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과 바람 그리고 이야기
2024년 새해, 제주는 한적하다.
구정연휴가 되면 공항에서부터 제주로 가는 인파로 벅적되던 시절은 옛말이다. 차량을 렌트할 때도 보통 때 같으면 메이저 렌터카 회사는 일치감치 마감되어 변두리 렌터카 업체에서나 뒤적거리고 있었을 텐데, 이번엔 적당한 차량을 여유 있게 예약할 수 있었다.
김포에서 출발한 아시아나 객석도 중간좌석들이 빈 채로 출발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한가로운 제주가 기대된다.
숙소로 가는 길에 저녁을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구정 당일이라 쉬는 곳이 많지만 빠른 검색으로 찾아간 곳은 월정항아리갈치집이었다. 갈치가 통째로 들어갈 수 있는 기다란 조림통에 온갖 신선한 해물을 넣고 팔팔 끓인다. 이젠 익숙해진 조리법이지만 주인장 손맛과 마음씀씀이에 따라 집집마다 맛이 다르다. 강하지 않은 양념으로 재료의 신선한 맛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해물도 해물이지만 적당히 양념 베인 부드럽고 쫀득한 가래떡 맛은 일품이다.
매번 새롭게 트렌디한 장소를 찾아내는 아내의 이번 선택은 성산방향의 하도 스테이였다. 우도를 가고픈 큰딸의 바람이 작동했으리라. 주차를 하고 들어서는 공간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했다.
느지막이 찾아간 브런치카페 난산리다방에서는 한 청춘이 좋아하는 사진과 여행길에 자리 잡은 제주 시골마을 한구석의 삶을 잠시 맛본다.
하루에 한 가지,
빈도로의 여유로움에 시간이 느려지는 느낌이다.
느린 하루에도 밥은 먹어야 하니 큰딸 취향 따라 찾아간 구좌읍 곰막식당은 한창때 줄 서서 먹었을 대기공간과 대기표 뽑는 기계가 한가로이 반기고 있었다. 제주에서나 맛볼 수 있는 부드럽고 고소한 고등어회와 성게미역국은 어디나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시간은 느리게 가지만 함께 지나온 태풍과 비바람을 삶은 기억하고 있다. 가족여행은 그런 것들을 드러나게 하는가 보다.
한차례 폭풍 같은 대화를 뒤로하고 우도로 향한다.
17킬로 섬둘레를 얕잡아 봤다. 쉬엄쉬엄 사진 찍고 수제햄버거 한입 먹고 나니 마지막배 시간이 임박했다. 검멀래를 지나선 전기자전거 속도가 빨라진다. 큰딸은 떠나는 아쉬움을 달랜다고 우도땅콩아이스크림을 손에 쥐어준다.
제주사람에게는 익숙하겠지만 육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현무암은 신비로운 영감을 자극한다. 검고 거친 구멍들 속에 수많은 사연들을 숨기고 있다가 불현듯 바람이 스치면 그 이야기들을 쏟아낼 것만 같다.
바닷가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부딪쳐 그 파도와 같이 부서져 뒹구는 검은 돌덩이들이나 밭과 밭사이, 집과 집사이 묵묵히 경계를 지켜오는 수많은 돌덩어리들이 쉽게 떠나보내지 못하고 가슴에 돌덩이처럼 담아둔 사연 많은 우리들 삶처럼 느껴진다.
과연 돌덩이 같은 수많은 사연들로부터
우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아마도
내 안의 돌덩어리들을 꺼내놓으면
부는 바람과 파도가 그 몫을 다해주리라.
저 멀리 우도너머 뜨는 해를 맞이할 때, 내 안에 슬며시 움트는 생명의 기운이 반응한다.
나를 있게 하는 많은 사람들과 이 순간 가득한 자연의 경의로움에 호흡이 깊어지고 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걸으멍 쉬멍
계속 길을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