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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운 것들》

집요하고 치밀하게 구성해 낸 소설 속 세계

앨러스데어 그레이, 《가여운 것들》, 황금가지, 2023


(중간중간 소설 내용이 등장하므로 (약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일요일 오후는 영화 소개 프로그램과 함께 시작된다. 나는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어쩐 일인지 그 무렵이 되면 TV에는 늘 ‘출발 비디오 여행’이 흘러나오고, 그제야 ‘일요일도 반이 지나갔구나’ 하고 생각한다. 소개되는 영화가 아주 잔혹하거나 무섭지만 않다면 집중해서 보기도 하는데(하지만 아예 잔혹하고 무서운 영화만 소개하는 코너가 있어서 채널을 돌리는 일이 더 많다) 어느 날인가는 ‘가여운 것들’이라는 영화를 집중 조명했다. 엠마 스톤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는 장면을 봐서였을까.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증이 일어 한동안 TV에 집중했다. 다른 건 몰라도 ‘poor things’를 번역한 ‘가여운 것들’이라는 제목, 화려한 여주인공의 의상, ‘마치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키는’이라는 설명만큼은 인상에 남았다. 그리고 얼마 후 도서관에서 영화의 원작 소설을 발견했다.


책은 ‘앨러스데어 그레이’가 자신이 발굴하고 편집한 어느 이야기의 출처를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앨러스데어 그레이’는 저자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소설에서는 허구의 인물이다. 이 소개 글을 통해 독자는 표제지를 넘기자마자 별다른 경고 없이 소설이 마련해 둔 허구의 세계로 곧장 발을 들이게 된다. 만약 이제 막 책을 펼친 나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면 나는 단단히 이성을 붙들어 매고 시작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혹시나 아무런 방해 없이 책 속 세계에 완전히 몰입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 글도 읽지 않기를 권한다. 그만큼 저자인 앨러스데이 그레이는 집요하고도 치밀하게 소설 속 세계를 구성해 냈다.


허구의 편집자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소개가 끝나면 19세기 스코틀랜드의 공중 보건의 맥캔들리스가 쓴 ‘가여운 것들’이라는 이야기가 따라 나온다. 이야기에는 내가 ‘출‧비’에서 본 그대로 맥캔들리스, 맥캔들리스가 존경해 마지않는 친구이자 외과의사인 고드윈 백스터, 고드윈 백스터의 ‘창조물’ 벨라 백스터가 등장한다. 만삭의 몸으로 강물에 뛰어든 여성의 죽은 뇌를 배 속에 있던 태아의 뇌로 바꿔치기해 벨라라는 창조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고드윈의 의술 덕분이었다. 신생아의 뇌를 통해 바라본 세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벨라 때문일까. 미리 본 영화의 인상과 알록달록한 책 표지 때문일까. 이야기 초반부는 총천연색으로 물들어 있는 느낌이다. 빨간색 옆에 초록색, 그 옆에 다시 보라색, 노란색. 뭐랄까, 다채롭다기보다는 개연성이 없는 느낌, 꿈속 세상처럼 환상적이지만 경험적으로 수긍되지 않는 느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이쯤에서 말을 아끼겠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이런 위화감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책의 제목은 왜 ‘가여운 것들’일까? 나는 책을 읽기 전부터 궁금했다. 다시 질문하면, 맥캔들리스는 왜 이 이야기의 제목을 ‘가여운 것들’이라고 정했을까? 맥캔들리스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에게(동물에게도) ‘가여운’이라는 형용사를 쓴다. 번역가의 친절한 주석에 따르면 ‘poor’ 외에도 다양한 표현들이 ‘가여운’이라는 뜻으로 이야기 곳곳에 쓰였다. 그러니까 맥캔들리스는 자신의 이야기 속 존재 대부분을 가엽다고 여긴 셈이다. 그리고 ‘이후’ 벨라는 맥캔들리스가 살아가는 내내 벨라 자신과 고드윈에게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으리라 추측한다. 아주 한심하다는(poor) 말투로.


책은 벨라의 입을 빌린 맥캔들리스를 통해 19세기 말 영국이 안고 있던 열악한 노동자 처우 문제, 인종 차별 문제, 빈부 격차 문제를 꼬집는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와 무정부주의가 혼재하던 당시의 혼란스러운 사회상도 그린다. 글로 세상을 배운 벨라의 어린 뇌 덕분에 옛 영국 문학 작품 속 구절이 이곳저곳에서 인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갑자기 왜 이런 표현이 나오는지 잘 이해가 안 될 때도 있고 여차하면 길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번역자의 친절한 주석이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번역가가 해설사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셈이다. 책 번역에 매진하고 있는 나로서는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감탄하고 반성할 만했다. 요즘 AI가 세상의 모든 언어 장벽을 무너뜨리고 바벨탑을 쌓을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엠마 스톤이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에서도 AI가 통역가를 대신해 텍스트를 토해냈다. 그러나 스튜디오에 근사한 드레스를 입고 참석한 통역가의 해설 없이는 화면에 뜬 텍스트를 온전히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읽는 사람이 텍스트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지를 헤아리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소설 ‘가여운 것들’에는 독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해설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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