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하고 구차해도 결국 우리네 인생 <생각의 여름>
무언가에 대한 미련은 사람을 구차하고 초라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미련 없는 사람이 있을까. 찌질하고 바보 같은 감정은 숨기고 싶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영화 속 주인공을 통해 표출됐을 때 관객은 짜릿함을 느끼며 쉽게 공감한다. 나만 느끼고 있었던 작은 감정이 아니라 결국 모두가 느끼는 보통의 사소한 감각이었다는 희열 때문일 테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과 다양한 관계 속, 미련의 생성과 해소를 반복하는 ‘현실’에 관객은 자신을 ‘현실’에 대입하며 영화를 관찰한다.
영화 은 무기력증에 빠진 시인 지망생 ‘현실’의 하루를 비춘다. 그는 ‘젊은시인문학상’에 제출할 시 다섯 편 중 마지막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하루 동안 우연한 계기로 여섯 명의 사람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영감을 얻는다. 사실 만남 자체에 명쾌한 해답은 없었다. 아무도 ‘현실’을 변화하게 만들지 못했다. 애매한 관계 속 다양한 사람이 ‘현실’을 스쳐 갈 뿐 그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점이 늘 명확하지 않은 우리네 인생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특별함을 더한다. ‘현실’은 스스로 변화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시를 완성해냈다. 그에겐 사소한 일상에 불과했어도 관객은 ‘현실’의 시에 본인이 사랑하는 무언가를 투영한다. 우리에겐 선배의 따분한 조언을 견디게 하고, 전 남자친구를 불러내는 찌질한 사람이 될지언정 차마 포기할 수 없는 애증의 무언가가 있다. 관객이 하나둘씩 그것을 떠올릴 때 우리는 ‘현실’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무언을 위로를 받는다.
개성을 더하는 요소는 이뿐만이 아니다. 영화 속에는 시인 황인찬의 시 다섯 편이 주인공 ‘현실’의 시로 변환된 채 등장한다. ‘현실’을 포함해 그가 만난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울려 퍼진다. 물론 시의 등장이 이야기의 흐름과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챕터를 나누듯 여섯 지인과의 만남을 구분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시와 ‘현실’의 삶은 긴밀하게 닿아있다. 김종재 감독은 자칫 어색해 보일 수 있는 시와 영화의 조합을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독특하면서도 몽환적인 연출로 매력을 더했다.
‘날날날날날날 좀 놔줘요 이젠 저를 쉬게 해줘요’ 영화 뒤편으로 자주 깔리는 김창완의 목소리는 영화의 주제를 관통한다. ‘현실’을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미련이 시의 완성을 막았고, 그를 행복하게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은 ‘민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나서야 ‘초원의 남자’에 대한 미련도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시를 새롭게 완성했다. 미련의 해소가 직업적 성취로 이어졌다. 이제 그는 무표정에서 벗어나 비로소 웃는다. 다 써낸 시 다섯 편이 ‘주영’처럼 등단하도록 만들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관객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현실’이 등단보다 더 값진 성장을 이뤄냈기 때문일 테다.
‘민구는 없다. 유정은 귀엽다. 남희는 재미없다. 주연은 모른다.’ 그리고 ‘현실’은 놓았다, 본인이 갖고 있던 미련 한 줌을. 눈을 뜨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여름이 다 지나 있었다. 그래도, 아쉽지 않고 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