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 람 Oct 15. 2023

다시 북한산

숲의 바다로 초대받은 산행

동서와 같이 가볍게 트레킹을 할 요량으로 북한산둘레길 21구간인 우이령길을 예약하였다. 하지만 당일 아침 그만 동서가 감기가 심하게 걸렸는지 함께 할 수가 없어 홀로 트레킹을 하게 되었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법. 코스선택의 자유함이 생겼다. 예약은 교현리 출발로 예약했지만 우이동 출발로 변경했다. 막상 도착하여 지도를 보고 있자니 다시 산이 나지막이 소곤대듯 부른다. 이번엔 북한산과 도봉산사이를 가로지르는 우이령 둘레길을 대신하여 산을 타고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계획에 없던 길이라 북한산탐방지원센터에 들러 코스를 문의하니 친절하게 알려주신다. 대동문을 거쳐 고양시 쪽 산성으로 가는 길을 확인했다.


출발할 때는 흐리기만 했던 하늘에서 보슬보슬 보슬비가 나뭇잎을 두드린다. 토닥토닥 잔잔했던 소리가 후드득 후두득 제법 빠른 장단소리로 변해간다. 나뭇잎뿐 아니라 모자와 어깨를 두드리는 경쾌한 빗방울소리가 계곡물소리와 어우러져 신나는 타악기 합주공연을 시작한다. 상쾌한 공기에 섞인 향긋한 흙내음과 또르륵 구르는 듯 떨어지는 낙엽도 꽃잎을 대신해 숲이 환영인사를 하고 있다. 내딛는 발걸음 바위틈새에서 빗물로 깨끗이 목욕하고 빼꼼히 얼굴 내민 연초록의 빛나는 아기잎들은 나를 보고 방긋거려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생긴다. 온숲이 이렇듯 반겨주니 준비해 둔 우비와 우산이 아니더라도 굵어지는 빗줄기가 전혀 개의치 않다. 그저 비에 젖어드는 숲과 하나가 되어 즐기면 된다. 나무와 바위를 뒤덮은 이끼가 빗물을 받아 초록으로 빛나 가는 길을 부드럽게 안내해 준다. 촉촉이 빗물 머금은 폭신폭신한 이끼가 아기 볼살 같다. 숲의 생명들이 빗방울로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빗물에 바윗돌 위가 제법 미끄러울 법도 하지만 숲이 초대한 손님이 다칠까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발바닥을 사박사박 살며시 감싸 쥐며 떠받쳐주는 듯하다.

우이역에서 선운각 지나 대동문 가는 길
바위에 무성한 이끼가 촉촉하니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


쉬엄쉬엄 어느덧 대동문에 다다랐다. 아쉽게도 공사 중이라 대동문의 실체는 볼 수 없었다. 적절한 공간에서 비를 피해 가져 온 김밥을 먹을까 했는데,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어, 대남문을 거쳐 구기터널 쪽으로 내려가 늦은 점심을 해결해야겠다 생각하며 방향을 잡았다. 산성을 따라 걸어가는 길에 힐끗힐끗 회색구름이 산그림자가 되어 무엇이 산이고 무엇이 구름인지 모를 듯 발걸음에 맞춰 덩실대며 엉켜지고 있다. 또한 산등선을 쓰다듬으며 곳곳에 피어오르는 운무가 커다란 학이 되어 우아한 날갯짓으로 날아오른다.

칼바위 앞에서 그 모습이 절정을 이룬다. 가던 길을 멈추고 넋을 놓고 그 전경에  빠져들었다.

아,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며 천천히 칼바위 운무의 공연을 보면서 가져온 우산에 기대어 식은 김밥으로 배를 채워준다. 따뜻한 차 한잔이 아쉬운 순간이다.



산성으로 연결되어 대남문을 향하는 길에서 공사현장을 만나는 바람에 그만 길을 놓쳤다. 딱히 대남문을 가야만 하는 것도 아니어서 산길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맡겨보기로 했다.  

제법 길게 이어진 잔잔하며 소박했던 길이 추사 김정희가 놀았다는 산영루에 이르러 바위들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꿈틀대는 산그림자와 놀고 싶어 세워진 누각인지 놀기에 명당은 명당이다.


추시김정희가 노닐었다는 산영루


비와 함께 숲이 거대한 바다가 되고 있다.

생물과 무생물, 생명의 기준을 인간의 의식과 인식으로 구별 짓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비웃기나 하듯 거대한 바위들이 땅에서 튀어나와 숲의 바다에서 돌고래, 흰 수염고래, 바다표범, 가오리가 되어 헤엄치고 있다. 매 걸음걸음마다 나타나는 놀라운 광경에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바위틈을 헤집고 나오는 거북
물가에 턱을 괴고 누워있는 삵괭이 돌고래
쓰다듬는 내손길이 마치 간지러운듯
돌아누운 뒷모습


물미끄러미 쳐다보며 산지키는 어린동자


등에 따개비 잔뜩 붙어 있는 흰수염고래 가족


떼룰 지어가는 흑등고래가족


날렵하게 방향을 틀어 빠르게 헤엄치는 돌고래


엄마젖을 빨고 있는 아기고래


납짝하게 엎드린 가오리


떡하니 바위에 걸터 앉아 빼꼼히 쳐다보고 있는 바다표벜


오늘은 숲에 감추었던 얼굴들이 드러나는 날인가 보다.


얼마나 걸었을까?

숲의 바다에서 나 역시 한 마리 물고기 되어 노닐다 보니 날도 개이고 중성문에 이르렀다.

이제 사람들이 보인다. 속세의 또 다른 삶의 현장이 기다리고 있다.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산기슭에 내려오니 푸른 하늘이 반기고 있다. 한바탕 아이맥스영화관에서 가상세계를 체험하다 온 듯 강렬했던 숲경험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신선계가 따로 없다.  



이쯤 되니 산세가 부드러워지고 바위도 널찍널찍 풀어져 쉬고 있다.

한바탕 숲의 잔치에 초대받아 놀다 나왔다.

이제 산은 언제 그랬냐는 듯 등장했던 숲의 정령들의 모습들이 하나 둘 사라지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여전히 위풍스런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숲은 많은 상상력을 불어 일으켜준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도 아마 그가 숲에서 겪은 경험을 희곡으로 풀어쓴 게 아닐까?


오늘도 예상치 못한 산의 초대에 숲과 나와의 구분을 잠시 잊고 빠져든 즐거운 산행이었다.



초대에 감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한양도성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