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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연 Aug 15. 2023

자식보다 자신을

『잃어버린 사랑』, <로스트 도터>


얼마 전 남편과 아이가 1박 2일 캠프를 다녀왔다. 그 캠프의 목표 중 하나가 ‘엄마 없이’ 아빠와 아이들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었기에 자연히 난 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 그 일정에 관해 들었을 때,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했다. 아, 아이가 태어나고 세 번째로 함께 하지 않는 저녁이 생기는구나. 첫 번째는 첫 돌이 막 지났을 무렵의 이사 때 아이는 부모님 댁에서 잤다. 두 번째는 나만 친구들과 지척의 타 도시로 여행을 다녀왔던 하룻밤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그 얼마 전이었다. 더구나 이 세 번째의 저녁은 온전히 나 혼자였다. 이삿짐 정리를 함께 하던 남편도, 여행을 함께 갔던 친구들도 없었다. 완연히 홀로 있다는 전생 같던 그 감각.


니나: 애들이 없으니까 어떻던가요?

레다: 너무 좋았어요.

<로스트 도터>(2021) 중에서


[니나] “아이들이 없으니 기분이 어땠어?”

[레다] “좋았어. 마치 온몸이 산산조각 나서 충만함에 가득 차 자유롭게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가는 것 같았어.”

『잃어버린 사랑』, 214


아이가 없던 그 저녁에 대해 나는 레다를 경유해 대답할 수 있다. 너무 좋았다고. 거창한 계획을 준비한 것도 아니었다. 그날 저녁 나는 그저 집에 혼자 있었다. 책을 읽다가 텔레비전을 조금 보다가 배가 많이 고플 즈음에야 김밥을 사 와서 먹었다. 해야 할 일도 해줘야 할 일도 없었다. 끼니때를 맞춰 밥을 차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유롭던 저녁과 다음날 오전이었다. 하지만 그 자유로움 속에서 스멀스멀 깨어있는 감각. 내가 느긋하게 집을 만끽하던 그날 아이는 부재하는 방식으로 우리 집을 여느 때와 같이 뛰어다녔다, 그러니까 내 머릿속에서. 밥이 모자라지는 않았을까? 모기에 물리지는 않았을까? 잠자리에는 들었을까?  


『숭배와 혐오』의 저자 재클린 로즈(Jacqueline Rose)는 어머니들의 몰역사적이었던 위치와 모성에 대한 억압들을 면밀히 살피기 위해 주로 오늘날의 서구 사회의 구체적 현실과 그리스극에서부터 현대 문학작품들 그리고 저자 자신이나 친구의 일화까지를 오가며 ‘모성이라는 신화’를 파헤쳤다. 로즈는 한 장을 ‘엘레나 페란테’(Elena Ferrante)에 할애한다. 그에 따르면 페란테는 21세기 유럽에 등장한 가장 중요한 문학적 현상이고, 페란테의 작품 속에서 모성의 형상화는 그 무엇과도 다르며, 현대 어머니가 봉착한 난제의 정곡을 찌른다. 1999년 첫 작품을 출간한 이래 비틀린 엄마를 줄곧 그려온 페란테의 ‘나쁜 사랑 3부작’ 중 세 번째 권인 『잃어버린 사랑』(La figlia oscura, 2006; 김지우 옮김, 한길사, 2019)이 <로스트 도터>로 영화화되었다. 할리우드의 배우 매기 질렌할이 감독을 맡았고, 유수의 영화제에서 찬사를 받았다.



<로스트 도터>는 『잃어버린 사랑』과 거의 다르지 않다. 아주 충실히 각색되었고, 탁월한 캐스팅에다 배우들의 연기도 모두 훌륭하다. 두 작품 중 무얼 먼저 봐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차이가 근소하다. 등장인물들이 이탈리아인에서 영국인으로 바뀌며 이름과 배경이 달라졌고, 이야기의 큰 틀에 벗어나지 않는 정도로의 사건 순서가 약간 재배치되었을 뿐이다(이하 본 글은 소설의 설정을 따른다). 주인공은 마흔여덟의 대학 교수 레다다. 쾌청한 날씨의 푸른 바다로 휴가를 왔다. 레다는 휴양지에 머물며 시끄러운 대가족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특히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구성원들 중 니나와 엘레나라는 모녀다. 젊은 엄마인 니나는 외양도 아름답지만 “오직 딸만 바라보고 사는” “어머니로서 뭔가 특별한 면”(25)이 레다의 이목을 끈다. 가족들이 한 눈을 판 사이 엘레나가 없어지고, 레다가 아이를 찾아주며 그가 대가족과 안면을 튼다.


『잃어버린 사랑』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건 ‘바라보는 레다’를 우리가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레다는 계속 니나와 그 가족을 “관람의 대상”(158)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관람 중에 자신과 어머니의 기억을, 자신과 딸들의 기억을 지속적으로 개입시킨다. 니나의 어린 딸인 엘레나가 분신처럼 여기는 인형 ‘나니’를 보며 레다 자신이 어머니에게 받았던 인형을 떠올리는 식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레다가 자신의 인형을 딸에게 주며 발생했던 비극적인 일화까지로 이어진다. 소설을 주의 깊게 읽다 보면 휴양지의 목가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 시작에서부터 레다의 감정이 안도와 불안 사이를 요동치게 진동하고 있음을 포착할 수 있다. 피서지에서의 술렁임은 시끄럽고 다소 경박한 니나네 대가족을 레다가 ‘보고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레다 자신이 그들을 통해 자신을, 자신의 지난날을 보는 까닭에서다.


휴양지의 느긋함을 깨는 건 실제로도 레다다. 그는 니나네 가족에게 엘레나를 찾아주지만 동시에 방치되어 있던 엘레나의 인형을 훔친다. 인형이 사라지자 엘레나는 투정을 부리고 짜증을 내며 온 가족을 시달리게 한다. 그들은 모두 혈안이 되어 인형을 찾고 전단지도 붙이고 나눠준다. 레다는 전단지를 받고도, 니나가 머무는 별장 앞까지 가서도, 니나의 시누이와 한담을 나누는 와중에도 인형을 되돌려줄 기회를 번번이 놓친다, 아니면 놓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레다는 왜 아이의 인형을 훔쳤을까? 레다 자신이 이에 뾰족하게 답하지 못하는 대신, 우린 문장들 속에서 그 구실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넌지시 말한다. “인형은 니나와 엘레나의 사랑을 품고 있었다. 그들 모녀의 서로에 대한 열정과 구속력을 품고 있었다. 인형은 평온한 모성의 눈부신 증거였다”(109).


페란테가 그려낸 모성의 형상이 남다른 한 가지 이유를 『잃어버린 사랑』에서 찾자면 아이를 버리고 떠난 엄마가 레다라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딸들이 각각 여섯 살과 네 살일 무렵 떠났다가 3년 만에 돌아왔던 적이 있다. 레다는 그 당시를 “살기 위해 도망”(122)쳤다고 술회한다. 명민한 대학원생이었던 이십 대 시절 잦은 출장으로 바쁘던 남편 대신 홀로 육아를 감당했던 레다는 한 저명한 교수에게 인정을 받은 후 집을 나간다. “딸들 곁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151)고 못 박은 것처럼 결코 아이들을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휴양지에 이르게 된 작중 시점에까지 그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영화 속에서 레다와 그의 어머니의 관계는 암시적으로만 제시되지만) 또 다른 죄책감으로 레다를 죄이는데, 그의 어머니가 유년 시절 종종 말로는 떠나겠다고 소리쳐놓고 정작 집을 나간 적이 없었지만 자신은 마음속으로만 되뇌던 가출을 아이들과의 제대로 된 작별인사 없이 감행해 버렸다는 데서 온다.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아이들을 떠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신화화된 모성 이데올로기에서 의문일 수조차 없다.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그래서는 안 되는 당위나 의무에서다. 하지만 『잃어버린 사랑』의 대답은 다르다. 훔쳐온 인형을 가지고 놀면서 레다는 말한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결국 엄마 놀이를 하고 있는 딸일 뿐이다”(227). 누군가에게 섬뜩할 이 말은, 언제든 그 놀이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다는 긍정과 호소가 있다. 레다가 자신의 딸들에게 요구했지만 아직 가닿지 못한 이 호소는 과거 자신의 가출에 대해 “엄마라는 역할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봐달라”(144)는 것이다. 레다가 해변의 도착에서부터 니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건, 단순히 니나의 모성에 대한 탄복과 자신의 죄책감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스스로를 엄마라는 역할과 대가족 그리고 가부장제 안에서 분리하지 못하는 니나에게서 자신이 겪었던 같은 피로감을 보였기 때문일 테다.


문두의 대화로 돌아가자. 아이들을 보지 않았던 때가 어땠냐고 묻고 난 후 니나는 레다에게 집요하게 질문한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사라지냐고. 니나는 그 감정이 지나간다는 대답을 원했을지 모르지만 레다는 그렇게 대답해 줄 수 없다. 그는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저 사라지거나 지나가버리는 것은 없다는 것을. 자신은 어떻게든 과거와 결별하려 세심하게 인생의 궤도를 그려왔지만 그것들은 끈덕지게 남고 흔적이 되었거나 되살아난다. 니나의 대가족을 보며 레다는 그가 그토록 빠져나오고 싶었던 어머니와 친척들을 떠올린다. 그의 말투에 여전히 남아있는 고향의 사투리를 딸들은 여전히 놀린다. 니나와 엘레나와 그들의 인형을 보며 레다는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과 자신의 딸을 떠올린다. 유년시절과 이십 대 시절의 혼란스럽던 감정이 되살아난다.


페란테가 그려낸 모성의 형상이 남다른 또 다른 이유가 문두의 대화에 있다. 니나가 딸들에게 돌아간 이유를 묻는 데서다. 레다는 답한다. “내가 창조할 수 있는 것 가운데 딸들과 견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야”(215). 역시 엄마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씁쓸한 결론에 아직 고개를 절레절레하기엔 이르다. 페란테는 그렇게 뻔한 이야기를 그리지 않는다. 레다가 이어간다. “내가 딸들에게 돌아간 이유는 내가 딸들을 떠났던 이유와 똑같아. 나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야”(215). 레다가 딸들에게 돌아간 이유는 결국 자신 때문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있지 않는 나보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나를 내가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남편과 캠프를 갔던 날, 나는 내가 아이를 정말 사랑한다고 느꼈다. 내가 느긋하고 편안할 때 진정으로 그 감정이 더욱 벅차올랐다. 홀로 가만히 있을 때 아이에 대한 생각으로 더 풍요로웠다. 『잃어버린 사랑』이 알려주듯, 자‘식’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엄마가 있다. 엄마들은 자주 잊는다. 사람들도 자주 잊는다. 그래도 엄마는 엄마의 역할보다 자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고 그래야 더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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