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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 람 Jun 23. 2024

연필과 종이 예찬

즐거운 만남

빈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리는 과정은 새롭고 즐겁다.

적당한 두께와 질감이 있는 종이를 선택하는 것부터 즐거움의 시작이다.

얄팍한 종이는 얄팍한 대로 날카로움과 강렬한 명암을 표현할 수 있고 두껍고 거친 종이는 말 그대로 펄프의 자연스럽고 폭신한 표면의 질감과 더불어 거칠고 풍부한 느낌을 살릴 수 있어 좋다. 두툼한 종이는 주로 수채화용으로 사용하지만 드로잉에도 또 다른 맛이 있다. 요즘은 회화나 드로잉재료에 대한 경계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듯하여 종이 위에도 과감히 아크릴, 유화를 쓰기도 한다. 대학 때는 그것도 비싸게 느껴져 벽 칠하는 페인트 안료를 도배할 때 쓰는 종이 위에 맘껏 그리기도 했다.

연필과 종이는 오래도록 친숙한 도구이다.

하얀 여백이 주는 자유함이 가슴 뛰게 만든다.

적당한 질감이 느껴지는 오돌토돌한 표면 위로 연필심을 얹여 살며시 주는 힘에 따라 섬세하게 반응한다.

연필심도 흑연의 강도에 띠라 진하기가 다르다.

4B, 2B, HB, H.. 적절히 골라 쓰는 맛이 있다.

처음 연필의 나무를 칼로 조심스레 깎아나가며 연필심을 드러내게 하는 것부터가 설렌다. 칼이 맞닿는 나무의 결을 이용해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잘라내며 적당한 길이의 연필심을 드러내게 하는 게 관건이다. 검정심과 살결 같은 나무속살이 적당한 비례를 이루도록 깎아나간다. 그리고 연필심을 어떻게 만들지 결정한다.

누구의 비례가 아닌 자신이 편안한 비례를 찾는 것이다. 연필심이 닳아 짧아지면 또 칼을 들어 적당한 비례를 찾는다.

도화지는 분명 평평한 평면이다. 표현하는 대상은 평면일 수가 없다. 거기에는 사실 선도 없다. 선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존재하는 것들의 경계일 뿐이다. 빛이 맞닿으면 그 경계조차 사라진다. 빛의 마술이다.

빛과 어둠의 사이에서 대상의 경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가 드로잉의 즐거움이다.


북한산 백운대

사진은 정말 도움이 된다. 사진이 없었다면 빛을 이해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자연빛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때문에 어떤 순간을 포착하기가 정말 어렵다. 바라보고 그리는 순간 이미 다른 빛이 되어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연 속에서 그릴 때는 세밀하게 그리는 것보다 작가의 느낌과 상상력이 변하는 시간 속에 가능하면 빠르게 총체적인 느낌으로 그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사진으로 붙잡은 이미지는 나름 순간의 장면이기에 정지된 빛을 관찰할 수가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드로잉을 하면 표현하는데 좀 여유가 있다.


동영상이 기획된 장면들을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소리와 함께 속도감 있게 전개하여 관객을 향한 한 방향으로 달리는 차와 같다면 글과 그림은 상대적으로 느리고 상호적이며 입체적인 걷기나 자전거 타는 것과 비슷하다. 관객과 독자는 자기가 원하는 장면을 주도적으로 선택해서 머물고 느낄 수 있다. 느리지만 멈춤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발견해 나가는 즐거움이 있다. 관객이 주도적으로 관찰한 작가의 표현이 관객의 지성과 감성을 자극하여 관객 자신의 고유한 경험 속으로 다시 퍼져나간다. 관람자체도 이미 주도적인 예술행위이다. 고도의 지성과 감성이 시간을 뛰어넘어 만나는 즐거움이다.



하얀 종이 위 연필로 전개될 세상과 새로운 만남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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