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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Apr 25. 2020

조리원 천국은 없습니다

코로나 초절정, 미국에서 출산하다

때론 불가능한 줄 알면서 '만약'이라는 걸 가정해볼 때가 있다. 만약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의 출산이었다면? 나는 지금쯤 어떤 풍경 속에 자리하고 있었을까. 출산 16일 차인 오늘, 자연분만 이후 약 2주간의 조리원 생활을 마무리 짓는 시점 아니었을까. 보름가량 정들었던 방구석 구석을 매만지면서 집으로 돌아가 본격 육아를 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겠지. 조리원에서의 여왕 놀이를 마쳐야 할 때가 다가왔음을 내내 아쉬워하면서도 2주 동안 편안히 휴식을 취하며 '남의 차려주는 영양밥상'에 참 황홀했음을 되뇌고 있었겠지. 코로나 시국 때문에 한국에서도 현재 조리원 동기들끼리 마주할 기회는 없다고들 하지만, 바이러스만 아니었다면 나와 출산 타임라인이 비슷한 또래 친구들과도 조곤조곤 소통할 수 있었겠지. 그렇게 비슷한 감정을 나누고 공감하면서 생애 처음 마주하는 육체적 심리적 피로감을 덜어내고 치유하고 있었을 텐데. 자, 여기까진 기분 좋은 상상.

한국에서 흔히 그러하듯, 산후조리원 문화를 접했다면 많은 정보를 타국의 언어로 접해야 하는 지금처럼 외롭진 않았을 텐데.


자자, 다시 정신 차리고 나의 현실로 컴온. 출산 16일 차인 오늘, 내가 위치한 곳은 우리 미국 신혼집. 연방정부, 주 정부 권고에 따라 스테이 홈 라이프 철저히 실천 중. 아기 소아과 체크업 일정만 아니면 햇빛 볼 일이 전혀 없는 하루하루.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의 눈에 혹여 무리라도 갈까 봐 방안 조명을 최소화하고 은은하고 따스한 불빛만 켜 두다 보니, 하루 24시간이 해질 무렵 네댓 시의 느낌과 비슷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조리원 라이프에 입성했다면 일단 내 몸을 '회복'하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었겠으나 나를 돌보기 이전에 아기를 돌보는 게 1순위. 스스로를 챙기고픈 마음이 굴뚝같지만 부부 단 둘이 감당하는 타국에서의 '산후조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10배는 더 강도 높은 것이었다. 평생 경험해보지 못했던 어깨와 목 통증에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지만 그저 울음을 삼키고 버티는 수밖에.


조리원에 갈 수 없는 이 나라. 게다가 코로나바이러스의 콜라보까지. 일단 집에서 세 식구, 가만히 버티는 수밖에



자연분만 이후 썩 유쾌하지 않은 불편한 고통이 밀려와도 아기가 울면 '내가' 일어나야만 한다. 앉아있고, 기대 있고, 충분히 잠들어있고 싶은 욕구는 그저 지금 이 시점, 과도한 사치에 불과했다. 남편이 아무리 도와주고 함께한다 한들, 나 역시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고 그렇게 고단함 지수를 차곡차곡 축적해가야 했으니... 상상으로만 가능한 조리원 여왕 놀이? 조리원 천국? 현실은 그저 방 안에서 정신을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하겠다.

조리원에서도 새벽 수유 콜 받기가 굉장히 피곤하다고들 하던데. 난 이 모든 타임라인을 스스로 관리해야 하니... 엄마 만세!


많은 이들이 이미 알고 있다시피, 미국에는 '조리원' 문화가 없다. 한인 커뮤니티가 잘 형성된 일부 지역, 로스앤젤레스, 뉴욕 등지에 산후조리원이 있다는 소식을 접한 적은 있다. 아쉽게도 내가 거주하는 매사추세츠 주에는 그렇게 친절하게 갖춰진 '조리원'이 없는 상황. 지역에 따라 조리원으로 향하는 문화가 흔하지는 않은 대신, 미국 각 지역에 상주하고 계신 산후조리사 이모님 (한국 이모님)들은 출산 몇 달 전부터 철저한 컨택과 면접 후에 집으로 모실 수 있도록 커뮤니티가 잘 형성돼 있었다. (물론 비용은 꽤 상당한 편. 이모님이 거주하고 계신 주에서 우리 집에 몇 주 머무실 수 있도록 왕복 비행기 표도 따로 구입해드려야 한다.)


성격이 꽤나 급한 편인 나는 작년 9월부터 조리사 이모님 한분 한분께 메일을 보내 조리 비용과 우리 집까지의 출장 가능 여부를 여쭤가며 탐색에 탐색을 거듭했다. 마침 산후마사지를 전문으로 하고 계신 마사지 전문가 분도 보스턴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계시다는 소식을 접한 뒤, 집으로 모시고자 몇 달 전부터 예약 연락을 해뒀던 터.


산후조리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면, 이리도 불량한 당 충전 간식들도 엄격히 차단하며 몸 관리를 했으려나? 부부의 스트레스 풀기

하지만 이글의 부제에서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이 모든 건 '코로나'라는 변수 앞에 와장창 무너졌다. 스테이 홈 (Stay home)을 내내 지켜야만 하는 요즘 같은 시국에, 다른 주에서 매사추세츠 주까지 산후조리사 분을 모셔온다는 건 누가 봐도 상당히 위험한 일. 삼칠일까지의 산후관리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한들, 친정부모님 시부모님조차 미국 입국이 어려우신 상황에서 외부인 누군가를 우리 집 안에 모신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모험이었다.


길거리 대부분의 상점과 식당이 문을 닫고 있는 요즘 같은 상황, 한마디로 경제활동 전반이 얼음처럼 '가만히' 멈춰버린 이 시점.  산후조리사 이모님, 마사지 전문가뿐만 아니라 간단한 집안 청소와 빨래와 같은 일을 도와줄 분을 모시는 것도 쉽지 않았다. 구인하는 사람뿐 아니라 구직하는 사람 역시 각자의 집에서 self-quarantine 하는 경우가 대다수일 테니, 모든 욕심을 내려놓는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 초절정 시국, 이곳 대통령조차 very very painful 2 week라고 표현한 딱 이지점 아니던가. 산후조리는 '초호화'스러운 단어에 불과했을 뿐. 일단 집에 머물며 부부 단둘이 스스로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다. 조리원도, 조리사 이모님도, 마사지 전문가도, 친정 찬스도 없었다. 심지어 열이면 아홉은 절대 하지 말라고 말린다는 '시댁 조리 찬스'조차 써볼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그저 우리 셋, 우리만의 공간에 자리하고 있을 뿐. 남편과 나, 그리고 태어난 지 보름남짓의 아기.

내 몸, 내 마음만 생각하면서 꿀잠 자고 싶은 날들


바이러스에 대한 예민함이 가라앉고 서로가 사회적 거리를 두지 않아도 밝게 웃으면서 서로에게 How are you 인사를 경계 없이 건넬 수 있는 그런 날. 그런 날쯤이 되면 지금 같은 몸과 마음의 고단함은 가뿐히 증발시킬 수 있을 만큼, 내게도 여유가 생겨있을까. 아기도 그런 우리의 여유를 느끼며 좀 더 편안한 표정을 하고 집 안 이곳저곳을 활보하고 있을까. 조리원 천국을 누리지 못해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 제대로 산후조리를 못한다는 생각에 가슴 곳곳에 멍이 든 것만 같은 욱신거리는 기분, 그때쯤엔 그 보이지 않는 통증이 조금은 가라앉아있을까.



조리원 천국은 포기한 지 오래. 집에서 온라인으로 대학원 강의 듣기.


내게 오늘도 '조동'은 없다. 그저 남편과의 '동지애'만 켜켜이 쌓아가고 있을 뿐. 그 애환과 애정이 먼 훗날, 서로를 더 아끼는 버팀목, 지지대가 되어주기를 바라보는 오늘 16일 차. 그럴 수 있겠지? 애가 끊기고 애만 끓이는 사이가 되어 애타는 마음만을 이고 지고 가는 내일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조리원에서 제공되는 영양간식만큼, 바람직하진 않을지라도... 매일 최선을 다해 이어가는 우리 부부의 소박한 산후조리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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