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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석재 Jun 15. 2019

'다이나마이트' 수녀님에 대한 추억

(나의 책 이야기 1)

1

 

1987년은 나의 대학 3학년 시절이었고 호헌철폐와 독재 타도의 구호가 한여름의 대한민국을 쩌렁쩌렁 울렸던 민주항쟁의 시기였고 내가 주일학교 교사로 일했던 잠실성당에서는 깊은 눈이 청년 예수를 꼭 빼닮은 보좌신부님 한 분과 얼굴빛은 해사하지만 엄청난 에너지의 소유자였던 수녀님 한 분이 새로 부임하셨던 때였다. 그해 성당에서 나는 주일학교의 교감으로 일했다. 가르치는 아이들과 우리 주일학교 교사들의 나이 차이는 적으면 두세 살, 많으면 일고여덟 살 정도인데 우리들은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려졌다. 처음 주일학교 교사를 시작할 때는 이런 점이 어색했으나 어쩌랴 제도가 그러한 것을. 사실 대학 3,4학년 때 교감 선생님이라니 이건 더욱 생뚱맞긴 했다. 물론 이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들을 향해 형이나 오빠, 누나 혹은 선배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이것도 관행이었다.

2월이었다. 그전 신부님에 대한 실망이 컸던지라 새로운 신부님에 대한 기대가 성당 안의 공기를 가득 채운 어느 날, 새 신부님이 처음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인사를 하러 갔다. 신부님은 천부인 3개나 3,000명의 무리가 아닌 3,000권의 책과 함께 오셨다. 뭐 도와드릴 일 없나요? 여쭙는 나에게 신부님은 책은 이미 며칠 전에 먼저 도착해서 정리가 거의 다 되었다는 답변을 주셨다. 한 달 쯤 뒤에 신부님으로부터 초청되어 사제관에 들어갔더니 세 면 정도의 벽 책장에 책이 빽빽하게 가득 차 있었는데 벽면 인테리어를 따로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책장 이외에도 발길 닿는 곳곳마다 책들이 몇 권씩 쌓여 있었다. 침실에, 응접실 탁자에 책이 놓여 있었고 심지어 화장실 선반에도 책이 펼쳐진 채로 거꾸로 엎어져 있거나 혹은 접힌 채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방안 구석진 곳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유화 몇 점이 있었는데 창문 틈을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그것을 비추고 있었다. 

신부님은 평소의 회의 때나 미사 집전하실 때 신자들을 자주 웃게 해주셨다. 마치 웃음 치료자처럼 당신이 먼저 늘 웃으시며 우리들의 분위기를 환하게 만들어 주셨다. 소탈하고 따뜻한 신부님은 이런 점에서 사제들 가운데서도 거의 군계일학이라 할 정도였다. 청년들이나 중고등학생들과 자주 어울리셨고 모임 할 곳이 마땅치 않은 단체들에게는 기꺼이 당신의 사제관을 빌려주시기도 하였다. 신자들은 시나브로 신부님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마치 팬클럽 회원의 분위기를 연출하곤 했다. 한번은 미사 강론하실 때 부임 첫날 꿈에 내가 나왔다고 전격적으로 공개를 하셔서 이후 나 역시 아주 잠시지만 스타덤에 오른 적도 있었다. 그렇게 신부님의 존재감은 내 삶 속에서도 조금씩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고 나는 존경할 만한 신부님이 지척에 있다는 사실로 자부심을 갖곤 했다. 

신부님과 가까워지면서 당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정보를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신부님은 젊은 날 자신의 심리 문제로 고생을 많이 했고 그것들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으로 독서 활동을 열심히 했다고 한다. (실제 신부님의 책 중에는 심리학 관련 책들이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림 그리기에 대한 심취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소탈하고 푸근한 웃음 뒤에 그분의 아픈 과거가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수녀님 이야기. 수녀님은 합리적이었고 자신과 타인의 게으름이나 불합리에 대해서 늘 질타를 아끼지 않던 분이었다. 당시 우리들은 수녀님에 대해서 매우 정의로운 분이라고 자주 얘기하곤 했다. 수녀님은 책임감 없이 활동하는 청년들을 가만 놔두지 않으셨고 그럴 때마다 그 친구들은 수녀님한테 불려갔다 나오곤 했다. 수녀원을 나오면서 눈물을 보이는 후배들도 있었다. 나 역시 한 단체의 책임자로서 수녀님의 ‘매운 계절의 채찍’과도 같은 꾸중과 질타에 가끔 직면하기도 했다. 이 분은 우리들의 지도수녀님이라 안 만날 방도는 없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수녀님을 만나면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가소서.’의 심정으로 주눅들어 지냈던 기억이 있다. 신부님이 ‘다미아나’라는 수녀님의 세례명을 ‘다이나마이트’라고 해학적으로 표현했을 때 오죽하면 우리들이 마음 속에서 환호성을 질러대고 힐링이 된다고 생각했을까.

실제로 수녀님은 정의로운 당신의 생각을 실천하는 분이었고 하루 4시간의 수면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 동안 기도생활 충실히 하고 성당 일을 에너자이저처럼 혹은 다이나마이트처럼 처리하곤 하셨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 동료들이 이 정도까지는 수녀님을 겪었거나 알고 있는데 나에게는 정의롭고 에너지 넘치는 수녀님의 모습을 보고 감동까지 하게 된 또 다른 기회가 있었다. 평생 잊을 수 없고 나에게 진정한 부끄러움을 알게 해 준 장면은 수녀님을 처음 만나고 나서 1년 뒤인 1988년에 확인하게 된다.   

 

2

 

학생들과의 만남이 이어지면서 나는 학급문고 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도 그랬고 제도교육 현장의 정교사로 임용된 이후에도 그랬다. 도서관이 활성화되는 게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 중간 단계로 학급 문고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사실 학급문고는 그 자체로 훌륭한 책읽기 문화인 것이다. 

교실에 3단 정도의 책장을 마련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서 학생들이 읽기에 무난한 책을 꽂아둔다. 교실에서 수업 시간에 읽어도 되고 빌려가서 읽고 오게도 한다. 이 활동이 활발해지면 아이들한테도 한 학기나 1년간 책을 기증받아 대출 가능도서의 목록을 추린다. 일이 커지면 대출, 반납 업무를 나 혼자 장기적으로 할 수는 없으니까 학생들 중 한 명 혹은 두 명을 도서위원으로 위촉하고 관련 업무를 맡긴다. (때로는 학년초부터 학급문고에 대한 이야기를 아이들과 공유한 뒤 1인 1역할 맡기의 일환으로 관련 업무를 나누기도 한다.) 최근에는 해를 거듭할수록 독서문화가 쇠퇴하거나 학급문고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책을 읽고 할 수 있는 학습활동은 매우 많다. 지난 날 한 선배 교사가 교육과정 운용이 자유로워진다면 장편소설 한 편을 한 학기 동안에 가르칠 수 있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물론 최근 그런 시절이 앞당겨질 수 있는 징후가 많이 보이기는 한다.  

예전에 대학 캠퍼스 안에서 축제나 어떤 계기가 있을 때 학생회 차원에서 출판사에 요청해 인문사회과학 도서나 교양 도서를 도매가격으로 싸게 받아와서 다른 학생들에게도 저렴하게 판매하는 도서전을 자주 열었다. 도서 보급이나 독서 문화 개선에 일조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행사일 것이다. 최근에도 그런 문화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상당 부분 쇠퇴하지 않았을까 짐작을 해본다. 예전 성당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이러한 행사를 세 차례 정도 진행해 보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호기심을 갖고 호응했고 간혹 학부모까지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우리들은 1988년 성탄절을 맞이하여 특별 도서전을 열기로 의견을 모았다. 당시 푸른나무, 사계절, 동녘 출판사 등에서 청소년 대상의 책들이 많이 출판되었다. 이 시기는 뜻있는 교사들이 교단 수기를 비롯하여 교양서적을 많이 발간하던 때였다. 뿐만 아니라 교사들 못지않게 학생들도 참교육에 대한 열망이 매우 강하여 청소년들의 글을 묶어 책으로 만들어낸 경우도 꽤나 많았다. 

성탄절을 한 달 앞두고 출판사와 연락을 했다. 그리고 성탄절을 닷새 정도 남기고 동료교사와 학생회 학생들과 함께 출판사에서 책을 가져왔다. 차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으므로 우리들은 출판사에 가서 한 사람당 20권 혹은 30권씩 책을 묶어 낑낑거리며 전철을 타고 왔다. 책의 가격은 출판사별로 정가의 70%나 75%에 받아오곤 했다. 그게 도매 가격이었다. 이를테면 5,000원짜리 책이라면 70%일 경우 3,500원이 되었고 75%라면 3,750원인 것이다. 그렇게 책을 가져와서 애초부터 이윤을 남기려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냥 3,500원 혹은 3,750원에 현장 판매를 하는 것이다. 나중에 행사가 끝나면 도서 판매액과 남은 책을 들고 출판사에 가면 모든 일은 끝나는 것이었다.

그때 판매한 책들 중 다음의 책들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푸른나무 출판사의 거꾸로 읽는 책 시리즈 몇 권이 있었다. 김진경의 <스스로를 비둘기라고 믿는 까치에게>, 여러 명사들의 성장 관련 글 모음인 <아픔을 먹고 자라는 나무>,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그것이다. 동녘 출판사에서 나온 <아이들이 어른을 가르치는 글>은 청소년들의 글모음집이다. 친구출판사에서 나온 이상석의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는 교사로서 겪는 교육현장의 아픔과 보람이 이야기 형식으로 쓰여 있다. 공동체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에게>는 해직교사들의 못다 한 수업 이야기이다. 기억에서는 많이 지워졌지만 위의 책들을 포함하여 한 20여종의 책을 가져와 판매한 것 같다. 

성탄절 즈음한 일요일, 성당 앞마당에 판매대를 차려놓고 책을 깔아놓았다. 오전 학생 미사가 끝난 후 책 판매가 시작되었다. 전에도 같은 행사를 한번 해본 적 있고 할인판매의 힘이 작용한 덕분에 판매대 앞은 인산인해였다. 책이 잘 팔리다 보니 이 판매활동을 돕고 있는 학생회 아이들은 신이 나서 돈을 받고 책을 골라주고 거스름돈을 내주었다. 한 아이가 내게 다가와 한 마디 했다. 선생님 오늘 금세 끝날 것 같아요. 나는 웃으며 미루어 두었던 볼일을 보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단이 벌어진 건 그 직후였다.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양복을 잘 갖춰 입은 중년의 아저씨가 아이들에게 수표를 주고 아이들 서너 명이 싸인펜을 들고 책 표지 바로 다음에 나오는 빈 공간에 뭔가를 적는 것이었다.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았다. <용기를 잃지 말고 살아가세요. 국회의원 ◯◯◯> 대부분의 아이들이 이 예상치 못한 뜻밖의 장면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일이 일찍 끝났다고 좋아하기도 했다. 나는 짧은 시간 동안에 벌어진 이 사태에 대해 상황 파악도 안된 채 우리들이 출판사에서 가져온 수백권의 책이 그 국회의원의 이름으로 물들고 있는 것을 멍하게 혹은 망연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국회의원은 불우이웃돕기에 쓰라고 한 마디 하고 성당 마당에서 유유히 퇴장했다.

이러한 수런거림 속으로 ‘다이나마이트’ 수녀님이 등장하신다. 수녀님은 몇 아이로부터 잠시 전의 상황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도대체 일을 이렇게밖에 못하냐고 그리고 도서전의 취지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우리가 국회의원 이름 알리려고 이런 일을 시작했냐고 화를 내셨다. 나도 고개를 숙이고 수녀님의 꾸지람을 듣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수녀님은 곧 냉정함을 찾고 가장 명쾌한 방법으로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성당 사무실에서 가위를 몇 개 가져오라고 하셨고 아이들에게 그 국회의원의 이름이 적힌 책장을 아예 통째로 오리도록 지시했다. 이 종이 없애고 판매하세요. 혹시 책이 훼손되었다고 해서 안 팔리는 책이 있으면 출판사에 지불할 책값은 내가 마련할게요. 결과적으로 그 국회의원의 이름이 적힌 책들은 한권도 판매하지 않게 되었다. 이 사태를 지켜본 일부의 학생들과 학생회 간부들이 책장이 뜯긴 책을 사갔고 나머지 팔리지 않은 책들에 대해서는 며칠 뒤 책값만 출판사로 들고 갔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한 달 동안 야심차게 준비한 도서전은 허망하게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의 장면,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다. 왜 그 상황을 멈추지 못하고 국회의원에게 책값을 돌려주지 못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그날의 일을 계속 곱씹었는데, 이 사건을 통해 내가 배운 게 없지는 않았다. 그것은 부조리와 타협하지 않는 수녀님의 용기와 과감성이었다. 그리고 정의에 대한 감각이었다. 특히 그 국회의원은 성당 내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람이었다고 하던데. 사실 그 당시에는 수녀님의 과단성 있는 행동이 모두 이해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때 일을 생각할 때 수녀님이 없었다면 이 일에 대한 우리들의 무너진 자부심은 평생을 통해 지워지지 않는 돌이킬 수 없는 안타까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계속 든다. 결국 그날은 참으로 커다란 부끄러움을 느낀 날이 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수녀님을 통해 우리들의 구겨진 자존심을 간신히 건져올린 감동적인 시간으로 남게 되었다.

 

3

 

사람은 오래 지켜보고 만나야 한다. 수녀님과 함께 지낸 시간이 거듭되면서 더이상 수녀님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 그분은 따뜻하고 다정했으며 인정이 많은 분이었다. 한번은 나태하고 일처리가 부적절하다고 또 꾸지람을 듣던 중에 입 속에서 달그락거렸던 속 얘기를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집안의 경제적인 사정이 매우 안 좋은데 학교 공부와 성당 일과 아르바이트를 동시에 진행하면서 일상 속에서 놓치고 있는 일이 많아졌고 특히 성당 일에 대해서는 부실한 적이 많았음을 저도 반성하고 있어요. 내 어려웠던 일상을 담담하게 말씀드린 것이다. 수녀님은 알았다고 그리고 가보라고 하셨다. 

그 후로는 나를 바라보는 수녀님의 표정이 매우 밝아지셨다. 그리고 한 달 뒤에 나를 보자고 하시더니 그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해 주셨다. 미안해하지 말고 받으세요. 고마움은 나중에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한 분께 갚으세요. 이런 말씀을 하신 뒤 며칠이 지나서 나를 서점으로 데리고 가서 필요한 책을 고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날 두툼한 책을 10권도 넘게 받아 안고 집으로 향했다. 

그 시절 가끔씩 성당 지하 강당에서는 학교 교사들의 집회나 연수가 진행되곤 했다. 주로 상담이나 놀이 연수였는데 매번 60~80명 정도의 현장 교사들이 모였다. 그들은 진지하게 강의를 듣거나 토론을 하곤 했는데 그 열기가 매우 뜨거웠다. 때로 전국교사협의회라는 플래카드를 본 적도 있는 것 같았다. 우리 주일학교 교사회의 사무실이 지하 강당에 붙어 있어서 이 모임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간혹 있었고 때로는 나도 뒷자리에 앉아 강의를 듣기도 했다. 그 자리에 내가 예전에 읽었던 책을 쓰신 분이 강사로 오거나 전에 뵈었던 선생님을 다시 만났을 때는 매우 기뻤다. 또 우리 성당에서도 이런 행사를 하네 하며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시간이 좀 지난 뒤에 수녀님께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어떻게 우리 성당에서 이런 좋은 행사를 하게 되었나요? 수녀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우리 성당에서 주최한 행사는 아니고 장소만 빌려준 것이예요. 그리고 주임신부님한테 얘기하면 허락하지 않을게 거의 확실해서 내가 책임지고 빌려준 거예요. 물론 이 일로 해서 주임신부님께 자주 혼났죠. 수녀님께 여쭤볼 질문이 하나 더 생겨났다. 왜 그분들에게 장소를 빌려주신 건가요? 그분들은 내가 예전에 만났던 선생님들과 많이 달랐어요. 열정적이고 아이들 교육만 생각하시고 순수하신 분들이예요. 촌지나 밝히고 아이들 때려가면서 말 듣게 하는 그런 교사들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조용히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 말씀이 또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결국 열정적이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순수하신 분이 그와 비슷한 분들을 알아본 것이다. 얼마 뒤에 연수회를 주도적으로 준비하신 선생님들이 성당 근처에 있는 건물 2층 사무실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지부 강남동 지회 결성식을 가졌고 그분들 대부분이 경찰에 연행된 뒤에 성당에서 현장 교사들의 연수회나 강연은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수녀님의 말과 행실이 그동안 잠자고 있었던 나의 ‘세상 살아가는 도리’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젠 시간이 많이 흘러 수녀님을 마지막으로 본 날이 30년 가까이 된다. 몸이 회복되면 연락을 드려야 할 것 같다. 물론 수녀님은 그때처럼 지금도 한 바가지의 새벽녘 찬물 같은 따끔함과 봄바람과도 같은 따뜻함으로 누군가에게 올곧은 마음을 일깨워주고 지친 마음에 위안과 감동을 주고 있을 것이다. ‘다이나마이트’ 수녀님! 다시 뵐 때까지 부디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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