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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소매 붉은 끝동》

드라마와는 또 다른 이야기

강미강, 《옷소매 붉은 끝동》, 청어람, 2017



언젠가 도서관 서가를 둘러보다 이 제목을 발견하고는 픽 하고 웃음 지은 일이 있다. 이 책도 있구나. 띄엄띄엄 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드라마를 열심히 봤으니 책까지 읽을 일이야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근 몇 년 만에 제대로 걸린 감기로 주말을 꼼짝없이 누워 있겠다는 예감이 들자 문득 이 책이 떠올랐다. 문 닫을 때를 몇 분 남기고 부랴부랴 도서관으로 향했다. 전에 본 일이 있으니 책을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1, 2권이 나란히 있었지만 같이 빌리는 책도 있으니 1권만 뽑아 들었다. 조갈 든 사람처럼 조바심낼 때는 언제고, 막상 책을 손에 넣고 보니 시큰둥해져 표지 한 장 넘기지 않고 하룻밤을 묵혔다. 주말 아침, 역시 감기 기운으로 몸이 무거웠다. 머리가 지끈대 유난히 성가시게 느껴지는 TV를 끄고 나니 막상 무료했다. 그제야 책을 펼쳤다.

    

옛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쓰인 단어부터 달라 쉬이 이야기에 빨려 들어간다. 낯설고 울림이 예쁜 말들이 많이 나와 메모도 해 가며 차근차근 읽어 나갔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화면에 생각시 시절 궁녀의 저고리 색깔 같은 연분홍빛 필터가 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원작 소설도 다르지 않았다. 드라마는 이산과 이산으로 분한 배우가 큰 사랑을 받았지만 사실은 원작도, 드라마도 사실은 궁녀의 이야기였음을 새삼 깨달았다.  


이야기에 빠질수록 급한 성격이 도졌다. 중간쯤부터는 단어 적던 메모장을 저 멀리 밀어 두고 점점 다섯 줄을 앞서 읽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한 글자, 한 단어 고르고 골랐을 작가의 수고가 헛되겠다며 괜한 죄책감마저 들었다. 읽는 속도에 가속이 붙다 보니 마지막 페이지가 성큼 다가왔다. 괜히 1권만 빌렸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다시 도서관 문 닫을 시간. 한 치 앞을 못 보는 스스로를 탓하며 서둘러 2권을 빌려 왔다.

  

작가 후기의 “지나가는 이야기며 인물들까지 대부분 사료에 근거한 실화입니다”라는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옛일을 다루는 소설을 읽으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픽션인지 따지느라 책과 인터넷을 오가며 분주할 때가 많은데 이 책은 아예 시작부터 픽션이라 여기고 있던 터였다. 아마 작가의 말은 역사 속 기록 한 점, 한 점을 틀림없이 이었다는 말일 것이다. 작가는 탈고 이후에 밝혀져 차마 이야기에 담지 못한 사실과 설정들을 못내 아쉬워하며 후기에 덧붙여 적었다. 그 점이 또 무척 미더웠다.


드라마는 소설 탈고 이후 밝혀진 사실들까지 더해 새로이 각색했다. 가령 이산이 15년 동안 덕임을 짝사랑했다는 내용은 원작에서는 놓쳤지만 드라마에서는 충실히 그려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가 더 사실에 가깝다는 말은 아니다. 중심인물 위주로 원작의 스토리라인을 아예 재편성한 부분도 많다. 그래서 막상 원작과 드라마를 비교하면 이야기는 꽤 다르다. (그 말인즉슨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도 많다.) 이산의 외양도 조금은 차이가 있다. 원작 속 이산은 “키가 몹시 크고 다부진 체격에 얼굴선이 짙”고 “사내답게 억센 턱, 위풍당당하게 뻗은 눈썹,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콧대” 등 훤칠한 호남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아마 드라마 캐스팅을 소설 속에 묘사된 이미지대로 했다면 덕임 앞에서만은 어쩐 일인지 서툴고 뚝딱거리는 ‘숙맥’ 이산의 풋풋한 느낌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산 역의 배우가 지닌 소년미가 원작의 느낌을 잘 재현하지 않았나 싶다. 한편 덕임은 동그란 눈에 개구진 표정의 외양은 물론 궁녀라는 신분에 갇혀 있으면서도 온 힘을 다해 주체적이고자 했던 당찬 속내까지 그냥 덕임, 그 자체.


아보카도에 물을 주면 마치 운동장에서 한참을 뛰놀다 돌아온 아이처럼 꼴깍꼴깍 소리를 내며 받아 마실 때가 있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었더니 아보카도가 꼴깍꼴깍 소리 내며 물을 흡수할 때처럼 마음속에 이야기가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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