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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드먼드 마운틴 Nov 12. 2019

당신 인생의 최고 여행지는 어디입니까?

뉴질랜드 웰링턴 외곽 파라파라우무 작은 바닷가 마을보다 더 강렬했던 그곳

나는 ‘여행 이야기’ 카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 카페는 실명이 아닌 닉네임을 사용한다. 프로필 사진도 실제사진일 필요는 없다.


푸딩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회원이 활발히 활동 했는데, 보름 후에 캐나다로 이민 가게 되었다는 글을 올렸다. 나는 푸딩에게 간단한 안부 인사와 함께, “지금까지 살면서 당신의 최고 여행지는 어디였습니까?”라고 물었다. 푸딩의 대답은 이랬다.


“해피(happy)한 추억이 깃든 곳은 나이가 들어 기억이 희미해져가도, 전두엽 어딘가에 랜드마크(land mark)가 되어있어요. 그래서 한 번씩 불쑥 그 순간으로 소환하게 만들죠. 저에게도 그런 곳이 물론 있어요.


뉴질랜드 웰링턴의 외곽 파라파라우무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이 그랬어요. 하지만 그 곳보다 더 좋았던 곳은, 그러니까 가평의 어느 시골집이요.”    

나는 ‘가평, 시골집’이라는 말에 꽂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 얘기를 들려줄 수 있느냐.”고 하니까, “비싼데요.”라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밤 정리해 내일 카페에 올려줄 거고,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글이 될 거라고 했다.


가평과 시골집이라는 그녀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며 그렇게 하룻밤이 가고 다음 날, 푸딩의 글을 읽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푸딩의 얘기는 이랬다.

지금까지 살면서 해외여행도 여러 번 다녀오고, 우리나라에서 유명하다는 곳도 때마다 다녀보았지만 그곳만큼 좋은 곳은 지금도 못 찾았어요. 25년 전 가평의 어느 시골집이요.


부산이 집인 저는 학교에서 가까운 서울 종로에서 언니와 자취를 하고 있었고, 그러니까 그때가... 대학교 3학년 겨울이었어요. 저에게는 가장 뜨거웠던 1월의 겨울이었고, 모든 시작은 꽃 때문이었어요. 수선화였죠.    


저는 당시에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디자인을 전공하려고 프랑스로 떠나기 한 달 전 즘, 동갑내기 남자를 한 명 소개받았어요. 한 달 후면 한국을 떠나는데 뭔 남자친구냐고 했지만, 친한 선배가 가볍게 만나보라고 했어요. 서로 연락처만 가지고 있다가, 그 남학생에게 먼저 전화가 왔어요.    

 

정치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는데, 꽃 얘기를 하는 겁니다. 겨울이 빨리 가고 봄이 와서 집에 있는 행운목이 피는걸 보고 싶다는 겁니다. 올해가 7년째 되는 해라면서 들떠 있었어요. 행운목이 7년 만에 한번 겨우 필가 말까한 꽃이라잖아요. 남자아이가 꽃을 얘기하면서 좋아하는 것이 좀 웃음이 나더라고요.


활연화인지 금송화인지 저도 생소한 꽃 얘기를 하면서 수선화 얘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제가 ”작년에 제주도 여행에서 본 수선화가 생각나요, 제주도 추사 유배지에서 수선화를 보았어요, 추사가 외로움을 달래려고 심은 거 아닐까요? 그리고 수선화는 어릴 때 우리 집 앞마당에도 많았어요,”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러고 나서 제가 이상적과 세한도를 얘기하자, 그 남학생이 추사와 이상적의 우정, 세한도의 탄생배경을 막힘없이 애기하는 겁니다.


저도 역사에 관심이 많은데 그는 저보다 더 해박했어요. 조금씩 그 애에게 관심이 가더라고요. 그렇게 꽃 얘기, 역사 얘기, 여행 얘기로 대화 하면서 친해지게 되었어요. 유학 떠난다는 말은 하지 못했고요.     


며칠 후에 다시 그와 통화하면서, 내가 머리가 아프다고 했어요. 그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지만, 생각이 많아서 머리가 복잡하다고만 했어요. 그러자 그가 이렇게 얘기하지 않겠어요.


“그럼 내일 우리 가평 시골집에 가요. 너무 좋은 곳이에요. 눈 덮인 산도 볼 수 있고, 개울도 있고, 정자도 있고, 흰 개 세 마리도 있어요. 머릿속이 다 시원해질 겁니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가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말고 갔다 와요. 내일 가족들이 모이는데 나도 오랜 만에 가요.” 하지 않겠어요.  


저도 왠지 싫지 않았고 호기심도 생겨, 밤중에 생각 좀 해보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그가, “생각하면 더 골치 아프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자연 속에 있다가 오면 머리가 맑아질 거다.” 그래서 제가 “그럼, 알았어요. 갈게요.”라며 약속하고 말았어요.    


오전에 만나기로 했는데, 유학 가는 문제 때문에 언니하고 급한 볼일이 생겨 버린 거예요. 그래서 아침 일찍 그에게 전화를 걸어 정말 미안하지만 사정이 생겨 못 가게 됐다고 했죠.


그러자 그가 말하기를 오전에 볼일 끝나면 오후에 갈 수 있지 않느냐? 부모님에게 벌써 말해뒀다라고 하는 겁니다. 아마도 그는 저를 꼭 시골집에 데려가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저도 약속만큼은 지키려고, 최대한 그렇게 해보겠다고 했어요.     


다행이 한시 즘 되니까 일이 잘 마무리 되어서 서둘러 청량리 역으로 나갔어요. 그 애가 먼저 나와 있었는데, 남자애가 하얀 피부의 얼굴에 만화책 주인공, 구영탄처럼 생겼더라고요. 그는 저를 보더니 내내 웃기만 하더라고요. 그동안 전화통화만 하고 처음 만난 자리였어요.


그런데 처음 만나서 남자친구도 아닌 남자의 집에 가다니, 생각해보니 이상하고 웃음만 나오더라고요. 그 아이도 그것 때문에 웃나 싶은 겁니다.


기차를 타고가면서 우리는 그동안 못 나누었던 얘기를 했어요. 남자애가 저보다 더 수줍음을 타는 거 같았어요. 가평역에 도착하니까 삼촌이라는 분이 데리러 나와 계셨어요.     


차를 타고 30분 즘 가다가 길이 좁아지면서 꼬불꼬불해지잖아요. 그가 말하길 여기서부터 자기네 집 들어가는 길이라네요. 저는 눈 덮인 그 길이 얼마나 좋은지 탄성을 질렀어요, 너무 좋다고요. 짧지 않은 길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500여 미터는 된 거 같아요. 왼쪽으로는 야산이, 오른쪽으로는 골짜기가 펼쳐졌어요. 나무와 하늘만 보였어요. 봄에 오면 정말 아름다운 길일 거 같았어요.    

그렇게 가다가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서, 파란 지붕이 보이는 거예요. 굴뚝에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워 오르고, 앞쪽으로는 하늘과 먼 산만 보이고, 그림동화 같은 집이었어요.


정말 하얀 개가 세 마리 있었고요. 그의 부모님, 이모, 여동생이 반겨주었어요. 두부를 만들고 계셨어요. 수돗가에 시체가 된 닭 몇 마리가 있었고요.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제가 그랬어요.

“가족들 모이는 날 같은데,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모라는 분이 웃으면서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럼, 가족이 되면 되죠.”

저는 약간 당황스러우면서도 미소를 지어 보였어요.     


그는 나보고 편하게 있으라면서, 닭을 잡기 시작했어요. 한두 번 잡아본 솜씨가 아니더라고요. 저도 일을 도우려고 하자, 손님이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집 주변을 둘러보았어요.


정자 옆에 개울이 있었어요. 개울은 얼어 있었지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로 들리던지 녹음기를 가져왔으면 녹음해서 가져가고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시골집은 해가 빨리 진다고 하더니, 온지 얼마나 됐다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겁이다, 하기야 늦게 도착 했으니 시간 탓만 할 수는 없었죠. 저녁을 맛있게 먹었어요. 닭백숙도 먹었고요. 농사지은 반찬으로 너무 맛있게 먹었어요.     


저녁을 먹은 후에, 나는 언제 가야 하나 걱정이 되더라고요. 막차 시간에 맞추어 가려면 그렇게 여유가 많지 않았어요. 그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눈치더라고요. 올 때는 막차 타고 갈 생각하고 왔거든요.  


그의 어머니가 저에게 “자고 갈 거죠?” 그러기에 옆에 있던 그가 “아니에요, 어머니. 막차 타고 갈 겁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모가, 오자마자 가면 섭섭하지. 자고 가요. 닭똥집도 구워먹어야지, 하는 겁니다.


그가 나에게 “닭똥집 좋아해요?”그러기에 너무 좋아한다고 하자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어요. ‘여자가 닭똥집 좋아한다는 게 그에게는 그렇게 좋을 일인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머니가 “우리 딸아이와 같이 자면 되지. 나도 딸 가진 엄마지만, 이렇게 보내는 게 섭섭해서 그래요. 집에는 잘 얘기해 봐요.”라고 하는 겁니다.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사정을 설명했고, 여하간 그렇게 해서 자고 가기로 했어요.     


그가 식구들에게 나와의 관계가 여자 친구가 아니라고 말했나 봐요. 시골집에 한번 놀러오고 싶어 해서 같이 가는 거니까, 부담 주지 말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어른들이 코치코치 묻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식구들은 여자 친구니까 같이 왔겠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딱 한분, 자고 간다고 하자, 어머니가 내 옆에 오셔서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는데, 궁금해 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여차여차 해서 오게 되었다고 말씀은 드렸었죠.   


이제 가평의 밤은 한밤중이 되었어요. 정말 아름다운 풍경은 이때부터였어요. 하늘에서 별이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어요.


마당에 숯불이 피워지고 석쇠 위에 닭똥집이 지글지글 소리 내며 구워졌어요. 아버지, 삼촌, 이모와 함께 우리는 숯불 주위에 둘러 앉아 닭똥집이 익기를 기다렸죠.


분위기 탓일까, 겨울밤이었지만 하나도 춥지 않았어요. 바람 때문에 연기가 자꾸 내게로 오자, 옆에 있던 그가 몸으로 그 연기를 가려주었죠. 그래도 눈이 시렸어요. 학교 포장마차에서 닭똥집을 먹어 봤지만, 이렇게 숯불에 구워 먹는 건 처음이었어요.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시간이 자나면서 아버지, 삼촌, 이모가 순서대로 들어갔어요. 자리를 피해주시는 건지...


그와 나는 나무를 더 가져다가 불을 지폈어요. 한동안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고.. 그러다가 그가 “추우면 들어갈까요?” 그러기에 “아니오, 조금만 더 있어요.”라고 했어요. 이 말을 하고 나서 조금이라는 말은 하지 말걸 하는 후회가 들더라고요. 나에게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곳이잖아요. 그 밤을 자연과 함께 하고 싶을 정도로 좋았으니까요.


잠자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까만 밤에 하얀 눈, 밝은 보름달, 빨갛게 타오르는 장작숯불, 그와 나의 수줍은 마음, 이게 그날 밤의 풍경이었어요.      

그렇게 그와 한 시간 정도 있었나, 그가 걱정을 많이 하기에 마지못해 집안으로 들어갔어요. 나는 그에게 잘 자라는 말 대신에 “고마워요.”라고 말했어요. 그냥 그 말이 먼저 나와 버렸어요. 그러고 나서 나는 잠자리에 들면서 아침에 일어나서 제대로 산책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남의 집이라 잠이 잘 안 올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너무 잠을 잘 잤어요. 자연속이라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요. 술 몇 잔 먹은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밥 먹기 전에 그와 집 주변을 한 바퀴 돌았어요.


그가 안내해 주는 길을 따라 갔고, 산길을 조금 올라가니 시야가 트이면서 주변을 한 눈에 볼 수 있었어요. 밤에는 볼 수 없던 또 다른 그림 같은 그 모습이 펼쳐진 겁니다.     

그렇게 가평 그의 집에서 1박을 하고 서울로 돌아왔어요. 그 후에 그를 한 번 만났어요. 그에게 유학 간다는 사실을 알리자, 많이 섭섭해 하더라고요. 나는 그에게 준비해온 선물을 주었어요. 모래시계였어요.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했어요.


“나에게 아름다운 시간과 추억을 선물해 주어서 너무 감사해요. 별이 쏟아졌던 가평의 밤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여행이었어요.”    


그러자 차를 마시다 말고 그가 나의 손을 잡더니 밖으로 나가는 겁니다. 무엇을 찾는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데, 어디를 가느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어요. 30분 정도 헤매다가 그와 나는 꽃집 앞에 섰어요.


그는 꽃집 주인아주머니에게 행운목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아주머니는 딱 하나 남아 있다고 했고, 그가 그것을 사서 나에게 주는 겁니다. 그리고 말했어요.

“행운을 빌어요. 프랑스에서 돌아오면 꼭 다시 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고, 저는 프랑스로 떠났죠. 프랑스에서 공부 하고, 일도 하면서 5년을 있었어요. 한국에 돌아와서 그를 찾아볼까 했지만,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서서히 그가 머릿속에서 잊혀 갔어요.


그러다가 가평 쪽으로 놀러갈 때면 그 집과 그 애가 생각나더라고요. 지금 그 남자애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하기는 해요. 그 시골집도 다시 가보고 싶고요, 이게 제 여행 이야기의 끝이에요.     


나는 푸딩의 글을 읽으며 가슴이 터질 듯 했다. 가평 시골집의 남자애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은유를 만나기 전에 나의 첫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다. 내 마음속에 아직도 첫사랑 이상의 설렘으로 남아 있는 그런 존재였다.


나는 고민에 휩싸였다. 당장 “그 애가 나야”라고 밝히고 싶었다. 보고 싶고, 얘기하고 싶어, 일이 손에 안 잡혔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게 시간이 갔다. 하루 내내 고민했다. 다음 날, 그 다음날 까지 고민은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 내린 결론은 ‘두 번 이별은 하고 싶지 않아.’였다. 그녀가 남긴 글만 마음에 담기로 했다.


그랬다. 그녀의 여행에는 설렘, 자연, 사람, 사랑, 추억이 있었다. 그녀는 여행의 본질을 순수한 사랑으로까지 승화시켰다. 누구나 그렇듯 여행 후 현실로 돌아오면 남는 것, 그것은 추억이다. 그 추억의 저편이 너무도 강렬해서 지금도 설레는 감정이 남아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 스토리를 듣는 사람도 행복한 일이다. 그녀의 여행은 그런 여행이었다. 내가 그녀의 행복한 여행에 동행한 주인공이 되어서 너무나도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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