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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May 28. 2023

우리 모두 '출구전략'이 필요해

거북맘 프렌들리 존 (1화)

5...4...3..2. 1......!


8시 59분 무렵부터 어림짐작으로 60에서부터 숫자를 거꾸로 세며 초재기에 들어간다. 흡사 18년 전으로 돌아가 대학교 수강신청이라도 하는 느낌이랄까. 아침부터 아이들의 등원 전쟁을 치르면서도 최근 핸드폰 화면을 껐다 켰다 반복하며 초조해하는 이 광경. 꼭두새벽부터 아이돌 콘서트 피케팅을 하는 것도 아닐진대 오전 9시 땡 하면 광클릭, 아니 광터치를 해서 내 자리를 '획득'해야만 하는 이 행위는, 다름 아닌 아픈 아들딸의 소아과 대기를 위한 것. 요즘은 <똑닥>과 같이 현장에 있지 않아도 핸드폰 앱을 통해 병원 접수대기를 걸 수 있는 매우 똑똑한 세상일지어다. 일단 집에서 접수하고 대략 내 진료순서가 올 시간을 계산한 뒤 병원을 향해 유유히 걸어가면 되는 것.


네? 접수대기 33번이라고요?

도대체 난 왜 안 되는 걸까. 인터넷 속도가 더 짱짱한 통신사로 갈아타야 하는 걸까. 분명히 9시 정각이라고 휴대전화가 알려주자마자 망설일 것도 없이 단골 소아과의 접수대기 창을 푹푹 눌러댔는데, 대기 10번 내에 들기는커녕... 정말 어이없게도 대기 30번을 훌쩍 넘겨버린 것. 제대로 망했다. 그 누구를 탓할쏘냐. 설상가상, 대기번호는 30번대를 넘겨 받았는데, 당연히 10번 대 안쪽을 받을 거라고 믿고 있던 나는 아이를 데리고 이미 소아과 현장에 와 버린 게 함정이었다. 아이 1명당 2분 정도 진료한다고 계산해도 족히 60분은 기다려야 하는 상황. 이걸 어쩐담... 9시 5분 무렵, 나는 혀를 깨물어가며 치밀하게 고민하고 망설였다.


 이걸 기다려? 말아?
혹시 모르니
일단 가지 말고 있어 봐?"


이게 뭐라고. 숨막히는 고민 끝에 '기다린다'는 데 한 표를 던졌다. 혹시 나보다 앞번호인 사람이 살짝 늦는다면 간호사님이 그 틈새시간에 먼저 우리 애 진료를 넣어주실지도 모른다는 데 희망을 걸었다. 워낙 단골 소아과가 되어놓으니 기회만 닿으면 간호사님들이 먼저 편의를 봐주실 거라고 1차 믿음. 대기가 많으니까 의사 선생님도 진료를 평소보다 더 신속하게 진행하실 거라는 2차 믿음. 하지만 이러한 믿음을 고수하기에는... 봐도 봐도 사람이 너무 많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보다 대기번호가 한참 앞인데도 시간이 안 될 것 같다고 먼저 자리를 뜬다. 그제야 또다시 몸이 배배 꼬여온다. 시계를 보니 대기접수를 건지 18분쯤이 지난 시점... '갈 거면 진작에 갔어야지', 15분 남짓 기다린 것도 억울해서 돌아서기가 아까운 것만 같다. 자꾸 같은 질문이 떠오르는 상황, '그래도 지금이라도 갈까.' 소아과 의자에 안방마냥 앉아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첫째는 엄마가 그러거나 말거나 판단을 내려주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기다려.


시계는 똑딱똑딱, 좀 더 버텨볼까, 지금이라도 자리를 뜰까 말까? 인생은 탈출 vs 잔류 사이, 양극을 오고가는 치열한 고민게임


그리하여 과연 언제 진료를 받았냐고? 접수대기를 걸고난 뒤로부터 자그마치 1시간 18분 뒤. 이야, 정말... 와... 진료를 받고도 억울하고 분해서 괜히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갈까 말까'를 가장 열정적으로 계산하고 있던 때로부터도 60분이 더 흘러버린 거다. 18분 지났을 때라도 '진료 포기하고 갈 걸'! 결단 내리지 못한 나는 어영부영하다 오전시간의 절반을 통째로 날렸다.오전시간 진료대기가 한없이 늦어질 것 같았다면 간단히 오후에 아이 하원시키고 천천히 와도 되었을 것을... 무슨 아쉬움에서였는지 '미련하게 버텼다'. 슬슬 기다리는 데 지쳐갈 때쯤엔 지금까지 기다린 게 아까워서 또 버텼다. 내 스스로 판단력이 흐려졌다면서 가슴을 두드렸던 날. 떠나야 했을 타이밍을 놓친 날.



아닌 걸 알았다면
 아까워도 떠나야 한다
아닌 걸 알았다면
 괜스레 버틸 이유가 없다


기다림이 유독 억울했던 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떠나는 게 낫겠다'고 부지런히 판단 내리지 못했던 날, 소아과를 나서면서 온갖 짜증과 후회를 담아 무겁게 운전대를 잡았다가, 문득 하나의 생각에 이르러 '피식' 웃고 말았다. 우리 인생 수많은 순간들이 "좀 더 버틸까? 말까"와 맞닿아 있지 싶어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온 거다. 야심 차게 투자를 하던 사람이 기대했던 바와 다른 자산 흐름을 만난다면 '지금 빠져나올까, 말까'를 고민할 테다. 초창기 승승장구하던 사업가가 IMF든, 팬데믹이든, 예기치 못한 변수를 만나 수렁에 빠지면 '지금이라도 관둘까, 조금 더 희망을 걸어볼까, 이미 여기까지 온 것도 아까운데 일단 있어봐?' 비슷한 고민을 반복하겠지.


아이들의 발달과 맞물린 수많은 치료들을 엄선할 때도 마찬가지 아닐까. 소위 '느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는 내 아이와 쏙 맞는 발달지원센터와 치료사를 물색하고 적합한 치료방법을 택하는 게 제1의 과제일진대, 일단 어떤 노선에 들어서고 나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 이상의 합을 기대할 수 있는 센터나 치료사를 못 만날까봐 우려가 앞선다. 괜스레 현 치료상황에서 '탈출'했다가 '그냥 현 치료라도 유지할 걸...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나?' 싶은 마음이 들까봐서, 아무래도 썩 괜찮은 대안을 만나지 못할까봐 걱정되는 탓이 가장 클 것 같다.


우리 모두에겐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그만두고 빠져나오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 아이 소아과에서 무한정 기다리다가 얻은 평범하면서도 귀한 진리. 우리 아이의 컨디션과 내 하루 스케줄과 뭔가 조금이라도 아귀가 안 맞는다 느낌이 왔다면 소아과 문을 박차고 나왔어야 했다. 더 괜찮은 대안은 꼭 나타나기 마련이므로. 이따 오후 마감시간에 맞춰 앱 예약을 다시 걸었다면 두 번 걸음해야하는 번거로움은 감수했겠지만, 기다림에 대한 짜증초조는 덜했을 거다. 아이가 낮에 먹을 약이 떨어져서 대기를 포기하지 못했던 것도 있었지만, 오후 복용약을 살짝 늦게 먹었다고 큰 이슈는 없었을 것 같다. 새로운 발달센터를 옮기느라 며칠 치료 공백이 생기더라도 내 아이에게 조금 더 맞는 치료실에 가는 게 지혜로운 것처럼. 버티지 말고 과감히 빠져나올걸. 왜 나는 그날따라 '출구'로 향해 나가는 것에 둔감했을까.


현재 내 아이를 위한 치료가 됐든, 약이 됐든, 내 아이의 정서와 기분, 세세한 습관과 스타일에 조금이라도 반하는 바가 있다면 용기 내서 '빠져나왔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권유로 시작한 놀이치료, 혹은 언어치료, 그 어떤 한 가지에만 몰두하기보다 시선을 좌로 우로 돌려보기를 권한다. (아이를 위한 센터는 단 한 곳만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치료사는 많고, 대기는 금방이다) "적어도 1년은 해봐야 효과가 있는지 알겠지?"라는 마음으로 버티고 견디다 보면 소아과의 기다긴 대기 상황과 비슷한 결과를 맞닦드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 그때 빠져나왔어야 했어, 아니다 싶을 때 버티지 말 걸 그랬어." 유사한 한풀이를 하는 동안 느린 아이의 더딘 걸음에 더욱 속상하고 아쉬워질 수도 있는 거니까. 느린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는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기다리고 버티다가 계절을 훌쩍 넘겨버리고 말지 않기를! 필요한 시점 적확한 선택을 위해 박차고 일아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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