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코트와 상상 세포

환상 극장 9.

by 임이안

아빠 코트를 입고 아빠가 끼던 털장갑 안으로 들어가 단잠을 잤다. 러시아 우화 속 갈색곰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외로움을 피해 털장갑의 포근함에 몸을 의지했다.


구불구불 내가 그린 낙서 같은 어지러운 꿈을 지나 그곳에 도착했다.


지나간 경험들과 떠나보낸 이들은 모두 기후가 온화한 국립공원에 살았다. 저만치 나뭇가지에 앉아 서로의 깃털을 다듬어주는 새들을 보고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했다. 그 애들은 나를 알지 못했다.

한때 나와 관계가 있던 경험들은 땅에서 음식을 이고 가거나 나뭇가지를 모아 댐을 만들거나 나무를 오르거나 하늘을 날거나 새끼를 양육하거나 사냥 중이었고 누구도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강가에서 물을 마시던 하마에게 아빠를 아는지 물었고, 그 애는 아빠에게 춤을 배운 적이 있다고 했다. 악어새의 도움으로 나는 아빠가 산다는 곳으로 향했는데 아빠는 너른 들판에서 춤추는 사람이었다.


아빠 코트를 입고 한때 아빠였던 존재가 자유롭게 추는 춤을 봤다. 아빠는 국립공원에서 스윙 재즈를 췄다. 아빠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는데 코트를 보고 마음에 들어 했다. 일주일 뒤 있을 공연을 위해 북쪽으로 가야 하는데 그곳은 추울 거라 코트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빠는 내게 활짝 핀 해바라기 화단을 주겠다고 했다. 자신이 아끼는 화단이라고도 덧붙였다. 아빠는 스티커를 떼듯 가볍게 해바라기 화단을 들어내 내게 건넸다. 코트는 아빠의 몸에 보기 좋게 맞았고, 내가 잘 어울린다고 말하자 아빠는 생전의 모습처럼 활짝 웃었다.


나는 아빠의 웃음과 해바라기 화단을 얻었다. 화단은 생각보다 가벼웠고 해바라기들 역시 생각보다 웃음이 많아서 그 애들을 안고 걷고 있으니 품 안이 간지러웠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해바라기 화단은 책 한 권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 해바라기 책!


탄성을 질렀다. 그제야 생각났다. 아빠에게 처음으로 선물 받은 책이었지. 덕분에 글을 읽기 전에 내가 제일 먼저 배운 색은 노란색이었다. 해바라기들이 일제히 고개를 반짝 들고 해님을 향해 인사하는 장면은 아름다워서 눈을 감아도 떠올랐다.


돌아와서 아빠의 장갑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 침대를 가져다 놓고 좋아하는 책들도 가져다 놓고 원할 때마다 잠을 잤다. 장갑은 언제든 좋아하는 기억으로 데려다줬다. 그곳에서 영영 잊고 싶지 않은 상대와의 대화나 웃음, 잊고 싶지 않은 풍경이나 음악 등을 가져왔다.


장갑 안은 점점 내가 수집한 기억들로 넘쳐났고 몸집이 커졌다. 나나와 동네를 산책하던 기억을 가져왔던 날, 어두운 동굴 같은 장갑 속에서 독서등을 켜고 책을 읽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다시 구불구불 서툴고 어지러운 낙서 같은 꿈을 지나 너른 초원이 나타났다. 높은 지대에 있는 초원은 사계절 내내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었다.


실크처럼 매끄러운 바람이었다. 바람의 품에서 나는 풀을 뜯었다. 산에서 맹수가 내려와도 나나는 민첩하고 판단력이 빨라서 우리를 금세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석양이 지면 나나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융단 카펫 위에서 담요를 덮고 대화를 했다. 도란도란 물 흐르듯 재잘재잘 즐거운 소통이 이어졌다. 나나와 노랗게 잘 익은 고구마를 나눠 먹고 하하호호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눴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양이었다. 나나가 아무 판단 없이 잣대 없이 내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고 핥아주며 공감해줬으므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양이었다.


그리고 잠에서 깼을 때, 여전히 장갑 안이었다.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장갑 입구 틈새로 아빠 코트를 입은 현실의 내가 서 있었다. 출근 준비를 하는 그 애에게 실은 꿈에서 코트를 해바라기 화단과 맞바꾼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상념이 너무 많아서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듯 보였다. 그 애는 너무 바쁘고 외부의 소리에만 귀 기울이며 사는 것처럼 보였다. 바쁘게 살다 쉽게 녹초가 되고 주말에는 넉다운이 되듯 잠만 청하는 그 애에게 나는 아빠가 스윙 재즈를 추는 공연에 참석하는 꿈을 선물했다.


그 애가 꿈을 꿀 때 아빠의 장갑 안에서 해바라기 책을 읽었다. 나는 그 애의 상상 세포다. 오래전 그 애가 그림을 그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올라 그 애의 수호천사처럼 살았다. 그러나 지난 몇 년 간 그 애도 나도 힘겨운 나날이 이어졌다. 그 애가 더 이상 상상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사는 세계는 이내 황무지가 되고 척박한 땅이 되었다. 한때 무한한 상상으로 콸콸 쏟아지던 폭포나 비옥한 땅에서 눈부시게 자라나던 꽃과 나무들도 모두 말라버렸다. 나는 황폐한 대지를 떠났다. 과거의 경험들이 사는 온화한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 기억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상하는 법을 이미 잊은 듯 보이는 그 애가 적어도 모든 것을 망각하지 않기를 바라며, 감사하고 따뜻한 기억을 잊지 않도록 꿈을 선물한다.


내 노력이 헛되지 않다면 언젠가 그 애는 오래된 상자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해바라기 책을 발견할 거고, 발견을 시작으로 상상을 시작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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