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함께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반계리 은행나무를 보러 갔다. 10월 중순이라 그런지 녹음이 짙었다. 우리가 보러 온 800살 먹은 은행나무가 이 나무가 맞나. 순간 너무 당황해서 인터넷에 장소 검색을 해보았다. 제대로 목적지를 찾아온 게 맞았다. 그러고 보니 10월 말에나 노란 은행나무를 볼 수 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지구 온난화 때문에 은행도 일찍 피지 않을까, 지레 짐작했는데 그것은 내 모자란 과학 지식에서 생긴 완전한 오해였다. 더우면 일찍 피는 건 봄의 벚꽃나무였고, 은행나무는 그 반대였다. 가을에 열매를 맺는 은행나무를 내 편리를 위해 잠시 봄꽃나무 따위로 둔갑시켜 버렸다. 아쉬움에 나무 멀찍이 앞에 서서, 사진만 남기고 돌아서려 하자, 연인이 말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800살 먹은 나무 둥치 쪽 따라 한 바퀴는 돌고 가야지.”
“아, 안 걸었나? 봤으면 됐지. 뭐. 온통 초록색인데.”
“얼마나 서운했으면, 코딱지만한 사진만 찍고 그냥 가려는겨~.”
“그러네. 내가 성급해놓고 애꿎은 나무 탓을 했네. 나무 곁에 가서 걷자.”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나무를 행성 삼아 우리가 위성인 듯 걷다 보니 저 멀리 뻗어나간 가지 끝에 내가 찾던 것이 보였다. 아주 조금의 노란 은행잎 무리였다. 해에게서 가까운 쪽부터 노란색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는가 보다. 멀리서는 햇살 때문에 눈이 부셔서 보지 못했던 색깔들이 보였다. 초록색이면서 노랗고, 또 연두색이기도 한 잎들이 한 가지에 붙어 있었다. 이렇게 빨리 노랑을 띈 잎들은 다른 잎들이 물들 때쯤이면 어딘가 날아가 자취를 감추거나 누군가의 책갈피로 쓰이고 있을지도 몰랐다. 바닥에는 이미 굴러다니는 노란 은행잎이 있었다. 그것을 고이 주워 들어 초록색이 만연한 거대한 은행나무 앞에 놓고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너’는 내가 기억할게,라고. 초가을에나 누릴 수 있는 감수성에 잔뜩 취한 채로.
글을 쓰다 보면 쨍하게 샛노란 문장에 욕심이 생기는 날을 마주하게 된다. 그 표현이 튄다는 건 물론 글을 쓰는 사람도 당연히 알고 있다. 하지만 좋아하는 책을 읽던 언젠가 ‘나’도 이런 문장을 지어보고 싶다고 생각했기에 결국엔 그 마음을 놓지 못하고 글에 쓰고야 만다. 글의 전반적인 톤에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 결국엔 한 편에 속하게 되는 과정이다. 읽는 사람은 영 마음이 번잡스러울 것이다. 처음엔 호기를 내려놓는 게 참 어려웠다. 당시의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수려한 그 문장을 어떻게든 써먹고 싶어서, 다른 문장을 앞뒤로 겨우 배치하는 데에 정신을 팔았다. 글을 멀찍이서 볼 여유는 물론 없었다. 4년 동안 꾸준히 일주일에 한 편을 써온 요즘은 그날의 첫 문장을 무엇으로 하냐에 따라 물 흐르듯 한 편을 쓰는 편이다. 어쩌다 운 좋게 기교가 있는 표현이 떠올라도 괜한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우당탕탕 내 욕심으로 쓰인 글 중 하나를 글쓰기 모임을 같이 하는 사람들 앞에 꺼내 보이는 날이 있었다. 미래라는 주제가 주어져 쓴 글이었다. 노인이 된 나를 상상해서 썼더랬다. 이미 떠난 소중한 사람들의 흔적을 찾으려 동네 어귀를 돌아다니다가 결국은 집으로 돌아와 그들이 쓰인 책을 품에 안고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날, 단체 채팅방에 속해 있던 한 사람은 주어를 밝히지 않고 내 글에 답하는 듯한 글을 써서 올렸다. 요는 지나간 일을 회상하는 노인네가 지나친 감상에 빠진 것이 재미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아주 효율적으로 “노잼”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그 글의 “킥(kick)”이었다. 내 글에 대한 글이냐는 물음에 그는 웃으며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눈을 씻고 보아도 내 얘기였다. 그 사람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쓰는 것을 모종의 이유로 회피한 채로, 아마 편리하게 내 글에 대한 비평을 쓰기로 한 듯 보였다. 적잖이 황당하고 의아했던 경험이었다. 내 글이 비평글로 다뤄질 만큼의 가치가 있었던가, 싶기도 했고. 솔직한 마음으로는 진짜 진짜 속상했다. 그렇게밖에 쓸 수 없던 내 한계를 광장에서 질책당한 것만 같아서.
끝 부분만 노랗게 물든 은행잎들과 노인이 된 나를 상상해서 썼던 그 글은 어찌 보면 닮았다.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다. 지들만 더 물들겠다고 성숙해지겠다고 하늘을 향해 뻗어있다. 그래봤자 더 빨리 떨어지고 어설퍼질 수 있는 건데도. 그건 상관없다는 듯 무리를 해서라도 돋보이고 싶어 한다. 오늘은 11월 1일. 지금쯤 은행나무는 완전한 노랑이 되었을 것이다. 풋풋하다 못해 설익었던 내 글은 어떤가. 그래도 좀 떫은맛은 이제 덜 나는 문체가 되지 않았나. 아직도 자문할 따름이지만. 일찍 물들어 바닥에 예쁘게도 떨어져 있던 그 은행잎을 초록 은행나무와 함께 사진첩에 담아왔듯, 나는 그때의 떫은 글 역시 간직했다. 지난해에 출간한 내 책 『적당히 솔직해진다는 것』에 ‘에필로그’로 넣어둔 것이다. 좀 어설프면 어떤가. 이른 가을, 가지 끝에서 여러 색으로 물든 은행잎들처럼, 글쓰기를 시작할 때만 쓸 수 있는 희한하고 또 귀한 글도 있는 거니까. 다 품고 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