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과 선입견, 막연한 환상을 깨주는 웹툰 4선
“배우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우리와 다른 사람의 삶에 들어가 관객에게 그 느낌이 어떤 건지 느끼게 해주는 겁니다. (Actor’s only job is to enter the lives for people who are different from us and let you feel what that feels like.)” – 메릴 스트립
콘텐츠의 역할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재미를 주기 위해,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현실과 다른 판타지를 제공하기 위해, 이입과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등등. 수많은 역할 중 하나는 소비자가 겪어본 적 없는 삶이나 상황을 경험하고, 경험하는 과정에서 얻은 새로운 정보를 통해 이해의 범위를 넓히도록 돕는 일이다.
메릴 스트립이 말한 문장은 비단 연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웹툰에도 작가가 만든 서사와 캐릭터를 통해 소비자가 다른 삶을 느끼도록 돕는 작품이 있다. 내가 몰랐거나, 잘못 알았거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막연하게 상상만 한 삶 또는 상황을 명료하고 또렷하게 보여주는 작품. 우리는 그런 작품을 접한 이후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지는 않을지언정, 적어도 이전에 가지고 있던 선입견에서 벗어나 더 많은 사람을 공감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수도 있다. 미래를 위한 선택을 달리하고, 스스로 알지 못한 취향을 발견하고, 편견과 선입견을 바로잡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변화는 이렇게 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몰랐던 청각장애인의 일상 - <나는 귀머거리다>]
22살에 유럽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바르셀로나에서 며칠 머무는 동안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유럽에는 왜 장애인이 많지?’ 서울에서는 거의 본 적 없는 장애인이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유럽에는 어디에나 있었다. 나중에 친구와 대화하면서 이유를 알게 됐다. 유럽은 관련 인프라가 잘 되어 있어 장애인이 비교적 비장애인과 동일한 수준의 일상생활을 영위하지만 한국은 인프라가 적고 인식 개선도 많이 되지 않은 상태라 장애인이 이동 가능한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살면서 장애인을 본 경험이 손에 꼽는다. 당연히 장애인의 생활을 잘 알지 못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단절된 상황에서 어떻게 차별이 사라질 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나는 귀머거리다>라는 작품을 만났다.
<나는 귀머거리다>는 작가가 자신이 겪은 에피소드를 엮어 청각장애인의 일상을 조명한 작품이다. 작품은 호전적인 자세로 청각장애인을 향한 편견을 타파하지 않는다. 그저 일상툰이 가진 잔잔한 톤으로 작가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보여줄 뿐이다. 생활을 따라가기만 해도 도처에 널린 오해와 편견, 불편함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면 ‘청력에 문제가 있으면 생활하기 불편하겠다’는 생각도 실례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불편함은 존재한다. 청각장애인의 편한 생활을 돕기 위한 제도가 있어도 제도를 원활하게 운영할 인력은 늘 부족하다. 하지만 작가는 생활 속에서 불편함을 마주할 때 반항심이나 우울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기보다 그냥 자기 선에서 해결할 방법을 찾는다. 우리가 최선을 선택하기 힘들 때 아쉽지만 자연스레 차선을 선택하듯 말이다.
<나는 귀머거리다> 같은 작품이 많아지면 좋겠다. 편견과 무지로 덮인 장막을 걷어내어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대상을 명확하게 바라보게 도와주는 작품 말이다. 그래야 동정이나 무시가 아닌 동등한 시선을 가지고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 라일라
플랫폼: 네이버웹툰
[임신과 출산의 민낯 - <아기 낳는 만화>]
‘교과서 대신 써야 하는 만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아기 낳는 만화>의 댓글이다.
임신, 출산, 육아. 다수가 겪는 일임에도 희한하리만치 정보가 없는 독특한 분야이다. 지금은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중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해보면 가정 시간과 보건 시간에 배운 내용이라고는 아이가 생기는 과정(중요한 내용은 다 빠진 간략한 내용만)과 썰기 종류(깍둑썰기, 채썰기 등), 재봉법 등이었다. 배운 내용을 쓸데없다고 폄훼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여성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알아야 할 피임, 월경, 임신, 출산에 관한 내용이 너무 많이 빠지고 축약된 점이 문제다.
<아기낳는만화>는 어떤 환상이나 뭉뚱그림없이 임신과 출산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은 작가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작가가 거듭 강조하듯 모든 임산부가 동일한 경험을 하지는 않는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작품은 자체로 나에게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다양하다 못해 너무 많이 일어나는 신체 변화를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까? 겁을 먹고 누구도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할까 봐 그랬을까? 솔직히 나 역시 작품을 읽다가 너무 많은 변화가 무서워서 임신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 작품이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임신을 포기하게 하기보다 제대로 대비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정확한 정보가 있어야 산모가 참고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주변 사람은 적재적소에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공유되길 바란다.
임신과 출산 과정을 이미 거치고 육아에 돌입한 독자라면 후속작 <아이키우는만화>를 추천한다.
작가: 쇼쇼
플랫폼: 네이버웹툰
[반려동물과 사는 일의 어려움 - <개를 낳았다>]
많은 가정에서 한 번쯤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자녀가 “우리도 강아지 키우자!” 또는 “나도 강아지!!!”라고 말하면 부모는 “너는 잠깐 예뻐하기만 하고 결국 똥 치우고 산책시키면서 반려동물을 돌보는 건 나잖아! 안 돼!”라며 거절한다. 그러면 자녀는 “내가 다 할게!!!”라며 호기롭게 주장한다. 이에 부모는 못 이긴 척 반려동물을 들이거나, 끝끝내 들이지 않는다.
나 역시 어렸을 때 강아지를 키우자고 조른 아이였고, 우리 부모님은 후자였다. 당시에는 반려동물을 돌보기 힘들다고 말하는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안다. 반려동물을 들이는 일은 어디서 인형 하나 사오는 일이 아니라 아이를 입양하는 일과 버금갈 만큼 책임감과 정성이 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웹툰 <개를 낳았다>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데 구체적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 에너지가 들어가는지 보여준다. 작품은 초보견주인 주인공 다나가 ‘명동이’라고 이름붙인 포메라니안 한 마리를 입양하고 키우는 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상황을 보여준다. 반려동물이 아플 때 케어하는 법, 반려동물과 이별을 준비하는 법, 위험 요소가 가득하고 자유로운 공간이 한정된 도시에서 개를 기르는 법 등 초보 견주가 반드시 알아야 할 정보가 가득하다. 단순히 정보 제공에 그치지 않고 다나의 이야기를 통해 정보를 전달하기 때문에 독자는 다나와 명동이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읽는다. <개를 낳았다>는 반려동물과 함께한 과거를 회상하는 독자와, 지금 함께하는 반려동물을 생각하며 읽는 독자, 언젠가 만날 반려동물을 기다리면서 예비 견주로서 준비하는 독자가 모두 만나는 공간이다.
작가: 이선
플랫폼: 네이버웹툰
[BDSM을 향한 편견을 타파한다 - <어차피 인간은 다 변태야>]
지금이야 BDSM이 LGBT처럼 점차 대중에게 익숙한 단어가 되고 있지만, 여전히 BDSM이 무엇의 약어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BDSM은 3가지 성적 취향인 Bondage(구속)-Discipline(훈육), Dominance(지배)-Submission(복종), Sadism(가학)-Masochism(피학)을 가리키는 말이다. LGBT가 성별을 기준으로 한 성적 취향이라면 BDSM은 자발적 수직 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성적 취향이다. SM으로 불리는 성적 취향은 종종 변태 성향이라는 오해와 맞거나 때릴 때 느끼는 모습으로 희화화되어 왔다. <어차피 인간은 다 변태야>는 작가 개인의 경험을 통해 BDSM과 관련된 오해를 바로잡고 정확한 정보를 세세하게 알려준다.
특히 <어차피 인간은 다 변태야>가 인상적인 이유는 SM 성향을 향한 편견과 선입견을 바로잡겠다는 작가의 신념이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도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쉽게 말하는 외부 환경 때문에 수없이 자기 부정과 긍정을 반복한 사람인 만큼, 작가는 작품 내내 독자를 향해 에세머(BDSM 성향자를 가리키는 말)가 잘못되거나 이상한 게 아니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보낸다. 또한 작가는 섣불리 에세머의 성향을 정의하지 않는다. BDSM에는 사디스트-마조히스트, 돔-섭, 브랫-브랫테이머 등 다양한 타입이 존재한다. 작가는 작품에서 자기 취향이 특정 타입을 설명하는 정의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독자 사례를 여러 번 다루는데, 이러한 분류는 좀 더 용이한 소통을 위한 수단일 뿐 모든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어떤 틀에 맞춰 본인을 재단하다가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BDSM과 관련된 기본 내용부터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에세머를 위한 자기 경험 고백까지, BDSM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겠다는 책임감이 느껴지는 BDSM 입문용 가이드북 같은 작품이다.
작가: 장미
플랫폼: 코미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