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초절정, 미국에서 출산하다
예로부터 출산한 자에게 주어지는 또렷한 미션 한 가지는? 바로 뜨끈뜨끈한 미역국 드링킹 하기. 평소 밥과 국, 반찬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남들이 다 그리한다고들 하니, 나도 평범한 룰에 어긋남 없이 ‘미역국’과 친한 산모가 될 줄 알았다. 제 아무리 한국 출산이 아니라고 해도 미국 출산 맘들의 후기를 참고하자면, 보온도시락에 미역국을 끓여가져 와 병실에서 즉석밥과 함께 든든한 한 끼를 먹었다는 이야기들이 대다수. 나도 별 탈 없이 따뜻한 국과 밥을 평범하게 마주하게 될 줄로만 알았다.
코로나 시국이 모든 계획을 바꿔놓았다. 임산부 본인 입원 시, 보호자 1인만 동반이 허용되는데, 문제는 한번 병원에 발을 들이면 절대 나갈 수 없다는 것. 임산부와 같이 들어온 이상, 출산 이후 임산부와 같이 ‘퇴장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안전수칙이 견고하게 짜인 건 대단히 마음에 들었으나, 이는 즉 중간중간 외부음식 공수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남편이 집에 잠깐 돌아가서 미역국과 간단한 밥반찬 도시락을 가져오는 것이 불가능했음은 물론, 근처 한인마트나 한식당에서 한국음식을 조달해오는 거도 금지인 셈. 언제 출산할지 알 수 없는데 입원하는 날부터 밥과 국 도시락을 준비해 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니던가! 그냥 주어진 상황 속에서 병원에서 제공되는 모든 것에 감사히 만족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 뭐가되었든 끊임없이 넉넉히 제공되는 게 어디야! 밖에 나가지만 못할 뿐.
다행일지, 불행일지, 고백하건대 나는 밥 끼니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스타일이다. 방송일을 한창 했을 때나, 미국 유학생활에 접어들어서나, 밥보다는 빵! 뜨끈한 국물요리보다는 따뜻한 라테 한 잔을 사랑했다. 크림치즈 가볍게 발린 베이글 한 입에 부드러운 라테 한 모금! 이 조합이면 산후우울증, 스트레스 모두 떨칠 수 있을 것 같잖아? 한국에 계신 어르신들, 산후조리 전문가분들이 워낙에 ‘미역국 먹기’를 강조하시니까 덩달아 ‘그래야 한다’고 잠시 초조해졌을 뿐, 가만히 생각해보면 난 미역국 안 먹어도 괜찮은 여자임에 틀림없었다. 어차피 먹지 못할 한국식 산모 식단, 괜히 억울해말자고 마음먹었다. 이참에 마음껏 아메리칸 스타일 산모식을 즐겨보는 걸로!
입원 이틀 차, 4월 8일 수요일 아침
화요일 저녁 10시가 다 되어서야 분만실에 입원했던 터라, 병원 제공 첫 끼니는 수요일 아침식사. 이곳저곳 블로그에서 이미 미국식 산모 식단 후기를 봐왔던지라 이거 참 은근히 설렜다. 정확히 비행기 오랜만에 타고서 기내식을 기다리는 심정과 닮았다. 복도에서부터 서서히 음식 담긴 카트가 덜컹덜컹 움직이는 소리가 나면 “먹을 거 오나 봐!” 하고 어린애처럼 눈동자를 초롱초롱 밝히곤 했다. 간단한 식사 메뉴판에 먹고 싶은 메뉴를 찾아 동그라미 표시를 하면 정해진 시각, 주문한 메뉴를 숑숑 배달해주는 시스템. 호텔 룸서비스만큼의 정갈하고 고급진 상차림은 당연히 아니겠으나, 이런 느낌의 조식, 나쁘지 않은 걸? 곧 본격적인 유도분만에 들어가게 될 것 같아서 최대한 위와 장을 가볍게 하고 있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포근하게 조리된 스크램블 에그에 살살 녹아들어서 일시적 미션 실패. 일단 본격 분만에 들어가기 전 아침 끼니는 든든히 먹어두는 걸로.
입원 이틀 차, 4월 8일 수요일 점심
아침 식사를 워낙 따끈하고 만족스럽게 즐긴 덕분일지, 허기가 들지 않아 나는 병원 제공 식사는 스킵! 남편만 간단한 닭고기와 파스타가 곁들여진 요리를 주문했다. 언제 분만이 시작될지 초조했던 나는 '뭔가 자꾸 먹어두면 안 될 것 같다'는 본능적인 직감에 "배 안 고파.", "안 당겨. 식욕이 없어." 자꾸만 음식을 밀어내기만 했을 뿐. 시간이 지나면서 살짝 깃든 배고픔은 집에서 챙겨 온 바나나 하나로 야금야금 달랬다. (이게 바로 다음날 출산 전 마지막 끼니였다는 매우 슬픈 이야기.) 억지로 참은 건 결코 아닌데 막대한 과제를 앞두고 있다 보니 '식욕'이 자연히 사라진 것. 이 모든 게 끝나면 남편이 먹고 있는 식사, 나도 마음껏 즐겨볼 테야.
얼음물 단골손님 여기 있습니다.
입원 첫날, 남편은 얼음물, 나는 얼음 없는 플레인 워터를 가져다 달라고 요청했는데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극도의 맹숭맹숭함. 너무 밍밍했던 탓에, 다음부턴 무조건 '아이스 워터'를 외쳐야겠다고 다짐했다. 분만실에 머문 2박 3일, 아니 병원 입원 전반에 걸친 4박 5일간 얼음물 참 많이도 마셨다. 에피 듀럴 (무통주사)을 맞은 뒤,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건 불가했지만 아이스 칩 (ice chip)은 물고 있어도 된다고 하여 기회가 될 때마다 입안에 얼음조각을 틈틈이 채워 넣기. 아기 출생 직전, 어지러움이 확 밀려오고 모든 호흡에 자신감이 뚝 떨어질 무렵에도 겨우겨우 입안에 얼음조각을 넣어가며 버텨냈다. 스타벅스의 큼지막한 얼음덩어리가 아니라, 커피빈의 작고 앙증맞은 얼음조각을 입에 넣고 찬찬히 녹여내는 느낌, 상상 가는가? 산모라면 차가운 음식은 피해야 한다고 어디에선가 접했던 것 같은데, 분만 과정 실제로 나를 지켜준 건 그야말로 '얼음물'과 '얼음조각'들. 내가 이토록 아이스 워터를 부르짖게 될 줄이야. 얼음 만세!
분만 당일, 남편의 급한 한 끼 식사
드디어 분만 당일 아침. 정말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 최후의 순간 의사의 입장과 동시에 아기를 만나기 직전의 순간. 약 30분에서 1시간 남짓의 여유시간이 주어졌고, 뭔가 소소한 의식을 치르며 나름의 마음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 상황. 나는 씻지 못하는 대신 진통에 찌든 얼굴을 간단히 정돈하고 가글링. 남편은 재빨리 씻은 뒤, 허겁지겁 조식. 나 도와주려면 남편이라도 잘 먹어야 해!
근데 진짜 맛있겠다!
미국식 아침 식사 단골 메뉴, 프렌치토스트와 팬케이크, 베이컨 향이 솔솔. 와우 이건 분만 촉진제의 효과와도 비슷했다고 감히 평해 본다. 생애 중대한 순간을 앞두고, (이를테면 대학교 수시면접, 아나운서 최종 사장님 면접과도 같은.) 동기 부여되는 무언가의 보상 거리를 상상해보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기 마련인데, 저 건너편 남편의 미국식 아침식사는 나의 식욕을 자극하기 충분했으므로!
나 빨리 출산하고
남편이랑 똑같은 거 먹을 거야
믿거나 말거나, 음식 자극 효과 덕분이었을까? 의사 입장 이후, 결정적 분만 과정에 든 시간은 고작 30분. 이 과정, 평균 2시간 정도 든다고 들은 것 같은데, 진행속도가 마지막 유도과정에서 급격히 빨라진 내 경우, 오전 9시를 채 넘기지 않고 아기 울음소리를 마주할 수 있었다. 8시 43분. 카페에서 간단히 아침 즐기기 딱 좋은 시간이잖아? 내 아들, 엄마 스타일 잘 아는구나! 간단한 음료 한 잔에 빵 한쪽 오물거리기 딱 좋은 타이밍이야. 그렇지?
출산 후, 처음 마주한 이 식사는 평생 잊지 못할 듯. 배고프다고 부르짖고 난 뒤, 처음 받아 든 이 식판. 출산하느라 고생했다는 격려가 얹힌 덕분일지, 빵의 양이 곱빼기로 더해진 듯. 살짝 식어 굳어버린 팬케이크와 차가운 메이플 시럽은 입안에서 완벽하게 녹아들진 못했으나, 서걱서걱 단단하게 씹히는 식감마저 어찌나 황홀하던지. 평생 잊을 수 없는 아침식사. 한 손으로는 가슴 위에 얹힌 갓 태어난 아기의 등을 쓰다듬는 평화를! 다른 한 손으로는 계란이 얹힌 모닝빵 샌드를 꽉 쥐고 하나도 흘리지 않겠다는 다급한 의지를 마주하던 그 순간. 미역국 밥상이 아닌 들 어떠하리. 난 이토록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성으로 아기와 함께 아침식사를 즐긴 건데!
아기와 나, 남편, 단 세 식구만 머무든 프라이빗한 병동, 모자동실로 옮긴 뒤로도 애정 하는 빵식이 넉넉히 제공되었으니... 나와 같은 빵순이들에게는 가히 만족스러운 식단 일지어다. 평소에 잘 먹지 않던 과일맛 주스도 종류별로 주문해서 촉촉함 더해보기. 누가 뭐래도 애플주스가 단연 1순위요, 오렌지주스, 토마토 주스, 크렌베리 주스, 저지방 우유에 이르기까지! 자자, 커피만 빼고 다 원합니다.
미역 라테 아니면 어떤가요?
입안이 이렇게 촉촉해지고
제 몸 안에 기분 좋은 생기만 돌면
그만인 걸요.
4박 5일 입원기간 즐긴 미국식 산모 식단. 한국 산후조리원에서 제공된다는 식사메뉴를 흘낏 곁눈질해보았을 때 내가 섭취한 것들과는 참으로 다른 메뉴 구성들. 때론 신기하기도, 혹은 접할 수 없는 것들과의 비교로 시무룩해지기도 했으나,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지. 이 또한 언제 경험해볼 수 있겠는가. 미국 출산의 약점이자 매력. 흔히 할 수 없는 경험을 온몸으로 누린다는 것.
물론 퇴원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남편이 차려준 미역국 밥상차림으로 뜨겁게 몸 데우기. 늘 새 모이만큼 먹는다고 놀림받던 나였는데 정성 담긴 밥상 앞에서 그릇 싹싹 비우기는 기본이었다지. 밥력보다 빵력이 더 좋은 나인데, 남편표 밥상 앞에서는 무력하게 항복이오! 병원에서의 미국식, 남편표 밥상에서의 한국식. 이 둘을 고루고루 다 누렸으니 산후 다이어트는 이미 실패각? 뭐 어쨌든 좋다. 일단은 넉넉히 배부르고 봅시다.
미국에서는 아기 낳고
햄버거 먹으라고 갖다 준다며?
빵 한 조각에 주스 한 잔 준다는데
이거 레알?
응. 레알! 근데 대충대충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가지런히 잘 담긴 한 끼. 형편없어서 실망스럽고 서러운 식사가 아니라, 냠냠 잘 먹히고 또 다음 끼니를 기다려지게 만드는 중독성 있는 한 끼. 식사 담긴 수레가 바퀴 구르는 소리만으로도 설렜고 기분 좋았던 그런 식사 시간. 2020년 4월에 누린 산모식 퍼레이드는 그래서 잊지 못할 추억. 둘째를 갖지 않는다는 마음이 지금처럼만 계속 확고하다면야 결코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 애잔한 추억이 될지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