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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개인주의자가 정교하게 설계한 어트랙션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대학별로 ‘권장도서 목록이라는  발표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의 학교 남의 학교 따지지 않고 모았던 적이 있다. 지성의 요람에서 선정한 책이라면 분명 좋은 책이겠지. 인기 있는 책들은 도서관에서 대기했다가 빌려 보기도 했고 두껍고 어려운 책들은 오래, 여러  곱씹으며 읽을 작정으로 아예 사들였다.


그때 사서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몇 권 있다. 시도는 많았다. 어떤 책은 ‘수학의 정석’처럼 앞부분만 까맣고, 어떤 책은 앞 면지와 표제지까지만 제본이 떨어져 나갔다. 좋은 책이라고 하니 좋은 책인 것 같기는 한데 번번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제자리걸음을 했다. 하지만 ‘권장도서’들은 대체로 나 같은 사람도 쉽게 읽어 내려갈 만한 양서들이었고 학교 도서관 한 건물을 가득 채운 수많은 책 중 무엇을 읽어야 할지를 알려주는 훌륭한 길잡이였다. 자전거 보조 바퀴 같았달까.


《쾌락독서》는 보조 바퀴를 떼어내 준 책이었다. ‘미스 함무라비’라는 드라마의 원작 소설을 쓴 문유석 작가의 독서 에세이다. 어쩌다 이 책을 집어 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판사님은 어떤 책을 추천하시나 궁금했던 것도 같다. 그래서 나는 기어이 ‘판사님의 권장도서 목록’까지 손에 넣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 이 책에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권장도서 목록이 아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그게 뭐든 닥치는 대로 그냥 읽고 또 읽는다는 저자의 독서 정신(?)이었다. ‘지성의 요람’과 ‘판사님’이라는 권위에 기대 읽을 책을 골라왔던 나는 개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구나!’ 게다가 《쾌락독서》라는 책 자체도 무척 재미있었다. 책 읽는 이야기를 쓴 책이건만 그렇게 흥미진진할 수가 없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읽기 시작해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그야말로 수불석권,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몰입감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책을 찾을 때는 보통 ‘제목’을 입력하는데 이번에는 ‘저자명’을 입력했다. 그냥 문유석 작가가 쓴 책을 읽고 싶었다.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문학동네, 2015


책의 제목처럼 저자는 프롤로그에서부터 개인주의자 선언을 하고 나선다. 남의 일에 개입하는 건 싫고 내 일에 누가 개입하는 건 더 싫은 개인주의자가 ‘개인’이 발붙일 곳 없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고단함을 이야기한다. 그러다 “개인주의자를 자처하며 사춘기 내내 바깥세상에 눈을 감고 책과 음악에만 빠져 살았는데, 뒤늦게 발견한 세상은 온통 불의와 부조리 덩어리(98쪽)”였음을 깨닫는다. 날카로운 이빨도, 단단한 뿔도 없이 한없이 나약하게 태어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한 최고의 도구는 예부터 타인이었다. 그러므로 살아남으려면 개인주의자들이 연대해야 한다. 힘없는 이웃을 돌아보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자 노력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를 위한 일임을 강조하며 저자는 책을 마무리한다.


자못 위악적으로 시작된 개인주의자 선언으로 시작해 타인을 향한 톨레랑스와 연대를 이야기하는 에필로그까지, 잘 설계된 어트랙션을 통과한 느낌이 든다. 어트랙션 속 이벤트마다 방대한 지식으로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동네 사람들. 이 책 좀 읽어 보세요.


“박정희 때가 좋았다니까.”

책을 읽는 내내 얼마 전 어른들이 나누던 이야기가 자꾸만 떠올랐다. ‘하, 진짜 무슨 소리 하시는지?’ 입이 근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지만 거기서 끼어들어봤자 이야기가 수렴되기는커녕 확산일로일 뿐이라는 건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짐짓 못 들은 체, 먼 산만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이 난데없이 되살아난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 따박따박 내 의견을 낼 줄이야 알았지만 한 번이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한 적이 있었던가. ‘이래서 어른들이랑은 말이 안 통한다니까’가 정말 최선이었을까.


세대와 세대가 갈등하고 성별로 나뉘어 반목하는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모든 지식과 지성을 동원해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모든 지식과 지성을 동원해도 부족하다면 시간을 들여 기꺼이 공부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한 최고의 도구가 바로 ‘타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위험에 빠졌을 때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역시 ‘타인’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직시할 문제와 모색할 해결책, 두 가지만 있을 뿐(229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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