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써야 하는 이유

환상 극장 10.

by 임이안

차일 거리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말한다면 8년 전 나는 깜짝 놀랄 것이다. 우선 내가 왜 차일 거리에 있는지 궁금해할 거고, 허구의 존재를 어떻게 실제로 조우했는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 사이 슬픔이 쌓이고 쌓이고 스트레스도 쌓이고 쌓여 정신이 이상해졌나 보군, 어쩌면 8년 전의 나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출장을 갔다가 차일 거리에 들렸고 그 애는 내가 오롯이 혼자 있을 때, 주말로 들썩이던 그 거리에서 눈앞에 나타났다.


선물상자처럼 건물 전체가 거대한 네온사인 리본으로 번쩍이는 쇼핑몰 앞에서 키가 크고 긴 헤링본 코트를 입은 그 애가 나를 아는 체했다. 흰 곱슬머리에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그 애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특히 눈동자는 지나치게 밝고 환한 하늘색이라 보고 있으면 어떤 날의 청명한 아침 하늘이 떠올랐다. 그리고 비현실적이었다. 패션 화보에 나올법한 근사한 외모였지만 동시에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알고 보니 사람이 아니었다는 공포물의 결말처럼 기이한 아름다움이었다.


토요일 한 낮은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헤링본 코트는 내 쪽으로 몸을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모르시겠어요?"


커다란 눈동자는 마치 어안렌즈 같았고 거기에 비친 나는 머리가 거대한 외계 생명체 같았다. 대체 헤링본 코트가 누구인지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 애는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건넸다. 펼쳐서 읽으라는 듯 나를 바라보며 손짓을 했다.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그림책이었다.


"저도 이 책 잘 알아요."


나는 먼저 운을 뗐다.


"정말 좋아하는 책이에요. 출근하면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 책부터 펼쳤어요. 정말 좋아하는 장면이 있어서, 여기요."


그 페이지는 소녀가 아파트의 외관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아파트 층마다 다른 삶의 양상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가족이 있는 집, 혼자 사는 집, 강아지 혼자 남겨진 집, 빵을 굽는 집, 텔레비전을 보는 집. 그리고 어쩐지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소리 내어 말하고 하니, 업무를 하기 전 그림책을 봤던 행위가 하나의 신성한 의식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매일 일을 하기 전 의식을 치르고 있었구나. 뭘 그렇게 소망했을까 나는.


"나도 이 책을 알아요. 당신 덕분이죠."


그 사람이 말했다. 그는 내 쪽으로 더 가까이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저 모르겠어요? 기린이에요."


나직하고 성량이 풍부한 목소리가 아주 또렷하게 발음했다.


"당신이 만든 기린."


"기린이요?"


그 사람은 살짝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믿기 힘들었다. 혹시 이 사람이 나를 기만하는 건 아닐까. 이건 신종 사기 수법일까, 극한의 아름다움을 가장해 호감을 산 뒤 신흥 종교를 전도하려는 건 아닐까. 그러나 기린이라는 이름은 참 오랜만이었다.


"기린이라고요?"


기린이라니. 잊힌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내가 쓴 소설 속 주인공, 불안정한 삶을 살다 간 기린에 대한 기억은 더 이상 읽지 않는 책에 책갈피처럼 끼워둔 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맞아요. 당신이 한 편의 이야기를 완성했을 때 깨어났어요. 그전에 나는 당신의 상상력에 존재했죠. 상상을 관장하는 신경세포는 다른 차원의 세계와 연결돼있어요. 나는 그 세계에서 머물렀어요. 바람처럼 부드럽고 형체가 없었죠.


당신이 상상을 활자화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어요. 그곳에선 그저 바람처럼 존재했고, 내가 사는 곳은 당신의 상상이 곧 날씨였어요. 우리는 당신의 상상에 영향을 받았죠. 당신이 그림책을 볼 때 내가 사는 곳에는 눈부신 태양이 떠오르고 다채로운 꽃들이 피어나 장관을 이뤘어요. 물론 폭력적이고 불온한 상상이 지속될 때도 있었지만, 당신의 상상은 대부분 환하고 눈부셨으므로, 당신이 만든 세계의 결말도 궁극적으로는 그러리라 생각했어요.


나는 제대로 된 몸을 갖고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싶었으므로, 당신이 어서 글을 쓰기를 바랐죠. 당신이 그 상상을 활자로 구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이 열렸어요."


나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풀어내는 그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봤다. 반듯한 이마, 공예품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운 두 눈, 위아래 보기 좋게 균형이 잡힌 잘생긴 입술, 어딘지 유약해 보이는 턱. 정말 내가 만든 그 기린이 맞다면, 그는 틀림없이 내 상상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에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호소력이 있었다.


"그러나 당신이 만든 세계에서 기린으로 살아가는 건 너무 힘들었어요. 우리에겐 더 나은 선택을 할 의무가 있어요. 그러나 당신은 그런 여지를 모두 삭제했어요. 당신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괴롭히는 존재이고, 서로를 몹시 미워해요. 못살게 굴고, 괴롭힘을 당하고, 궁극적으로 주인공인 기린을 기댈 곳 하나 없는 인물로 만들었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했죠.

아니, 창문이 없다면 창문을 내주는 게 당신이 할 일 아닌가요? 나는 분노했어요. 그렇게 기대했던 세계는 악몽으로 끝났으니까요."


기린은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지만, 실은 내 뒤편으로 펼쳐진 다른 풍경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는 볼 수 없는 먼 풍경을 응시하던 기린이 다시 나를 똑똑히 바라봤다.


"당신을 반드시 만나야만 했어요. 그래서 그곳을 뛰쳐나와 현실로 나왔죠."


기린의 붉어진 눈가를 마주했다. 기린의 눈과 코는 한참을 울고 난 것처럼 발개져 있었고,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졌다. 얼굴은 얼음같이 차가웠다. 그가 가만히 내 손을 떼어내고 말했다.


"부탁이 있어요. 새로운 이야기를 써주세요. 나는 당신의 상상으로 자라났어요. 내가 암울한 그 세계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당신의 상상 덕분이에요. 풍요로운 상상은 회복탄력성을 심어줬죠.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요. 그 암울한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그저 새로운 이야기가 생성되기를 기다릴 뿐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대체 어떻게 써야 할까? 기린이 원하는 결말은 무엇일까? 나는 기린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아름다운 결말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하기에 너무 각박해진 것 같은데. 그런 상상을 하기에 앞서 나는 너무 많은 우울을 겪었는데. 내가 다시 기린을 눈부신 초원으로 데려다주고 그곳에서 뛰어놀며 삶을 만끽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 사회에서 원하는 것을 찾고 어울리며 환하게 웃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어디선가 젬배 연주 소리가 들려왔고 리드미컬한 음악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리듬에 속도가 붙으면서 사람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잠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 한창 버스킹 무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버스킹은 현실이었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생생한 음악 소리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기린은,


아름다운 기린은 그 사이 사라지고 없었다. 내 손에 쥐어진 그림책 한 권이 기린의 존재를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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