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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Aug 04. 2020

22. 오 마이, 베드버그

  “언젠가 그라나다에 다시 온다면 그땐 꼭 헤네랄리페 정원 한구석에 앉아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이 풍경을 마음껏 감상해야지. 시간에 쫓기지 않고 내 기분이 내키는 대로.”     


  스페인의 강렬한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헤네랄리페 정원의 모습은 내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분명 나는 그때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를 걸으며 행복에 젖어 있었다. 다만 언젠가 다시 이곳에 오겠다는 이 다짐을 기약 없게 만든 알함브라 궁전의 유일한 단점은 망할 그라나다에 있다는 것. 그것 하나였다.


  나에게 온갖 안 좋은 기억을 선물해 준 그라나다 덕분에 그날 아름답게 반짝이던 헤네랄리페의 모습은 단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나의 기억 속에서 멀어졌고 언젠가부터는 알함브라 궁전을 떠올렸을 때 ‘아, 내가 그런 곳도 갔었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내가 지금껏 수많은 여행지와 사랑에 빠지곤 했던 건 정말 운이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의 기억이 아름답지 않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 마치 알함브라 궁전에서의 좋았던 시간조차 지금의 나에겐 그저 밋밋하게만 느껴지는 것처럼.


**     


  “너희는 여기 묵을 수 없어.”     

  알함브라 궁전 관람을 끝마치고 찾아간 새로운 숙소에서 우리는 달갑지 않은 상황을 마주해야만 했다. 우리의 여권을 확인한 호스텔 스태프가 체크인을 거부하며 여권을 돌려주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우리 부킹닷컴에서 예약도 했어. 여기 바우처도 있는걸?”

  “아, 그럼 그 예약 지금 취소해줄게.”


 예약 바우처를 보여주며 항의하는 우리가 짜증 났는지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체크인을 거부하는 이유를 설명해주진 못할망정 예약을 지금 취소하겠다는 그녀의 말에 얼이 빠졌다. 그사이 그녀가 우리의 예약을 정말 취소한 것인지 핸드폰에 예약이 취소되었다는 알람이 떴다.


  “예약을 취소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가 왜 체크인을 못 하는 건데? 이유를 알려줘.”


  그녀는 우리를 무시하기로 작정한 것인지 그 어떤 설명도 없이 컴퓨터 화면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은 그녀와 우리의 눈치를 번갈아 보며 곤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노동절이라 그라나다 자체에 비어있는 방이 거의 없는 걸 뻔히 아는데 지금 시간에 어떻게 또 다른 숙소를 찾는단 말인가. 


  “너희 그전 숙소에서 문제가 있었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베드버그 말이야.”     


  우리가 돌아가지 않고 계속 대답을 기다리며 서 있자 결국, 그녀는 마지 못해 입을 열었고 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호스텔에서 우리에게 바로 이유를 알려주지 못했던 건 그 이유가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고작해야 ‘오버부킹’ 같은 이유를 상상했던 우리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너희가 베드버그를 몰고 다닌다고 들었어. 그래서 너희의 여권 정보도 알고 있었고….”


  베드버그가 나왔던 이전 호스텔 보스가 주변 호스텔들에 우리의 신상정보를 뿌린 것이었다. 우리가 베드버그를 몰고 다닌다며 악질적으로 말이다.      

  황당했다.     


  “분명 어젯밤까지만 해도 더는 베드버그가 안 보인다고 하더니. 무슨 근거로 그런 소문을 낸 거야?”

  “내 말이. 한번 연락해보자. 이메일 주소 가지고 있지?”


  우리는 어제 연락을 취했던 보스의 메일 주소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며 메일을 보냈다. 잠시 후 그녀에게서 온 답장에 우리는 화가 나 주먹을 꽉 그러쥘 수밖에 없었다.                                                                                                                   

  ‘너희 빨래에서 베드버그가 왕창 나왔어. 난 너희가 베드버그를 몰고 다닌다고 주변 호스텔에 알릴 의무가 있어.’     


  너무 뻔한 거짓말이었다. 만약 우리가 빨래를 맡기기 전에 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지 않았다면 보스의 메일에 되레 미안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빨래를 맡기기 전 옷 하나하나 뒤집어보기도 하고 털어보기도 하며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고 그 과정에서 베드버그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얼마나 구석구석 확인해봤는데…. 만약 베드버그가 정말로 있었다면 우리가 진즉에 발견했을 터였다. 더군다나 우리가 숙소를 옮길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우리의 개인정보를 동의 없이 주변 호스텔들에 뿌린 그녀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우리 정보가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곳에 올라왔으면 어떡하지? 한번 대사관에 연락해보자.”

  “좋아. 그럼 나는 네가 대사관이랑 연락해보는 동안 주변에 다른 숙소 있는지 알아보고 올게. 짐 좀 여기서 맡아줘.”


  우리는 여권 정보가 인터넷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까 불안해진 우리는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개비가 연락을 취하는 동안 나는 주변 숙소를 둘러보기로 했는데 과연 숙소를 구할 수 있을지 걱정이 산더미였다. 남아 있는 숙소 자체가 몇 없는데 호스텔 보스가 우리의 신상정보를 뿌리기까지 했으니 다른 숙소에서도 거절당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아, 안 좋은 예감은 어찌나 틀리는 법이 없는지….     


  “오, 미안. 우리 방이 다 찼어.”

  “우리는 시트가 부족해서…. 조금 이따 다시 와볼래?”     


  도착하는 숙소마다 여러 이유로 거절이 이어졌다. 노동절에 머물 수 있는 숙소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결국, 몇 번의 거절 끝에 우리는 겨우 하루 묵을 수 있는 숙소를 구할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침대 시트가 없다는 걸 사정해서 겨우 묵게 된 곳이었다. 당장 내일은 어디서 묵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모로코를 떠나 스페인으로 왔는데…. 우리가 뭘 잘못 했다고 이런 일을 겪어야 해? 오늘은 겨우 숙소를 구했다지만 내일은 어떡하지? 하, 망할 그라나다.’

  “이번 여행은 왜 이런지 모르겠어. 작년에 여행할 땐 호스텔에서 잘 맞는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정말 즐거웠단 말이야. 그런데 스페인에서는….”

  그라나다에 대한 온갖 욕을 퍼붓고 있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개비가 겨우 구한 숙소 침대에 걸터앉아 우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퍽 즐겁지만은 않던 이번 여행에 오늘 일까지 더해지니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듯했다.

  “나 사실 모로코가 정말 좋아서 스페인에 오기 싫었거든? 그런데 오늘 일까지 겪으니까 모로코가 너무 그리워. 스페인에 괜히 왔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집에 가고 싶어. 스페인은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개비와 오늘 하루 동안 겹겹이 쌓여온 감정을 나누다 보니 지금껏 참아온 서러움이 눈물이 되어 흘렀다. 개비는 이미 눈가를 비비며 훌쩍이고 있었다.     

  “그라나다는 정말 최악이야.”     

  한국으로 가고 싶어 하는 개비와 모로코로 가고 싶어 하는 나. 가고 싶은 곳은 달랐지만 적어도 우리 둘 모두에게 그라나다의 인상이 최악으로 치달았을 거란 사실은 너무나 명백했다.     

  작은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나오는 그라나다의 한 호스텔 방. 그날, 그곳에서 우리는 서러움에 복받쳐 조용히 훌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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