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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Jun 29. 2019

'민트초코칩' 말고 다른 맛

[아나운서 그만두고 34가지 일상기록 - 14] 아이스크림 덕후의 맛도전

"알잖아. 난 민트초코칩!"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늘 같은 다섯 글자를 외친다. 자칭타칭 아이스크림 '덕후'. 밥은 안 먹어도 아이스크림은 챙겨 먹어야 하는 참 신기한 식성을 소유한 자. <뉴스데스크> 생방송이 끝나고 나면 집에오는 길에는 아이스크림을 살살 녹여내며 귀가할 때가 꽤 잦았다. 한 입 베어물 때마다 딱딱해져있던 긴장감과 스트레스마저 크림 녹아내리듯 살살 풀어지는 것 같아서 나만의 힐링법으로 애용했던 간식. 애주가들이 회식자리에서 술잔을 부딪치며 몸과 마음의 독소를 더 독한기운에 담아 휘휘 저어냈듯이 내게 아이스크림이라는 아이는 그와 유사한 역할을 해내곤 했다. 먹을수록 너란 맛에 취하는 것만 같잖아. 중독성 최강, 달콤 아삭의 조합. 칼로리조절에 민감하지만 이것만큼은 너그러이 봐주는 편. 어디에서 나온 논리인 지 모르겠으나 "아이스크림 진짜 살 안쪄"라고 중얼중얼거리며 오늘도 한 입 베어물어 보는 것. 자, 그럼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당신은 어떤 메뉴에 한표를 던지겠는가. 아, 참고로 말하건대 나한텐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겠다. 어제도 오늘도 나는 그저 '민트초코칩.'

아이스크림 가게에 갈 때마다 '민트초코칩' 먼저. 다른 맛을 고르기도 전에 늘 마음에 두는 지라 밑에 저렇게나 수북히 깔려서는 주인의 식욕을 채워주려 기다리고 있는 중.


늘 같은 메뉴를 고른다. 꼬꼬마 시절, 서른 한 가지의 맛을 고를 수 있다는 광고에 무수히도 현혹되었었으나 그럼 뭐하나 나는 결국 같은 맛을 고르고마는 것을. 맛이 다양하게 있으니 갈 때마다 다른 맛을 먹어봐야할 것 같은 괜한 의무감에 시달린 적도 있었다. "어제는 이 맛 먹었으니 그래도 오늘은 딴 거 먹어보자." 결국 의미없는 시도였던 것으로 자체 판명. 그냥 초코칩을 고르자니 조금 심심했고, 아몬드봉봉은 너무 단맛이 찐해서 먹고 나면 정말 세포 하나하나가 달게 물드는 느낌이었다. (이거나 저거나 사실 칼로리는 다 비슷할텐데 말이지) 월넛은 엄마가 좋아하는 맛이니 막연히 '어른의 맛'이라고 생각해 건들지 않았고 요거트...는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이거먹을 거면 차라리 그 시절의 아이스베리나 레드망고를 가는 게 나았지! 라고 생각해 피했다. 사랑에 빠진 딸기? 나쁘지 않아. 슈팅스타? 식감이 재미있지만 색깔이 안끌려. 초코나무숲? 먹어보고는 싶지만 오늘은 글쎄! 결국 고민의 숲을 돌고돌아 안착하는 건 늘 언제나 그랬듯이, 민트초코칩. 가장 안전한 선택지를 고른다. 적어도 이걸 고르면 후회는 하지 않을 거니까.


마트에서 파는 막대형 아이스크림도 망설일 필요 없이 '민트초코칩'
그 어느날의 젤라또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도 나는 결국에 민트초코칩. 민트빛은 흐릿하지만 그래도 넌 '민트초코칩'


서른 한 가지 맛에서 결국 '민트초코칩'을 고르는 데 익숙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나만 고집스러운 건가 싶어 주변을 돌아보면 너도 나도 비슷한 선택을 하고 있더라. 고집을 이어가는 세월과 그 강도에 살짝살짝 차이가 있을 뿐. "이거 새로나온 거야. 프로모션이라서 별도 몇 개 더 준대" 아무리 유혹하면 무엇하나. 남편은 늘 그랬듯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란데를 고른다. "엄마, 오늘은 이 맛 먹어봐. 이거 새로나온 거래" 나는 민트초코칩 고를 거면서 괜한 궁금함에 곁에 있는 사람이라도 골라보라고 쿡쿡 찔러보다니!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도 새로운 결단을 내려보라고 유혹해보는 소소한 시도는 실패를 맞이한다. 엄마도 언제나와 똑같이 월넛 맛을 골라내시므로. 지난달까지 옆자리에서 같은 수업을 들었던 M친구, 아침마다 Peets Coffee에 들러 차이라떼 가장 큰 사이즈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었고 또다른 N친구, 수업에 늦더라도 꼭 얼음가득담긴 아이스커피를 Starbucks에 들러 총총걸음하며 데려왔다. 매일 같은 사이즈, 같은 메뉴의 음료의 행렬. 누군가는 "그거 질리지도 않냐"고 물음표를 품을 수도 있겠는데 그래도 '안전한 선택'을 하고야마는 내 마음과도 닮아있어서 좀 반갑더라.

메뉴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렇게나 선택지가 많은데 반복적으로 늘 같은 맛을 고르는 데 익숙한 나날들.


'민트초코칩'만 고르는 삶은 괜찮은 걸까. 안전하고 익숙한 선택만 하다보면 왠지 내가 '민트초코칩'이라는 같은 영역만 맴맴돌다가 영영 그 자리에 묻혀버릴 것만 같아서 불안할 때가 있다. 풍부하고 역동적으로 내 하루를 꾸려가려면 최애 맛이 있더라도 꾸준히 내 선택지를 바꿔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민트초코칩을 애정하더라도 하루는 '엄마는외계인'이라는 세계도 체험해주고, 또 하루는 '이상한나라의솜사탕' 맛도 골라봐주며 내 입맛의 경험치를 늘려줘야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조바심이 난다. 그래도 어쩌나.  '체리쥬빌레'를 먹으면 똑같이 칼로리를 채워도 왠지 모르게 민트향이 아닌 것으로 들어찬 오늘의 내 향기가 하루종일 불편할 것만 같다. '그린티'를 먹으면 몸도 마음도 초록초록해지는 기분, 뭐 이거 나쁘진 않지만 왠지 오늘의 내가 '내 모습'이 아닌 느낌이라서 결국엔 '민트초코칩' 한번 더 먹을 것 같다. 그래서 결국엔 이도저도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아 또 한번의 같은 맛을 택하고야 마는 나라는 여자. 안전한 선택, 맛을 모험하지 않는 것으로 하루를 살아낸다.


아나운서 시절, 방송하던 패턴도 어쩌면 '민트초코칩'만 골라냈던 일상과 닮아있었네. 메인 뉴스 하나 + 라디오 음악FM 프로그램, 두 가지 스쿱을 탁탁 얹어내고 깔끔하게 마무리 되는 일상이 늘 편안했다. 같은 사이즈에 두 가지 맛만 먹는 하루여야 완벽한 메뉴 조합이라고 생각했던 날들. 종종 특집 프로그램이나 외부 행사 진행을 맡아해야할 기회가 찾아오지만 (임무를 완수해내는 능력과 별도로) 그리 즐겨서 나서하지는 못했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아이스크림 조합에 원하지 않던 토핑이 괜히 얹혀지면 아무리 공짜 토핑이라고 해도 짜증스러울 때가 있지 않던가. 공짜로 1스쿱의 맛이 더해지고 오레오 쿠키 가루나 씨리얼, 프레즐 같은 장식이 더해지면 SNS 자랑용 사진이야 듬뿍 찍히겠으나 내가 원했던 간결한 맛의 궁합은 아니어서 거추장스럽다. 칼로리만 더하고 살만 찌울 뿐이라고 생각했다. 기회가 와도 늘 시큰둥하게 '해야하니까 한다'는 내색으로 꾸역꾸역하다보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이후론 잦게 기회가 찾아오지 않더라. 아이스크림도 늘 같은 맛만 고르는데 안전한 맛을 고르는 데 익숙한 성격이 일에서라고 변주를 꾀했을 리 없다. 그렇게 나의 하루는 '민트초코칩'을 골라내는 손길과 닮게 마무리 되어가곤 했다.


퀸시마켓에서 골랐던 icecream fruit basket.  한 스쿱을 먹더라도 딱 원해왔던 그 맛을 골라내고 싶어서 난 이렇게나 매일 안달복달.


맛을 선택하는 건 그 누가 뭐라해도 결국 '자기 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안전한 선택지로 내 마음을 돌려세워도 되는 거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다른 시도를 해야할 것 같은데... 색다른 무언가를 자꾸 맛봐야 할 것 같은데...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내 눈은 자꾸 '안전한' 선택지로 향하고마니 이걸 어쩐담. 늘 골라왔던 것을 고르면 적어도 후회하지 않을 걸 아니까. 하지만 이러다가 자꾸만 또 다른 맛을 골라내는 시도에 게을러져서 아예 다른 맛이 존재한다는 사실마저 완전히 잊게되는 건 아닐지. 같은 맛밖에 모른 채 같은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져 버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닐지. 나 이러다가 아예 민트초코칩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남편과 자주 찾는 Richardson's Icecream. 눈 가득하던 겨울날에도 요즘 같은 여름날에도 발도장 쾅쾅. 목장의 신선한 우유맛이 진하게 곁들여지니 그야말로 힐링의 맛.


금요일 오후, 남편과 찾은 아이스크림 맛집. 같은 질문을 또 한번 머리에 떠올렸다. '같은 맛을 늘 골라도 괜찮은 걸까.' 아이스크림 메뉴판 앞에 서서 정말이지 한 10분은 고민고민했다. "이보세요. 이건 논문 주제 고민하는 게 아니거든요." 남편의 표정은 나보다 더 진지하다. 언제나 그렇듯, '민트초코칩'은 가장 안전한 선택일 걸 알고있다. 그러니 일단 마음 속에 한 가지 맛 저장. 하지만 늘 먹던 맛을 고르자니 이 가게, 새로운 맛이 너무나 많아서 욕심난다. 저기 저 사람이 받아가는 초콜릿 듬뿍담긴 저 맛도 맛있겠고, 어머 저건 뭐야. 전에 못 봤던 색깔로 요란하게 장식된 보기만 해도 새콤달콤한 맛이 느껴지는 저 맛도 탐난다. 새로운 걸 시도했다가 "아 그냥 먹던 걸 먹을 걸" 후회할 모습이 먼저 보이는 것 같아서 짐짓 망설인다. 먹던 걸 먹을 것인가, 안한 걸 해볼 것인가. 안전한 선택을 고집할 것인가. 다채로운 맛 속으로 나를 집어넣을 것인가. 후회할 수도 있을 새로운 선택지를 거머쥘 것인가. 결국엔 하던 선택이 나은 거라고 또 한번 결론짓게 될 것인가.



모두가 닮은 고민을 하고 있는 거겠지.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나는 과연 오늘 어떤 맛을 택할 것인가"


익숙한 맛을 고를 것인가. 혹은 경험해보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맛을 고를 것인가.


결국, 나 완전히 제대로 '새로운 선택'을 하진 못했다. 34년간 안 먹어본 그 무언가를 선택하는 대신 원래 가지고 있던 취향을 살짝 변형하는 쪽을 택했다. 민트초코칩에서 민트를 덜어낸 '초코칩'을 택했고 무지방이라고 강조돼 있는 블랙라즈베리, 핑크핑크하니 색깔이 내 취향이라 골랐다. '민트초코칩'이라는 완벽한 최애는 아니되, 비슷한 맛을 고르고 여기에 가장 좋아하는 색깔을 더해낸 것. 그야말로 소심하고도 소심한 변형 주문법이라고나 할까. 늘 같은 맛을 고르는 내가 답답하긴 하니 바꾸기는 해야하겠고 그렇다고 모험의 맛을 골라내기엔 자신이 없다. 이렇게나마 아주 살짝 비틀어서 주문해보는 거지 뭐.


색깔이 분홍분홍 내 취향이라서 고른 도전의 한 스쿱. 블랙라즈베리. 새로운 맛에 애정하는 색깔을 뒤범벅.

 


초코칩 한 스쿱에 블랙라즈베리 한 스쿱. 최고로 애정하는 맛과 이름이 닮았으니 맛은 비교적 안전했다. 좋아라 하는 빛깔과 어우러지니 더욱이 만족스러웠다. 꽤나 괜찮은 시도였다고 자평한다. "오늘만큼은 '맛'이라도 안주하지 않았어"라는 생각에 한 발짝 나아간 느낌이었고 그리하여 좀 더 나은 하루를 살아낸 것 같다고 아이스크림림 안의 초코칩을 오독오독 씹는 내내 생각했다. 아이스크림 맛 고르기. 이토록 사소한 선택 하나로부터 인생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한 영감을 얻고말다니, 역시 나는 '아이스크림 형' 인간임에 틀림없다. 덕후의 자세란 이런 것이지. 편안한 맛을 향해 가되, 때로는 아주 조금이라도 비틀어보기. 완전히 신세계인 맛을 골라내지 않더라도 익숙한 맛에 하나는 덜어내고 또 한 가지는 더해보기. 여전히 '민트초코칩' 만 고르고 싶은 날들도 물론 또한번 나타나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만은 다른 맛을 늘 꿈꾸고 상상해보기.


'민트초코칩'을 고르지 않은 날, 그날 오후의 햇살도 꽤나 괜찮았음을.
알아요. 물론 다시 우리의 디폴트 값을 치르러 또 다시 방문하겠지요
Richardson's Daires. 목장과 바로 맞닿아있는 아이스크림 가게. 메뉴도 다양하고 사이즈도 정말 다양해서 꿈의 공간. 기분탓일지, 목장 아이스크림은 좀 더 신선한 맛.
금요일 저녁, 이렇게나 많은 가족들이 아이스크림을 냠냠. 다들 어떤맛을 애정하고 선택하며 오늘을 살아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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