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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photo Mar 05. 2024

여덟 살 발명가

그네 타기를 좋아했다. 머리카락이 흩어지며 높아질 때의 기분이 좋았다. 무릎을 굽혔다 폈을 뿐인데 점점 더 위로 올라갔고, 내려올 때에는 콧구멍으로 여름 바람이 스며들었다. 그 바람은 콧물이 찔끔 흘러서 촉촉해진 코털까지 바삭하게 말려주었다. 겨우 여덟 살의 초등학생 1학년이었지만, 그네만 있으면 다른 언니오빠들보다도 하늘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었으니까. 그네를 탈 때는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하늘과 땅, 그 사이의 나만 느껴졌다. 뱅뱅이(지구본)를 타는 것도 비슷하게 재미있는 일이었으나, 안 그래도 현기증 나는 여덟 살 인생에 놀이기구까지 어지러움을 더할 필요는 없었다. 주어진 놀이시간 동안 난 뱅뱅이보다는 그네를 택했다. 그네를 기다리는 줄은 늘 길었다. 줄을 서서 내 순서에 탈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몸집이 크다는 이유로 대놓고 새치기를 하는 언니오빠들 때문이었다.


‘싸울까?’


어림도 없었다. 나는 동갑내기들보다 훨씬 마르고 앙상한 아이였다. 오락실의 킹오브파이터 게임을 하듯, 머릿속에 대결하는 장면을 잠시 그려보았다가 곧바로 용기를 접었다.


‘그네 실력은 내가 1등인데. 빨리 컸으면 좋겠다.‘


새치기쟁이들로 가득한 학교 운동장에서 그네를 탈 수 없는 날이 늘어갔다. 그네를 못 타는 일이 생길 때마다 5분 거리에 있는 엄마를 부르러 갈 수는 없었다. 엄마한테 갔다가 그나마 있던 놀이시간까지 사라질지 몰랐다. 놀이시간에는 엄마 눈에 띄지 않아야 했다. 엄마는 나만 보면 잊고 있던 심부름을 시켰다. 내가 칠칠치 못해서 거스름돈을 온 동네에 자주 흘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는 화용이가 어디 모자란 건 아닌지 말을 얹었지만 엄마는 오기로 더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돈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검은 비닐봉지에 거스름돈을 넣으면 이상하게 구멍이 나있고, 그렇다고 주머니에 넣으면 집으로 오는 길에 돈이 다 튀어나가 사라져 있었다. 돈을 잃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돈을 안 잃어버리려고 온몸에 긴장을 하고 슈퍼에 가면 심부름 내용을 감쪽같이 잊어버려서 집까지 다시 다녀와야 했는데, 엄마는 내가 무사히 돌아온 걸 보고 기뻐하다가도 심부름에 실패한 것을 보고 얼굴이 빨갛게 변하곤 했다.


‘언니오빠들이랑 싸워서 이길 자신도 없고, 집에도 못 가는데. 그네를 어떻게 타지?’


학교운동장 말고도 그네가 있는 놀이터가 있었지만, 그곳은 낯설고 멀어서 맘 편히 놀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놀아도 여기서 놀아야 엄마가 “안! 화! 용~! 김치찌개 다됐다. 우리 딸 밥 먹자!”라고 말하며 후문 창살 사이로, 또는 학교의 작은 돌담 너머로, 날 언제든 찾을 수 있었다. 흙먼지를 잔뜩 만들며 놀다가도 나는 엄마가 나타나는 곳을 쳐다보곤 했다. 엄마가 보이면 보이는 대로 더 놀고 싶은 마음에 아쉬웠고,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또 보이지 않아서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왠지 가슴이 꽉 끼는 느낌으로 엄마가 보고 싶어지면 두 발이 모두 공중에 뜨게끔 소닉처럼 터보 모드로 달려가 엄마에게 안겼다. 엄마는 샐쭉한 표정으로 날 안으며 먼지부터 털어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집에 갈 때가 아니었다. 그네를 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으니까.


그때 내 손에 보인 건 줄넘기였다. 여덟 살 안화용의 장래희망은 발명가였으므로, 이 줄넘기를 잘만 이용한다면 나만의 그네를 발명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학교에 있는 놀이기구를 찬찬히 둘러보며 줄넘기와 하나씩 짝을 지어보았다. 소리도 낼 줄 모르면서 엄지와 중지, 검지를 부딪쳐 드디어 알아냈다는 손짓을 했다.


‘바로 그거야! 철봉에 줄넘기를 걸면 되겠어!‘


누가 나를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지 일말의 걱정도 없었다. 줄넘기를 가장 낮은 높이의 철봉에 U자로 걸고는 줄넘기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그러고는 아래로 처진 줄에 무게중심을 잘 잡아 앉았다. 뒤로 한 걸음, 한 걸음, 한 걸음을 코끼리처럼 성큼성큼 간 뒤에 땅을 짚고 있던 발을 떼었다. 앞으로 뒤로 흔들, 흔들. 꽤 그럴듯했다. 진짜 그네처럼 앉을자리를 밟고 일어나서 하늘 높이 날 수는 없었지만 여름바람이 코로 들어오는 것만은 확실했다. 눈을 감고 풀벌레 소리를 듣고, 뒤로 살짝 얼굴을 젖히고는 태양을 향해 몸을 쭉 폈다. 자유라는 말이 이런 뜻인가. 새가 된 기분 같은 건가. 뜻은 알지만 가슴으로 알지 못했던 단어들을 알게 되는 것만 같았다. 행복한 표정으로 ‘철봉 그네’를 만끽하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보던 다른 1학년 아이들이 내 옆의 철봉에 섰다. 아이들은 사냥해 온 멧돼지를 어깨로 메쳐서 마당에 내려놓듯 힘차게 줄넘기를 철봉에 걸었다. 그러고는 나를 쳐다보며 허락을 구하는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는 함께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나는 생각보다 아주 빨리 발명가가 되었다.


웬걸. 그때 생각을 잠시 했다고 콧구멍이 축축하다. 조만간 그네나 타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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