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에 맞는 역할이 있다는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

Only You

by 솜늄

얼마 전에 친구와 함께 모여 카페에 갔었다. 각자 할 일을 하고, 이야기 꽃을 피우면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말하고 있었다. 여러 이야기 중에 내 뇌리에 꽂힌 한 문장이 있다."때에 맞는 역할, 시기에 맞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친구의 말이었다. 자신이 느낀 올바른 이치를 나에게 아주 열심히 열변하던 친구는 자신의 말을 지키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그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잘 정리되지 않았다. '나도 아직 생각 정리가 부족한가 보다.' 그렇게 느끼고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을 왜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초면이라면 아마도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초면에는 그것만큼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

얼마 전에 유튜브 쇼츠 영상을 보았다. 부자 동네에서 비싼 차를 타고 있는 낯선 사람에게 대뜸 찾아가 'What do you do for a living?'이라고 묻는 콘텐츠였다. 거기서 다양한 직업이 나온다. 수위 높은 비디오 배우, CEO, 운동선수 등이 자신의 '일'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직업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구체적인 내용을 말했다. 예를 들면, 배우와 운동선수는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라고 했고, CEO는 "다른 사람의 시간을 아껴준다"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무슨 일 하고 사세요?'라고 묻는다면 대게는 회사와 직급을 말하거나 백수라고 할 것이다. 그게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직업이란 것이고, 그것 이외에는 직업이 아니었다.

학생 때는 공부하고

모든 학'업'이 끝나면, 이제 취'업'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친구가 자신의 생각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모두가 한다면 우리는 두 가지 함정에 빠지고 만다. 일부 조건이 맞지 않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업도 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보자, 삼성이나 현대에 장애인 전형이 있다고는 해도, 진짜 일을 못하는 장애인이 들어갈 수 있는가? 이런 사람들의 해야 할 일과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들을 맞이할 제도적 사회적 장치, 그리고 사람들의 생각이 무르익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뉴스에 뜨는 장애인 소식, 희귀병 소식에 우리는 탄식을 하고 공감하는 댓글을 달거나 하지만 실제로 기부를 하거나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그게 현실이다.

그럼 이렇게 질문이 들어올지 모르겠다. '왜 특수한 경우를 들고 오냐?' 그렇다면 일반적인 경우를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는 모두 같은 능력과 같은 이상을 추구해서 비슷비슷한 직장인이 되고 싶은가? 아마 아닐 거다. 각자 하고 싶은 일도 다를 것이고, 잘하는 일도 다를 것이다.

왜 나이대 별로 해야 할 일들이 있는가? 그건 도대체 누가 정한 것인가? 그것을 따른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 기준을 따른다면 모두가 비슷한 좋은 곳에 취직하고 싶어 하니 경쟁률은 높아질 것이고, 좋은 직장은 아주 적어질 것이다. 한국 경쟁 사회의 이면에는 이런 획일화 교육의 폐해가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다. 친구의 믿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제 깨어나야 된다. 저런 것들은 이미 정해진 게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왜 사는지 자신이 정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아마도 우리는 스스로 정하지 않은 삶에 살아야 한다. 일단 나는 그런 삶에 행복할 수 없었고, 행복이라는 것을 알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고 다를까? 우리는 그저 주어진 것들에 현혹되거나 주어지지 않은 것에 매료되어 삶을 허공에 던진다. 그게 진짜 행복인 거 마냥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굴레에서 벗어나서 나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우선 자신을 알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나를 알려는 노력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면서 그것들을 다 이루는지 생각해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자명하다. 생각해 보면 나도 나를 잘 모른다. 내가 왜 공부하는지, 내가 왜 내일이 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기 전에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믿었다. 의심하지 않았다. 내일은 당연히 오고, 공부는 당연히 해야 한다. '당연'히 말이다.


흘러가는 대로 산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어폐가 있다. 흘러간다니 어디로? 사람들이 모두 흘러가는 급류가 흐름이라면, 흘러가는 대로 산다는 말은 사람들의 선택이라는 급류에 나의 선택을 맡긴다고 하는 것과 같다. 얼마나 민주주의적인 발상인가! 다수결의 원칙대로 사는 것은 너무 민주주의적이어서 아테네의 지도자 클레이스테네스가 무덤에서 일어나서 당신들의 인생이 "데모크라티아!" 하다며 기립 박수를 칠 것이다!


남들의 인생을 보면서, 남들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지 잘 안다. 그게 편한 것도 잘 안다. 우리는 외눈박이 세상에서 두눈박이로 살 용기를 내기 힘들다.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이 편하다. 그리고 외눈박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두 눈으로 살면 불편하지 않아? 내가 떼줄게" 그렇게 따라가서 한눈을 떼고 나면 우리는 비로소 안심이 될까? '아 나도 저들과 같아졌어. 정말 편하고 좋아'라고 말이다.

아니, 아닐 것이다. 그저 불편한 진실만 하나 생겼을 것이다. 한쪽 눈을 잃었다는 사실만이...

그렇다고 우리는 외눈박이 세상에서 두 눈을 크게 뜨고 다닐 필요도, 아예 뽑아낼 필요도 없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존재기 때문에 그렇게 안 해도 된다.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 인기 있는 MC 전현무는 모범생적인 생활과 공부를 통해서 시청률 높은 프로그램의 MC가 되는 것에 성공하고, 지금도 유명한 MC로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전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안전한 선택을 한 것에 후회된다. 노홍철은 나와 양극단에 있는 사람인데, 나는 그게 이상향이다. 시청률 안 나와도 하고, 시청률과 상관없이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참 부러워 보인다." 그는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외눈박이로 살아왔다. 가슴 한편에는 두 눈의 꿈을 꾸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정했다. 반반도 좋겠다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왜 그 선택을 했는지?'지 '뭐가 좋고 나쁜지'는 제대로 해보기 전까진 모르는 것이다.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도 이것과 같다. 너는 남들과 같은 삶을 살아야만 할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너만의 삶을 구가해도 될 "only you"라고, "너의 삶을 너 이외의 사람들이 살아주지 않는다"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거쳐야 될 순서가 있다.

그것을 이번 브런치 북을 통해서 차례대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여러분 모두가 소중한 순간순간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기를
하고 있는 일, 하고 싶은 일 모두 잘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