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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photo Mar 18. 2024

밖으로 가자

며칠 우울증 약을 안 먹었더니 해상도가 선명한 꿈을 꿨다. 그 꿈엔 옛 연인이 등장했다. 진작에 단절된 이의 처음 같은 고백에 그 끝을 모르는 척, 헌 사랑의 뻔뻔한 시작을 망설여버렸다. 어느 시집 제목을 어설프게나마 따라해볼 참이었던 건지. 이 촌스러운 꿈은 지난 사랑을 위한 찐한 뒤풀이라도 되려나 보다. 이제 와서 피로연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약 기운이 빠진 무의식의 무서운 기세는 참으로 못생겼단 말이지. 적어도 지난 금요일 오후에라도 병원을 갔어야 했는데 끈기있게 게을렀던 탓으로 고난한 일요일을 보냈다. 쇠망치로 머리라도 한 대 맞은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걷는 걸음에는 자체 슬로우가 걸렸다. 반려묘 율무의 부름에 재깍재깍 반응을 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제 몸 하나 건사 못하는 집사를 꾸짖기라도 하는 듯 율무는 미야- 하고 길게 울었다. 그래그래, 내가 너 하나 먹여 살리려면 정신 차려야지.


일요일 아침엔 일어나자마자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약 없이도 잘 자고 상쾌하게 아침을 맞던 때가 언제였는지, 그때가 그리워서였다. 불현듯 약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쾌락을 좇아서는 아니었다. 머리띠가 조여오는 저주를 풀려는 손오공 같은 마음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집안 곳곳을 도둑처럼 들쑤시고 다니다 보니 그때 내가 딱 찾던 크기의 비닐봉지 끝자락이 보였다. 뽑기 게임이라도 하듯이 비닐봉지를 쓱 끌어냈는데 첫 시도는 실패였다. 그리고 다음 시도에서 기적처럼 아침약을 찾았다. 이 약으로 평생의 저주가 풀리면 얼마나 좋겠냐만. 겨우 반나절의 자유라도 그게 어디인가. 꾸울꺽 삼켰다. 약효가 나타나는지 머리를 상하좌우로 흔들어보았다. 이렇게 빨리 괜찮아진다고. 허망했다. 약의 노예가 된 게 틀림없다. 언제쯤 약을 그만 먹어도 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분명 병세에 도움이 안 되는 생각이라 머릿속에서 그 물음을 얼른 싹둑 잘라내어버렸지만.


그래도 며칠치 저녁약 빼먹은 거 치고는 몸이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대로 약을 안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호기로운 용기가 들기도 했다만, 굳이 내 몸으로 재차 실험을 해서는 안되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몇 년 전에 멋대로 약을 끊었다가 마산 집에서 진땀을 흘리는 나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던 엄마를 가만히 보고 있던, 어느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반려 고양이까지도 잘 먹여 살리려면 어서 온전한 자신이 되어야 했기에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비틀 걸으며 병원에 다녀왔다. 오늘 의사 선생님은 우울증 증세 약화에 햇빛을 자주 쐬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매일 산책을 하라고 하셨다. 현관문을 여는 것도 힘들어서 배달음식도 겨우 방 안으로 들여먹는 내가 산책을 할 리가. 없다. 그 생각을 하는 내 얼굴을 읽으셨는지 그러면 비타민D 스프레이를 입 속에 뿌려주라고 하셨다. 사실 예전에도 알려주신 팁이었다. 사기는 한두 달 전에 이미 사놓고는 아직 택배상자도 안 뜯었다. 이런 나를 어떻게 알아챈 건지 유튜브는 택배를 시켜놓고 뜯지 않는, 나처럼 마음이 아픈 것이 분명할 이들의 영상을 내게 추천해 준다. 이런.


내일은 약도 잘 먹고 낮 산책도 하고 비타민D 스프레이도 뿌릴 거다. 정량의 약을 먹고 적시의 햇빛을 누리고 과량의 비타민을 섭취해서 분에 넘치게 행복한 내가 될 거라고. 뭐든 부족했던 오늘의 내가, 뭐든 충분할 내일의 나를 계획해 본다. 편한 배달음식으로 낮 동안 나를 가두면서 무의식에 짓눌리는 밤을 허락하지 않도록, 불편한 낮을 즐거이 보내보겠다고. 지키지 못할 계획을 알알이 무리하게 떠올려 꿰어본다. 그중 하나라도 지킬까 싶지만. 안전한 이불속의 날카로운 내가 스스로를 얼마나 상처주고 싶어 하는지 깨달은 요 며칠이었으니까. 이불 밖으로 게으른 내가 부지런히 나갈 수 있기를. 해상도가 선명한 내일을 그려 본다. 내일의 나야 부탁해 정말. 몇 걸음만 더 내딛어줘. 밖으로 밖으로. 나가자.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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