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동안의 휴가
2022년, 열림원에서 쥘 베른 베스트 컬렉션을 펴냈다. 내가 처음 읽은 쥘 베른의 소설은 《80일간의 세계일주》였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귀에 익은 제목이라 ‘언젠가는 읽을 날이 있겠지’ 생각하다가 몇 년 전쯤 어느 날 드디어 꺼내 읽었다. 책은 말 그대로 80일 동안 세계 일주 하는 내용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80일 동안 세계 일주를 할 수 있다는 호언장담을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랄까. 지금이야 80일이면 성에 차지는 못할지언정 이곳저곳 둘러보며 여정을 즐길 만한 정도의 시간이지만 소설은 비행기가 없던 시절인지라 최단 거리, 최소 시간으로 이동하기 위해 배에 기차에 코끼리까지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의 아름답고 느긋한 여행기를 기대하며 책을 펼쳤던 나는 예기치 못한 ‘환승 여행’에 참여하게 됐고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환승 시간을 놓치지 않을까 장마다 마음을 졸였다. 이 조마조마한 여행이 쥘 베른과 나의 첫 만남이었다. 그런 줄 알았는데...
우리는 만난 적이 있었다. 심지어 초등학교(혹은 중학교) 시절에. 바로 《15소년 표류기》에서. 당시 우리 집에는 온통 보라색 커버로 덮인 세계문학전집이 한 질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제목이 신나 보이는 책이었다.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또래 아이들이 무인도에 표류한 이야기가 아닌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마냥 재미있게 읽었던 처음과는 달리 중간 이후부터는 갈등과 위협이 생기고 칼과 총이 나와 무서워하며 부리나케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한참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갈등과 위협은 있지만 무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부리나케 읽어 내려간 건 여전했다. 특히 도니펀-아마 어린 시절에 느꼈던 책 속 갈등은 이 친구 때문이 아닐까-과 세 소년이 탐험을 떠난 2권 중반부 이후부터는 나도 모르게 내 눈이 저절로 다섯 줄 아래를 먼저 읽고 있어 몇 번이고 달래며 차례차례 문장을 짚어가며 읽어야 했다. 《80일간의 세계일주》에 이어 또 마음을 졸인 셈이다.
열서너 살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와 달리 나는 손가락 콕콕 몇 번이면 손쉽게 세계 지도를 볼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책의 주 무대, 즉 아이들이 기숙학교 이름을 따 체어먼 섬이라고 부르는 섬을 찾아보기로 했다. 책에 마젤란 해협이나 푼타 아레나스 같은 실제 지명이 그대로 나오고 있으므로 이 섬 역시 실제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책에서 추측할 수 있는 정보를 종합해 범위를 좁혀 보았다. 뉴질랜드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남아메리카 대륙의 서쪽 해안에서 50km 정도 떨어져 있는 섬. 인터넷상 아무개를 통해 이 섬의 원래 이름은 하노버 섬이라는 정보까지 얻었다.
하지만 구글 지도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책 후반부에 들어가면 꽤 자세히 위치를 묘사해 두었는데 설명에 있는 지명은 찾아도 하노버 섬이라는 지명만은 찾을 수 없었다. 하노버라는 섬 이름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 남아메리카 서쪽 해안선을 하나하나 훑으며 한가운데 거대한 호수가 있는 섬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그럴듯한 섬은 보이지 않았다. 가상의 섬인 걸까?
요즘 《15소년 표류기》에 푹 빠져 있다고 친구에게 말했더니 제목을 지적했다. 너무 일본어 번역 투라는 말이었다. “《15소년 표류기》의 원제가 뭘까, 쥘 베른이 프랑스인이니까 프랑스어가 아닐까, 예전에 일본어판을 번역하면서 일본어 제목을 그대로 쓴 게 아닐까” 하며 둘이서 잠깐 궁리했는데 이번 열림원 쥘 베른 베스트 컬렉션을 번역한 김석희 번역가 역시 제목을 고민했다고 한다. 번역가의 말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Deux ans de vacances, 즉 ‘2년 동안의 휴가’이다. ‘15소년 표류기’라는 제목은 친구와 예상한 대로 일본에서 유래했다. 1896년에 모리타 시켄(森田思軒)이 영역본을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十五少年漂流記’라는 제목으로 바꾸어 달았다.
프랑스 소설의 영역본을 일본어로 번역한 책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붙은 제목인 만큼 원본인 프랑스 소설을 옮기는 번역가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번역가는 《15소년 표류기》라는 제목을 선택했다. 이미 잘 알려진 소설에 다른 제목을 붙일 때 생길 혼란이 우려되고 무엇보다 지금의 제목이 소설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선택이 있기까지 번역가가 얼마나 고민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책 본문 말미에 ‘2년 동안의 휴가’라는 문구가 그대로 쓰여 있기 때문에 번역가로서는 ‘2년 동안의 휴가’라는 제목 역시 무척 탐나지 않았을까 추측만 해볼 뿐이다.
어쨌든 《15소년 표류기》는 당분간은 《15소년 표류기》라는 제목을 유지할 예정이다. ‘신나는 제목이야!’ 하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뺏게 되겠지.
(내가 쥘 베른 소설 서평을 올리는 2월 8일 오늘은 정말 우연히도 쥘 베른이 세상에 태어난 지 꼭 195년 되는 날, 쥘 베른의 생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