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 쫄보의 용감한 도전기
직장 다닐 때, 회사에서 운영하는 아침 영어 말하기 수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출근 시간 전 한 시간인가 한 시간 반 동안 원어민 선생님의 지도 아래 말하기 연습을 하는 거죠. 수업에는 업무상 영어 사용 빈도가 높아 말하기 연습을 하고자 하는 직원들이 일고여덟 명 참석했고요. 저 역시도 같은 이유로 일주일 두세 번 있는 수업을 들으러 졸린 눈을 비비며 이른 출근을 했지요.
수업은 영어로 된 기사를 함께 읽고 해당 토픽에서 논쟁거리를 뽑아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영양제 섭취의 장단점을 논한 기사를 읽은 다음에 ‘영양제를 먹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고 짝꿍에게 의견을 피력했던 기억이 나네요. 여기까지는 재미있었지만 문제는 다음 시간이었습니다. 전 시간에 읽은 기사를 각자 나름대로 ‘paraphrase’ 해 3분 스피치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저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하기를 무척 꺼립니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3일이니까 3번, 13번, 23번, 33번이 한 문단씩 읽어 봐” 하면 앞번호가 읽는 동안 긴장감에 속이 바짝바짝 타곤 했습니다. (말하기가 아니라 읽기였는데도요.) 그때는 대학 가면, 회사 가면 아무래도 이런 기회가 더 많아질 테니 점점 무덤덤해지겠지,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일은 어려웠어요.
그런데 아침 댓바람부터, (비록 열 명도 채 안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심지어 우리말도 아닌 영어로, 무려 3분을 이야기하라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본을 써 놓고 달달 외우기로 했습니다. 무슨 말을 할지 걱정만 하고 있느니 차라리 대본을 쓰고 외우는 수고를 하기로 마음먹은 셈입니다. 따라서 말하기 연습이 아니라 암기력 연습에 가까웠지만 저에게 다른 선택 항은 없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거든요.
그래서 암기력 연습은 성공적이었냐면 마냥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암기에는 큰 리스크가 있습니다. 한번 까먹으면 길을 잃는다는 것이죠. 대본에 써 놓은 ‘그 단어’가 갑자기 생각나지 않아 태엽이 다 풀린 장난감처럼 일시 정지되기 일쑤였습니다. ‘왼 것을 읊지 않고 그냥 말을 했다면 그렇게까지 머릿속이 새하얘지지는 않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면서도 다음 수업이 되면 또 불안감에 대본을 작성했습니다. 매주 그렇게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괴로워하면서도 반년 이상 수업을 들었다는 건 좀 아이러니죠.
《먹는물이 위험하다》가 출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지니’ 출판사에서 북토크를 제안해 주셨을 때 불현듯 영어 말하기 수업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수업에서는 그나마 같은 회사 사람들로 구성된 소그룹을 대상으로, 길어야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손짓, 발짓해 가며 애쓰면 그만이었지만 북토크는 눈앞에 계신 독자(혹은 예정자)분들과 눈앞에는 안 계시지만 유튜브를 통해 지켜보고 계시는 독자(혹은 예정자)분들을 향해 한 시간 동안 책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습니다.
“네, 해 볼게요.”
너무 놀란 나머지 말이 헛나왔냐면 그건 아닙니다. 출판사의 제안이 있던 날로부터 불과 며칠 전, 만약 누군가 이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청한다면 기꺼이 응하겠노라고 남몰래 한 다짐 때문이었어요. ‘이제 막 출간된 이 책을 현재 시점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나, 기획하고 번역한 사람도 나’라는 생각, 자신감과 책임감이 뒤섞인 마음이었습니다.
본격적인 북토크 준비에 앞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영어 말하기 수업 때 그토록 쉽게 머릿속이 하얘지고 긴장했던 이유였죠. 똑같은 상황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어렴풋이 제가 도달한 결론은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였습니다. 어쩌면 저는 아침 댓바람부터, 같은 회사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잘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영어로, 영양제 이야기를 할 의욕이 그다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이 시키지 않았다면 절대 책을 읽을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북토크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책을 다시 읽고 내용을 요약하고 관련 기사를 찾아 읽으며 책과 책 주변 상황들과 저(감사하게도 저의 번역도 궁금히 여겨 주셔서)와 관련해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을 준비했습니다. 대본은 만들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야기의 얼개는 머릿속에 정해 두었습니다.
시간은 조금도 느리거나 빠른 기색 없이 뚜벅뚜벅 정직하게 흘렀고 드디어 기다려 마지않던 북토크 다음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기대한 대로 무척 상쾌한 아침이었지요. 자리에서 일어나 전날 있었던 북토크를 반추해 보았습니다. 길을 잃지 않고 완벽하게 해냈냐면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몇 번인가 일시 정지가 찾아왔습니다. 그래도 전과 달랐던 점은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화제도 풍부했고 덕분에 여유도 조금이지만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날 찍힌 영상들을 다시 돌려볼 용기는 나지 않지만 어쨌든 제 머릿속으로는 좋은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인생 첫 북토크가 좋은 기억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산지니 출판사의 따뜻한 환대도 있었습니다. 책을 출간하는 과정에서도, 이번 북토크 준비 과정에서도 담당 편집자셨던 이소영 편집자님의 꼼꼼하고 따스한 배려가 저에게 무척 힘이 되었습니다. 북토크 내내 자리를 지키며 폭풍 리액션을 해주신 강수걸 대표님과 출판사 식구분들께도 감사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사진을 한 장도 찍지 못했습니다. 현수막도 걸어 주셨는데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어요. 위에서 쓴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라는 문장이 사실은 허세였음이 이렇게 드러나는군요.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고, 빨리 북토크 다음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벌벌 떨었다’가 팩트에 가깝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지나고 보니 추억이 되었습니다. 쓰고 보니 용감하게 북토크에 나섰던 쫄보의 도전기가 되었네요. 귀한 시간 내어 쫄보의 도전을 실시간으로 목격해 주셨던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