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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photo Oct 25. 2024

유머 코드

※ 스스로의 유우머를 뽐내기 위해, 작가 본인 위주의 각색과 과장이 포함되어 있는 글입니다.

마흔 무렵인 연인과 아직 넉넉히 삼십 대인 나는 서로 유머 코드가 잘 맞는다. 이건 분명 우리 둘만 재밌는 “넝담”(농담을 희한하게 발음하는 표현)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한참 맞장구를 치며 깔깔 웃던 나는 정색을 하고 그에게 단단히 이르는 편이다.

“이건 우리끼리니까 웃기는 거야. 어디 가서 이런 유머하면 클나.”

“알지~~. 아무려어엄~~~.”

신중한 끄덕임과 신뢰로 찬 눈빛을 받고 나니, 내 이상함을 앞의 이 사람이 극비로 지켜줄 거라는 지점에서 푹 안심이 되었다. 그러자 떠오른 회심의 깔깔 카드. 곧잘 까먹는 나이다. 생각이 났을 때 선보여야 하는 법. 로봇만화 속 용사가 강철 검을 빼어 들듯이 비장의 유우머를 꺼내들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이거 알려나 모르겠네. 진짜 아는 사람만 아는 건데.”

“뭔데, 일단 해봐.”

“알겠으면 이어서 해. 진짜 한다. 잘 들어.”

숨 막히는 신경전이 부지불식간에 지나갔다.

“뭐 필요한 거 없~수?”

“음...... 없으면 마알~구~~???“

평소에도 느껴왔지만, 역시. 강적이다. 세기말을 주름잡았던 MBC <귀곡 산장>의 유행어를 귀신처럼 따라 읊다니.

“이걸 어떻게 알아. 이홍렬 아저씨랑 임하룡 아저씨 나온 거, 오빠도 봤어?”

“당연히 알지.”

“이 하이개그를 알아채다니 신기하네. 희한하다.”

“우리가 또래라 그렇지.”

“3살 차이면 또래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중고등학교 때 학교 급을 달리 해서 다녔는데. 대학교 때 봐도 05학번은 08학번이랑 알고 지내기에도 쉽지 않아.”


물론 3살 차이면 또래지만, 나이 많다고 놀릴 때 표정이 재밌어서 자꾸 약을 올리게 된다.


“허허 참. 그 정도면 또래지. 나도 포켓몬 스티커 모았어. 싸이월드, 버디버디도 하고.”

“우리 동네는 버디버디 안 했어. 네이트온 했지.”

“또래 얘기 하다가 갑자기 동네 얘기로 가는겨? 허허, 고것 참.”

수세에 몰려 불리해질 땐 대화 주제를 급히 바꾸는 편이다. 상대를 정신없게 만든 뒤 방심한 사이 빈틈을 노려 웃길 요량이다.

“그러고 보니 나 어릴 때 생각난다. 계곡 놀러 갔을 때 계단식 논처럼 놓인 바위들에 연달아 엉덩방아를 찧어가지고 진짜 아팠는데.”

“응? 계곡? 허허 참, 아 그러면…… 이~게, 그때 부은겨~~~~?!“

‘와아압-.(입틀막=입을 틀어막을 정도로 놀라 압도된 상태)’

흡사 성조 같기도 한 악센트와 음의 고저 변화로 기세를 퍼붓는 경상도 산지 유머는 그렇게 처참히 무릎을 꿇으며 참패하고 말았다. 충청도 산지 유머의 여유로움과 절제 그리고 시간차 기술은 늦게 오더라도 한번 오면 크게 온다. 역시 유머는 재능의 영역이구나. 신이 내려주는 것이다. 고개를 떨굴 새도 없이 그의 유머에 나는 한참을 박장대소했다. 그리고 신라 천년의 미소를 닮은 그의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승자는 저렇게 웃는구나. 참으로 부럽다.

잔발로 추격해 장거리 드리블해온 내 공을 가로채 단숨에 내 골대에 골을 넣는 이의 미소를 닮음. / 출처-‘천년의 미소’, 문화재청


가만 보니 초등학생 때 일이 떠오른다.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엄마에게 다가가 당시 유행하던 썰렁 개그(남극 개그, 펭귄 개그라고도 불림), 허무개그 같은 것을 잔뜩 쏟아낸 직후였을 거다. 잠시 숨을 고르던 엄마가 결심을 했다는 듯 내게 말을 했다.

“있잖아, 딸아. 담임선생님한테 연락이 왔는데. 네가 요즘......”

“(교실 속 모든 순간을 주마등처럼 떠올리며) 네......?”

“썰렁한 말을 너무 많이 하고 다녀가지고 듣는 친구들이 너무 괴롭단다.”

[충격]

나를 용가리라고 놀리고 장난을 쳐서 약간의 손을 봐주었던 애들인가 했더니, 생각도 못했던 문제가 엄마의 말씀에서 쑥 튀어나올 줄이야. 내 유머 감각이 그렇게 별로였다니. 괴로울 정도라니. 그 대화를 기점으로 나는 웬만한 유머에 정을 주지 않고 지냈더랬다. 혹시나 그것을 친구들 앞에서 선보이고 싶어질까 봐 말이다.

그때 못한 걸 다 해보는 요즘, 진짜로 즐겁다. 내 희한한 유머감각에 퍼즐처럼 쏙 들어맞는 충청도 사람과 연애라는 것을 해서다. 물론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제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유머는 유머일 뿐,

괴롭히지 말자.”


**별첨 | 초등학생 때 내가 따라 하고 다녔던 하이개그(수준 높은 개그라는 뜻임.)

A: 실은 정말 사랑했어...

 B: 바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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