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lie 수현 Apr 20. 2020

코로나 초절정, 미국에서 출산하다 (1)

격리 분만 들어보셨나요?

그 어느 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화요일이었다. 단지 평소 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샤워를 했고, 이른 아침의 무료함을 달래려 젖병소독기와 분유 포트 같은 육아용 가전제품을 시험 삼아 만지작거려보고 있었을 뿐. 실은 담당의의 소견에 따라 어제 새벽 6시 출산병원의 분만실 자리가 나면 '유도분만'을 시도하기 위해 입원하기로 되어있었다. 40주 차 예정일 이전에 분만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원칙에 따라 39주 차 중 유도분만을 시도한다는 건데 문제는 쉽사리 분만실 자리가 나질 않았다. 응급 산모나 고위험군 산모가 일시적으로 몰릴 경우, 며칠 기다려야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나, 월요일 새벽부터 밤까지도 분만실은 꽉 차 있었고, 심지어 화요일 오전까지도 언제 자리가 날 지 불투명했다.


내 경우 담당의의 유도분만 권고는 있었으나 고위험군에 해당하지는 않는 케이스. 가진통이 오거나 수축 정도가 심한 것도 아니었고 예정일까지는 닷새 정도가 더 남아있긴 했으나, 입원까지의 대기가 길어지다 보니 참 지루하고 답답했다. 언제 입원한다는 날짜만이라도 명확하다면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해둘 텐데, 당장 언제 병원 콜을 받을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참 싫었다. 그저 출산 가방만 끌어안고 있었을 뿐.


39주 4일 차, 또 한 번 방문했던 OBGYN. 이게 출산 전 진짜 마지막 방문이겠지?


월요일 새벽부터 병원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던 일정이 자꾸만 미뤄지니, 평소 방문하던 OB/GYN에서는 출산병원에 오늘 오후까지 입원하지 못할 시, 클리닉에 와서 또다시 아기 상태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결국 입원은 하지 못한 채, 아기가 잘 있는지, 태동검사만 간단히 하러 나흘 전 방문했던 클리닉에 다시 또 방문. (미국의 경우, 병원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평소 다니는 산부인과 클리닉과 출산병원이 분리되어 있다. 출산병원은 클리닉의 담당 의료진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병원 범주 내에서 정하게 된다. 출산 몇 주 전, 출산병원을 최종 정하기 위해 병원 투어를 하는 것도 특이한 점 중 하나.)


“전 언제 출산병원에 입원할 수 있을까요?”


“가끔 이럴 때가 있는데,
아마 내일까진 기다릴 필요가 있을 거야.”


허무한 마음으로 집으로 컴백. 원래 대학원 수업, 온라인 강의가 있는 날이었는데 나는 '유도분만'을 하러 갈지도 모르니 출석을 하지 못할 수 있다고 교수님께 양해를 미리 구해둔 터였다. '도대체 언제쯤 병원 분만실 자리가 나려나' 지친 마음을 끌어안고 소파에 누워 쪽잠을 청하고 있던 차, 그때 마침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 "여보 1시간 내로 병원으로 오래!" 그때 시각이 화요일 저녁, 8시 30분쯤.


평소 같았다면 재잘재잘 남편과 수다를 떨며 병원 가는 길을 즐겼을 텐데, 그날 같아선 왠지 대화에 대한 본능을 몸 깊숙이 밀어 넣어둬야만 할 것 같았다. 밤 운전이 조심스럽기도 했지만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만감이 쉼 없이 교차했기 때문.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병원 도착. "드디어 시작이구나! 어찌 됐든 돌아올 땐 ‘너’를 태워 돌아가겠지?" 숨 한번 깊게 고르기. 묵직한 출산 가방과 함께 설렘과 부담이 고루 섞인 무거운 마음도 '착' 병원 입구에 내려두기.

“very very painful two weeks!!!”

4월 초엽, 트럼프 대통령은 말했다. 코로나 시국, 앞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2주가 될 것이라고. 그렇다. 난 그 고통이 절정에 달한다는 국가 위기 상황의 시점에 또 다른 고통을 덧대기 위해 매사추세츠의 한 '병원'에 몸을 뉘어야 했으니, 이것 또한 고통 돌려막기?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롭고 경이로운 고통을 있는 힘껏 체감하기 위해 안전지대 '집'을 벗어나고야 말았다. 웬만한 레스토랑과 카페, 편의시설이 몽땅 문을 닫은, 그야말로 '집 안'에 만 있어야 하는 시국에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닌 병원에 며칠간 입원을 해야만 한다니... (실제로 보스턴 시내 유명 대형 병원들 내에서 의료 스태프의 감염 사례가 상당한 수치를 기록한 뉴스를 보고 내내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 때문에 집에서 '출산'을 감행할 수는 없는 일. 맘처럼 될 리 만무하지만 최대한 신속하게 출산하고 재빨리 퇴원해서 집에 머물고 싶기만 했다. 뻔하디 뻔한 위안 섞인 대화를 괜스레 남편과 주고받으며 시간과 그 공간을 버텨 내려했던 나.

“우리 괜찮겠지?"
“응, 괜찮을 거야."


남편이. 머물렀던 보호자용 자리. 유도분만 일정에 실제 출산까지 상당히 긴 시간 병원에 머물러야 할까 봐 꽉꽉 채워온 캐리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한 일은 발열 증상 체크. 개인 마스크는 사용불가. 병원에서 공식적으로 수령한 의료용 마스크만 착용 가능. 우리 부부 나름대로 한국에서 가져와 쓰고 있던 'KF94' 마스크를 넉넉히 챙겼는데 고스란히 출산 가방 안쪽에 푹 넣어둬야만 했다. 비상상황에 대비해 입원 수속 절차에 필요한 서류를 사전에 미리 제출했던 덕분에 분만실 입성은 초고속이었다. 그렇게 남편과 나는 6번 분만실에 입성. 출산교실 수강하면서 병실 투어 할 때 견학했던 그때 그 방과 똑같다! 유도분만부터 실제 분만을 한 뒤 아기를 만나기까지 그 모든 과정이 이 분만실에서 이뤄진다. 누군가와 공간을 공유하지 않아도 되고 중간에 짐을 옮길 필요가 없으니, 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물론 이 방에 입장한 뒤 수여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사회적 접촉을 줄이기 위해 남편도 나도, 이 병실 문을 열고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는 엄격한 행동 방침이 뒤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잠깐이라도 병원 자판기를 이용하고팠는데 그마저도 불가. 한 마디로 개인 분만실을 부여받은 뒤 각 산모 별로 보호자와 함께  자가 격리되어있는 셈. "아하, 그런 거였어. 병원 내에서도 절대 이동할 수 없는 거였어!"


진작에 운동 꾸준히 했더라면 유도분만의 더딘 속도가 좀 나아졌을까. 분만실에서 짐볼도 딩굴딩굴 굴려보며 지루함 달래보기.

화요일 밤 입원 직후부터 유도분만을 위한 절차 밟아가기. 첫 단계는 새끼손가락 손톱보다도 작은 알약을 혀 아래 두고 녹여 먹는 방식. 4시간 간격으로 총 6번까지 투약할 수 있는데 워낙 크기가 작은 데다가 가진통마저도 없던 시기라서 이거 참 꽤나 지루했다. 차라리 아픈 느낌이라도 있다면 '출산이 임박했구나' 절감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아기를 기다릴 텐데, 배가 무겁기만 했을 뿐. 진통의 느낌 1 없이 분만실 안에 내내 '갇혀' 있을 줄 진작에 알았다면!!! 노트북이든 책이든 바리바리 챙겨 올 걸 그랬지. 후회막급. 출산하러 가면 당연히 정신없을 테니, 출산과 육아용품과 거리가 먼 것은 과감히 하나도 넣지 않았는데 '기다림'은 생각보다 길어졌고 분만실 격리 상태는 지루함의 최고봉. 나야 출산 임박 임산부라지만, 같이 분만실에서 버티고 기다리는 남편은 얼마나 지루했을까.


물이든, 커피든, 원하는 게 있으면 이야기를 해. 우리가 가져다줄 테니.


한마디로 이건 '격리 분만'이었다. 자연분만 제왕절개 유도분만, 분만 방식에 여러 가지가 있다지만, 코로나 시국이 가져다준 추가된 변화 중 하나, '격리 분만 (Quarantine Delivery)'. 입원 전에도 병원에 한번 들어가면 중간에 어떤 경우라도 외출이 불가능 하니 필요한 짐을 다 챙겨가야 할 거라는 조언을 듣기는 했었다만, 이렇게나 '병실에만' 철저히 갇혀 지낼 줄은 몰랐었잖아. 정말이지 우리가 머무는 분만실의 문 손잡이를 잡을 일조차 없었다.


“병원 카페테리아는 갈 수 있겠지", 호기롭게 모닝커피를 테이크 아웃하러 가려던 남편의 발길이 간호사에 의해 막힌 뒤로 점점 시무룩해지는 듯했던 그의 표정. 커피든, 물이든 필요하면 '우리에게 말하라'면서 뭐든지 가져다주겠다는 친절한 의료 스태프들은 너무나도 고마웠지만 내 곁을 한시도 떠나서는 안 되는 남편의 운명이 어찌나 안쓰럽게 느껴지던지. "조금만 잘 버텨보자. 언젠가는 이 방을 떠날 수 있을 거야."

기내식과 비슷하게 닮아있던 병원식. 식사 주문서에 매 끼니 먹고 싶은 메뉴에 표시하면, 남편과 내 식사가 숑숑 배달되어온다
입원 이틀 차, 낮 2시 30분 유도분만을 위한 알약 4번째 투약. 지루해서 몸이 배배 꼬였던 시간들

진통의 강도를 1부터 10까지로 가정하고 '지금 이 순간' 몇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 나는 한참을 1에서 1.5 정도인 것 같다고 대답했고, 몇 번의 내진 이후에도 자궁문을 좀처럼 열릴 생각을 하질 않았다. 나, 지금 유도 분만하고 있는 거 맞지? 분만실에 있는 짐볼 위에 올라가 잠깐의 운동을 시도해보기도 하고, 집순이 모드를 너무 사랑하는 나조차도 좀이 쑤셔서 괜히 병실 안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릴없이 걸어보기도. "어머 4월은 4월인가 봐!" 창밖에 꽃이 얼마나 피었나 감상 모드에 젖어있어보기도 하며 시간을 '때우던' 수요일 오후. "나 내일은 출산할 수 있을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데...?"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너와 내가 격리된 거야”
꼬박꼬박 제공되는 식사. 병실을 나갈 수 없어, 정말이지 격리된 느낌.


끼니때에 맞춰 꼬박꼬박 남편과 내 식사가 병실 안으로 배달되었고, 마치 호스텔에서 '룸서비스' 받는 것 같다고 신기해했다. 남편은 끊임없이 얼음물과 커피를 가져다 달라고 했고, 나는 하필 평소에도 그다지 즐기지 않던 '애플주스'가 내내 고팠다. 방에 둘이 앉아있는 풍경이 왠지 중고등학교 시절, 단체 수련회에 가서 전교생 집합 콜을 받기 직전 방에 어색하게 뜨문뜨문 앉아있던 모습과도 닮았다고 회상했다. 유도분만 단계에 진입하면 일반식을 전혀 못 먹는 줄 알고 입원하기 전부터 집에서도 위를 살금살금 비워내고 있었는데 한참 속도가 나질 않아서 "에라 모르겠다. 일단 배고프니까 힘을 좀 비축해두는 걸로 하지 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마치 기내식과도 닮은 병원식을 즐겼다. 한국에선 무조건 미역국 밥 한 상차림일 텐데, 아메리칸 스타일 병원식은 역시 달라! 끼니별로 메뉴가 달라서 '골라먹는 재미'를 유유자적 느껴보기도.


유도분만의 지루함을 견뎌내려면 일단 체력이 국력
각종 주사, 혈액 채취, 무통 마취, 여전히 다 무섭기만 해.


진짜 진통이 시작되면 이 정도 바늘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닐 텐데, 난 여전히 '바늘'로 인한 고통이 더 아픈 상황. 전날 밤 9시 30분 입원했으니, 약 18시간이 지난 오후 서너 시 무렵의 분만실 풍경은 참으로 더뎠고 따분했다. 즐겨보던 한국 드라마도 집중이 안되고, 읽고 있던 전자책 e-book도 눈에 잘 들어오질 않아서 기분전환 실패. 지루함을 겹겹이 껴입고 오후를 물들이던 수요일의 6호 분만실. 지루함도 고통의 일부라면 '격리 분만' 역시 상당한 에너지를 요하고 있었다. 진전이 딱히 보이질 않는 유도분만 과정에서 몇 시간을 더 잘 버텨낼 수 있을 것인가. 정신력이 흐물흐물해지지 않은 채로 기나긴 시간 나를 온전히 지켜낼 것인가.


손세정제 사용에 대단히도 예민한 시국. 코로나바이러스만 아니었다면 우린 좀 더 편하고 자유롭게 출산했겠지?

"악!" 따분함에 뒹굴거리고 있을 무렵, 신기하게 배 아래쪽에서 방아쇠를 당기는 듯한 느낌, 고무줄이 끊어지는 듯한 신호가 배를 '땅'하고 울렸다. 드디어 19시간 만에 양수가 터진 것. 양수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경우도 있다는데? 노노. 이건 처음 겪는 사람도 딱 감지할 수 있는 양수의 느낌이었다. 진짜로 이제 본격적인 시작인 건가? 내일 오전이면 끝날수 있는 여정인 걸까. SES의 달리기 노래가 머릿속에 잔잔히 울려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겨운가요, 힘든가요, 끝이 보이질 않나요. 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버린 것을."


언제쯤 나도 스킨 투 스킨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될는지

그리하여 격리 분만 속, 고요했던 분만실이 스태프들의 오가는 발걸음으로 분주해지고 1과 1.5 사이 정도쯤이라고 진통을 표현했던 나는 점차 5와 7 정도를 외치고 있었으니! 지루한 격리의 끝이 비로소 서서히 보이는 듯했다.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걸. 끝난 뒤에 지겨울 만큼 쉴 수 있다는 것"


출산의 끝과 동시에 육아의 엄청난 피곤이 몰려들 거라는 선배맘들의 경고가 있었으나, 어찌 됐든 끝이 있다는 이 노래의 가사는 참으로 희망적이다. "언젠간 끝나긴 끝날 거야." 분만실에 격리된 채 보낸 병원 입원 이틀 차, 이 분만실에서 사흘 차에는 나갈 수 있는 거겠지? 나도 다른 산모들처럼 무사히 모든 걸 마치고 여기에서 격리 해제될 수 있는 거겠지?

곧 태어날 우리 아기도 곧 여기 누워있겠지? 내일 아침? 내일 저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