 메시지를 하나하나 눌러 들었다. 찾았다! 오늘의 내 사주 선생님, 단결(가명). 단결 선생님은 전직이 콜센터 상담원이셨다고 한다. 집안 어른들이 사주 일을 하셨고 그것이 곧 계기가 되어 지금은 사주를 봐주시는 명리철학 상담사가 되셨다고. 소개를 읽다 보니 진로를 고민하는 내게 더욱 찰떡이다 싶었다. 전화를 걸었다.


“제가 휴직을 했는데요. 앞으로 잘 먹고살 수 있을까요?”

“올해까지는 관운이 있는데, 그만두신 건 아니죠?”

“네. 일단 1년 병휴직요.“

“내년에 엄청난 변화가 있겠네요. 아주 인기가 많은 사주예요. 아이들한테가 아니라, 어른한테요. 내년에 크게 바뀌고 앞으로 쭉 그 길로 갈 거예요. 아무리 힘들어도 한번 결정하면 끝까지 밀어붙여야 해요. 그러다 보면 누구나 아는 사람이 되어 있을 거예요.“

“누구나요..?(조용히 유명해지는 게 꿈인데…)”

“40부터 이십 년 동안 치열하게 일해서 아주 크게 되는 사주고요. 아마 30대 후반부터 성공할 기미가 보일 거예요. 곧이네요. (얼마간 침묵-) 학업을 도와주는 조상님이 세 분이나 있어서 60이 넘어서도 공부할 사주예요. 후학을 양성하겠네요. 아마도 어른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보여요. 위로 뻗기보다는 옆으로 멀리 뻗어요. 인기가 아주 좋네요. 미래에 어떻게 되어있을지 궁금하네요. 횡재운도 있고. 아주 좋은 사주인 건 분명해요. 그런데 2022년부터는 딴 주머니로 돈이 들어오는데 이건 뭘까요?”

“아마도 독립출판인가 봐요. 선생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만, 올해 연애운은 어떻게 되는지요…? 내년은? 내후년은요?(머쓱)“

“그게… (대외비라 글에서는 중-략) 본인 자리 잡을 때까지는 결혼하지 않는 게 좋아요.”

“따뜻한(?!) 말씀 감사합니다. 얼마간 있다가 다음에 허할 때 또 잠시 찾아올게요.“

“그래요. 지금까지처럼만 열심히 살아봐요. 좋은 소식 기대할게요.”


책과 결혼했다는 청첩장 카드뉴스까지 만들어 예전 근무교의, 지금은 퇴임하신 교장선생님한테까지 연락한 나지만도.(그것도 두 번을) 학교 밖의 딴 일엔 단 한 번도 본격적이어본 적이 없다. 남은 시간으로, 남은 체력으로, 간신히 한 것이었으니까. 이젠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전력투구해서 하게 되는 느낌을 알고 싶다. 실패하더라도 나의 선택으로 실컷 망하고 싶다. 망한 이야기를 신나게 써먹으며 단 하루라도 안 망하게 될 날을 꿈꾸고 싶다. 동생 지용이에게 두발자전거를 처음 배우던 열두 살 때처럼. 처음 타는 파도에서 실패할 용기를 미리 다져먹던 초보 서퍼 서른네 살 때처럼.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잔뜩 찌그러질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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