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 하나를 조건 없이 떼어줄 수 있는 친구
행복이 무엇인지 네가 다시 써봐.
<난 일상이 행복이야. 그런데 연산아, 나에게는 중요한 행복이 또 하나 있어. 내 신장 하나를 떼어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거야, 바로 너 연산이야. 그런 친구가 있어서 난 정말로 행복해.>
모안에게 문자가 왔다.
연산아, 연휴라서 혼자 강원도 속초에 왔어. 지금 속초는 눈비가 많이 내리고 추워. 이번 여행 콘셉트는 콘도에서 뒹굴기야. 아무것도 안 할 권리라고나 할까. 전복처럼 청정음식만 먹고 조용히 있다가 올라갈 거야. ㅎㅎㅎ. 콘도 9층 로비에 설악산 전경이 보이는 소파 두 개가 놓여 있어. 미술관처럼 사진 액자들도 죽 걸려 있네. 혼자 앉아서 설악산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하고 있어. 너무 좋아. 역시 여행은 평일이 최고야. 주말과 휴일 여행은 돛대기고. ㅎㅎㅎ. 서울 가면 연락 할게.
모안을 자주 만날 수 없었다. 자주 만나고 싶어도, 긴 시간을 일하는 내가 문제였다. 거기다가 모안도 근무시간이 부정확했다. 서로 시간 맞추기가 힘들었다. 만나서 이야기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대신에 문자와 통화라는 차선의 수단이 있었다. 이상한건 모안과 내가 연인사이도 아닌데, 통화가 처음에는 삼십분이었다가, 한 시간이 되고, 두 시간이 되고, 세 시간이 되었다. 서너 시간은 기본이 됐다. 거의 이삼일이 멀다하고 그랬다.
그렇게 2019년 12월이 가고 있다. 전 세계를 덮칠 대재앙은 아직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고, 사람들은 연말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누릴 이 권리행사를 언제까지 보장 받을 수 있을지, 이때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오늘도 나는 늦게 퇴근하고, 집에 와서 씻고, 대충 안주 만들어서 앞에 막순이 한 병 놓으면, 10시 30분이다. 모안에게 전화를 했다. 대여섯 번의 신호음이 간 다음에 모안이 받았다.
모안아, 벌써 한 해가 다 갔다. 이렇게 혼자 막순이 한 잔 할 때는 그리움이 밀려와.
막순이라고?
응, 막순이.
아... 호호. 연말이라 더 그럴 거고, 의미 있는 얘기를 하고 싶어 그런 거겠지.
삶의 새로운 여행을 하고 싶어. 지금의 삶은 너무 단조롭고 지루해.
해가 바뀌면 나는 네가 안개속이 아닌 신념으로 우뚝 섰으면 좋겠어. 그리고 시작한 일은 반드시 끝을 냈으면 좋겠고.
그러기를 나도 바래. 모안아, 참 이상한건 너를 만나고 나서는 우리 세계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해.
그게 내가 너에게 해주어야 하는 역할인가 보다. 그러니 너는 목표만 보고 가면 되겠지.
목표라! 모안아, 너는 철학자가 되었으면 좋았을 걸.
연산아, 너는 노래는 못 부르지만 작곡가가 되었으면 좋았을 걸.
우리는 여기서 한바탕 크게 웃었다.
모안아 나도 노래를 잘 부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내가 전복으로 태어나면 가수 전복이 되고 싶다고 했잖아. 웃음교육이 아니라 노래교육을 받아야 할까봐
아니 그것도 받을 필요 없어. 나는 지금의 너의 노래 스타일이 좋아. 사람들을 박장대소 하게 만들잖아. 네가 노래 잘 부르면 재미없어.
이거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네. 모안아, 무언가를 바꾼다는 것은 참 어려운 거 같아. 특히, 내 삶으로 들어와서는 더 그래. 내 삶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
연산아. 왜 그렇게 생각해? 그러지마. 내가 살면서 겪은 좋은 시간도 힘든 시간도 지나고 보면 다 내거잖아. 내가 살아온 시간이야. 그게 없었다면 그 시간도 없었을 거야. 그러니 제일 중요한건 난 항상 그지 같이 힘들 때도 엉엉 울고 별지랄 다 떨고 했을 때도 네 가지를 지켰어.
뭔데?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잘 웃었어. 이 네 가지를 잘 지키니까 잘 버텨나가게 되더라고. 지나고 나니까 아무것도 아니더라. 이게 가능하려면, 나를 먼저 받아들일 자세가 중요해. 좋아하는 나도 있지만 좋아하지 않는 나도 있어. 그런 나도 인정해야 해. 나는 이런 사람이야, 이렇게 자신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난 다음에는 다른 사람도 그렇다고 인정하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도 줄어들어.
모안아, 나를 바꾸려고 노력은 해. 그런데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그건 행복할 줄 몰라서 그래.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정작 무엇이 행복한 삶인지 잘 몰라. 그저 추상적이거나 거창한 행복에 빠져서 살아. 너도 그런 거 같아. 오늘도 나는 너무 행복한 하루를 보냈어.
오늘은 무엇이 그토록 너를 행복하게 했어?
연산아, 인생에는 진정한 뭔가가 있어.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들은 그 뭔가를 위해서 사는 거야. 인류가 만들어낸 말 중에 가장 위대한 단어가 희생이야. 가장 설레는 말은 사랑이야.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최고의 단어가 뭘까?
글쎄. 행복?
맞아. 행복이야. 삶에서 돈보다 명예가 소중한 사람도 있고, 명예보다는 사랑이 소중한 사람이 있을 거야. 어떤 사람은 사랑보다는 돈을 쫒아가는 사람도 있어. 하지만 행복은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진정한 가치야. 다들 행복해지고 싶어 하잖아. 돈, 명예, 사랑도 행복과 함께 하지 않으면 의미 없는 거야. 하지만 연산아, 내가 말하는 행복은 연봉 10억, 대통령 표창장,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사랑, 이런 게 아니야. 내가 가진 행복을 나누어 줄 테니까, 너도 가져 볼래? 꼭 나누어 가져야 돼. 그래야 네가 행복해져. 그러면 네 인생이 달라질 거야. 너에게는 그런 에너지가 충분히 있으니까.
모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고를 나에게 나누어준다고 했다. 돈, 명예, 사랑이 아닌 그 무엇. 세속적 가치를 초월하는 진짜 행복을 주겠다는 말이다. 과연 그 행복을 나도 가질 수 있을까!
연산아, 행복을 얘기한 책들은 많지만, 나는 전복의 행복의 얘기하고 싶은 거야. 우리는 이 세상사람 누구보다도 전복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나누어 왔어. 그러면 뭐하니. 실천을 안 하는데. 전복은 이렇게 말해.
애들아, 무엇을 꼭 가져야 행복한 건 아니야. 가지려는 욕심에서 행복을 찾지 마.
내 행복도 전복을 통해 얻은 게 많아. 물론 돈이 풍족하고, 명품 옷을 사 입고, 비싼 음식을 먹는 것도 행복이야.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잖아. 그러니 자신의 삶 조각조각에서 행복을 찾으면 돼. 그러면 그 사람이 진짜 행복한 부자야. 그런 거 아니? 우리는 사소한 변화를 줄 때 행복을 느껴. 변화를 줄 때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있어. 나는 말이야, 아침에 일어나면서 꼭 나에게 하는 첫인사가 있어. 기지개 펴면서, 아, 나는 행복해. 이렇게 말해. 그러면 정말 기분이 좋아져. 그러고 나서 하루를 시작해. 그냥 하품하면서 일어나는 거 하고 달라. 너도 내일부터 이렇게 변화를 줘봐. 출근하면서 사람들에게 밝게 웃으면서 인사하면 직원들이 다 쳐다봐. 내 목소리는 뭔가 다르긴 다른 가봐. 나는 그냥 인사하는 건데. 일하면서 상사에게 잔소리 들을 때도 있잖아. 어른이 되어서도 일하면서 혼나는 구나.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어, 동료들과 갈등 생길 때, 마음이 편하지 않잖아. 이럴 때 무슨 변화를 줄까 고민해 봤어. 갈등 이후에 불편한 마음이 올라올 때 나에게 이렇게 말해. 모안아, 너는 득도의 경지야. 참 깊어. 너그럽고 딱 이상적인 인간이야. 이게 일종의 주문 같은 거야. 이렇게 두세 번 말하고 나면 마음이 좀 편안해져. 이 주문은 여러 상황에서 잘 써먹고 있어. 집에서는 어떤 줄 아니. 기분이 울적할 때는 설거지 팍하고, 싱크대 팍팍 닦고 하면 기분이 좋아져. 이런 변화도 있어. 난 울적하지 않아 하면서, 룰룰랄랄 CD 돌려 음악 듣거나, 유튜브 틀어놓고, 청소를 해. 그러고 나면 내 기분이 낳아져. 깨끗해진 거 보면 기분이 좋아지잖아. 별거 아니야. 울적하거나 우울할 때, 내가 나만의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숫자를 세면 돼.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은 운동으로 풀면 돼. 너처럼 글 쓰는 사람은 글로 표현하면 돼. 이게 뭐 어려워. 이렇게 다 치워놓고 땀 한번 쫙 흘리고, 샤워 싹 하고, 거기다 금상첨화, 술 한 잔 먹는 거야. 내가 좋아하는 안주해서 먹는 거야. 그럼 이게 최고의 행복이야. 그런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될 거 아니니. 너 밤늦게 들어와서 혼자 막순이 먹을 때 행복했어? 아니잖아. 일 하는 것도 행복하지 않고, 사는 것도 행복하지 않고, 그게 뭐니. 행복이 무엇인지 네가 다시 써봐. 사람들에게 제대로 행복을 보여줘 봐. 넌 할 수 있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뭐 단순하지만 나 같으면 이런 제목으로 글 쓰고 싶어. 전복 위에 행복이나 행복 옆에 전복은 너무 웃긴가. 호호.
맞다. 전복의 삶은 너무 조용하고, 결코 흥미진진하지 않다. 버트런드 러셀은 말한다. 행복은 조용한 삶이고, 위인들은 조요한 삶을 즐겼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렇게 흥미진진하게 보이지 않는다. 위대한 성취는 결코 시끄러운 삶 속에서 오지 않는다고 했다. 모안의 행복론이 계속됐다.
이런 거지. 텔레비전을 봐도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골라서 볼 때, 나는 그것도 행복해. 집 구경 프로그램이 있어. 나는 그 프로를 보면서 실제로 내가 그 집에 사는 거 같은 행복감이 밀려와. 와, 정말 멋있다, 이렇게 말해. 그냥 그걸로 행복해지는 거야. 또는 김치볶음밥을 했어, 너무 맛있는 거야. 내가 했는데도. 미치겠어. 미쳤나봐. 너무 맛있어. 이러면서 먹어. 이게 행복이야 나는. 내가 뭘 했는데 내 맘에 쏙 들어. 그럼 너무 행복해.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내 바람이야.
연산아, 나는 이런 게 거의 매일 매일 있어. 사람마다 각자 좋아하는 게 따로 있을 수 있겠지만, 너도 나와 같이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다. 너 있잖아.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어. 행복이라는 거 말인데, 그것도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연연해하지 마. 네가 어제까지 행복하고 좋았어.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는 거야. 중요한건. 난 지금 너와 통화하는 이순간이 가장 행복해. 알겠니? 지금 이 순간이 인생이 다가 아니야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오늘밤 내가 무슨 일로 죽을지 누가 어떻게 알겠냐고. 그러니까 이 순간이 행복하면 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돼. 난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으면 좋겠어. 그 행복이 뭐든 행복할 때 이 행복이 어디까지 갈까, 뒤끝을 남기지 말라는 거야. 이제 뭐가 좀 잡혀?
응. 정신이 번쩍 깬다.
연산이 넌, 이런 거 가지고는 행복이 차지 않을지 몰라. 그래서 네가 힘든 거야. 행복의 출발선을 너무 멀리 잡으니까 그런 거 같아.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침에 살아 일어나서 움직이는 것도 행복이고. 기지개 쫙 뻗으면서 기분 좋은 것도 난 행복이야. 난 일상이 행복이야. 그런데 연산아, 나에게는 중요한 행복이 또 하나 있어. 내 신장 하나를 떼어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거야, 바로 너 연산이야. 그런 친구가 있어서 난 정말로 행복해.
모안아, 취한 거 아니지?
신장을 떼어줄 수 있는 친구라는 모안의 말에 울컥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뭔가 보답을 해야 하는데, 나온다는 말이, 웃자고 하는 얘기였다. 그러면 안 되었는데 말이다. 내가 다시 말할 사이도 없이 모안이 이어 얘기했다.
연산아, 다시 말하지만, 변화 없이는 행복도 없다. 그 변화라는 것이 대단한 게 아니고. 네가 즐길 줄 몰라서 그런 거야. 너는 왜 변화하지 않고 안 고칠까? 나도 하는데 나보다 더 강인하고 침착하고 감수성 풍부한 너는 왜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게 의문이야.
나는 또 다시 아무 말도 못했다.
2019년 12월 31일. 이렇게 모안의 행복론을 들으면서 한해를 마무리했다. 2020년 1월이 왔다. 새해부터 심상치 않은 뉴스가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다. 그 불안은 서서히 공포로 다가왔다. 이 공포의 서막과 진행은 이랬다.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전염병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이 전영병은 폐렴의 일종으로 공기를 통해 감염된다. 우리나라는 2020년 1월 20일에 첫 확진자가 나왔다. 코로나19로 명명되는 이 전염병은 2월, 3월을 지나면서 전 세계적으로 감염자가 속출했다. 마스크 착용이 일상화되었고, 사람 간의 모임과 이동이 제한되었고, 국경을 봉쇄하는 나라도 있었다. 비행기가 뜨질 않으니,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곳은 항공업계와 여행사였다. 모안이 다닌 여행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 여행객이 입국을 못하고 우리나라도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가 안 뜨니 항공사, 여행사 직원들 실직이 줄을 이었다. 모안도 3월 말에 실직했다.
나는 모안에게 괜찬아?라고 물었다. 모안이 대답했다.
연산아, 어떻게 아픈 걸 다 아프다고 말해. 어른인데. 나는 아프다고 잘 안 해. 이참에 좀 쉬는 거지. 집에서 뒹굴뒹굴하니까 너무 좋아. 씩씩하게 살 테니, 걱정하지 마.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람간의 대화가 잠긴 문을 푸는 열쇠와 같다. 그런 사람들이 소울 메이트가 되고, 멘토, 멘티 관계가 된다. 모안과 대화를 하다 보면, 잠자고 있던 욕망이 깨어난다. 여기서의 욕망은 좋은 의미에서의 욕망이다. 잘 보고 잘 들을 줄 아는 욕망이다. 모안은 욕망을 깨우는 기술자일까. 내 머릿속에서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던 생각들을 가지런히 일렬종대로 줄지어 서게 했다. 촌철살인, 무난함이나 보편성을 엿 먹이는 잔소리에 머릿속에서는 전기충격이 일어나기도 했다. 어떤 때는, 해운대 파도소리처럼 혹은 명동성당의 종소리처럼 마음을 후벼 파 하염없이 이끌어 머물게도 했다. 이게 한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에 나의 두뇌는 각성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한 번에 대오각성 했으면 나는 아마도 니체에 버금가는 인물이 되었을 거다. 지극히 평범한 것이 자랑스럽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주 느리게, 전복의 움직임처럼 나의 두뇌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 무엇을 향해서 말이다. (나의 욕망이 깨어나도록 지치지 않고 꾸준히 도와준 모안도 대단했고, 전복의 미세한 움직임처럼 변화의 물줄기를 타고 가는 나도 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