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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서영 Apr 28. 2019

'어른들'이 보는 '아이돌이 사는 세상'

SBS 스페셜 <아이돌이 사는 세상>을 보고

SBS 스페셜 <아이돌이 사는 세상> (2018.10.28 방영)


슈퍼주니어의 뮤직비디오와 함께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고, 소녀시대와 빅뱅의 데뷔를 지켜봤으며 샤이니를 ‘덕질’하면서 학창 시절을 보내왔지만 요즘에는 아이돌 노래를 거의 듣지 않는다. 그럼에도 TV 프로그램이 끝나면 나오는 아이돌의 뮤직비디오를 보게 되고, 음원차트에 오른 아이돌의 최신 유행곡을 길거리에서 듣게 된다. 한국사람 중 아이돌을 한 번도 소비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좋든 싫든, 팬이든 그냥 무관심한 대중이든 우리는 아이돌의 비주얼과 퍼포먼스와 노래를 소비하게 된다. 다큐멘터리 <아이돌이 사는 세상>은 그런 아이돌의 이야기를 화려한 면만 보는 대중의 시선이 아닌 그 세상을 직접 경험한 아이돌의 시선으로 그려내겠다고 표방한다. 그 시선에 걸맞게 다큐멘터리의 대부분 내용은 과거에 아이돌로 활동했던 ‘선배 아이돌’들의 인터뷰로 채워진다. 그럼에도 의문이 생긴다. 정말 본 다큐멘터리는 아이돌 당사자의 시선으로 아이돌의 문제를 그려내고 있는가? 우리는 이 다큐멘터리의 시선으로 아이돌 문제를 바라봐도 정말 괜찮은가?

 



다큐멘터리 <아이돌이 사는 세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레이션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대부분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선배 아이돌들의 인터뷰이지만, 그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고 각색하여 전달해주는 것은 ‘자상하고 나긋나긋한’ 남자 목소리의 내레이션이다. 누구를 청자로 설정한 것인가? 내레이션의 초반 부분에서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드러난다.


“화려한 무대에 눈이 부셔 핑크빛 미래에 가슴이 설레 아이들이 혹시 놓치고 있는 건 없을까.”


내레이션이 향하는 청자는 ‘아이들’이다. 즉 아이돌을 지망하는 아이들에게 무대 위의 화려한 모습뿐만 아니라 무대가 끝난 뒤의 어두운 모습도 보여주겠다는 의도이다. 그 길을 먼저 가본 선배들의 입을 빌려 ‘무대에서 내려온 이들이 말하는 진짜 세상’을 들려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다분히 기성세대적 시선이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에 등장하는 수많은 선배 아이돌들은 결국 ‘아이들’을 향한 제작진의 ‘스피커’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청자를 확실히 설정한 다큐멘터리는 물 흐르듯 진행된다. 달샤벳 수빈, 앰블랙 천둥, 씨야 남규리, HOT 토니, 카라 허영지, 애프터스쿨 리지, 스텔라 가영 등 반가운 얼굴들을 보여주며 그들의 이야기를 제작진의 시선으로 풀어낸다. 그들은 대부분 아이돌 활동이 끝난 후의 상실감과 함께 또래와 다른 인생 시차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아이돌을 한 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고, 좋은 추억이었다고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아이돌을 할 건가요?"


이때 모든 아이돌에게 하나같이 주어지는 질문은 ‘다시 태어나도 아이돌을 할 건가요?’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다루는 방식이 재밌다. 카라로 활동했던 허영지는 유독 이 질문에 흔쾌히 답을 하지 못 한다. 그러자 제작진이 이렇게 말한다.


“다른 질문들은 다 괜찮다고 했어요. 이 질문에만 망설이는 건, 그 시간이 다 온전히 괜찮지는 않았다는 것 아니에요?”


본 다큐멘터리는 제작진이 개입하는 이 장면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인터뷰이에게 원했던 답까지 같이 끌어내 보여준다.


“그렇죠. 다시 태어나도 이렇게 빨리 사회생활을 시작할까요? 그 생각을 먼저 해요.”


"다시 태어나도 아이돌을 할 건가요?"란 질문에 망설이는 카라 허영지, 스텔라 가영




결국 ‘아이들’을 걱정하는 기성세대의 시선으로 이 다큐멘터리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많은 아이돌이 데뷔해서 활동을 하느라 사회생활을 너무 빨리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잃는 게 많으니 ‘아이돌을 하는’ 선택은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제작진의 의도는 바로 뒤이어 나오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선배 아이돌의 인터뷰만을 나열해서 보여줬던 다큐멘터리는 잠시 아이돌을 지망하는 학생과 그 부모의 인터뷰로 장면이 전환된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상정하고 있는 청자인 ‘아이들’을 직접 인터뷰한 장면인 것이다. 인터뷰에서는 춤과 노래 연습을 하느라 시험공부와 대학을 포기하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의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들이 비친다. 나름대로의 꿈을 위해 경중을 구분하며 노력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내레이션을 통해 ‘세상의 무게를 아직 가늠할 수 없는 아이들’로 각색된다. 뒤이어 안무가의 입을 빌려 ‘너무 일찍 사회에 뛰어들면 아이들이 기계가 되어버리는 느낌’이라고 덧붙인다.


다큐멘터리 <아이돌이 사는 세상>에서는 아이돌 문제에 대해 ‘그 선택의 무게를 알지 못 한 채 너무 이른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해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오직 기성세대의 시선에서 아이돌의 문제를 그려냈기에 가능한 결론이다. 당사자의 시선을 배제한 문제 제시는 그 문제의 본질적이고 총체적인 부분을 비추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 큰 심각성을 갖는다. 아이돌 지망생의 시선과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현직 아이돌의 시선을 배제하여 진짜 ‘아이들’의 문제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아이돌을 지망하는 이유를 그저 ‘화려한 무대에 눈이 부셔 핑크빛 미래에 가슴이 설레’ 서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수많은 아이들이 아이돌이 되기로 결심하고, 그 숫자가 늘어날수록 데뷔가 좌절되고 성공하지 못해 절망하는 아이들이 많아지는 현실을 아이돌의 화려한 부분에 눈이 먼 아이들의 멋모르는 치기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열심히 공부해서 적당히 좋은 대학을 가서 괜찮은 곳에 취업하고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사는 ‘정상궤도’의 삶이 매우 버거워진 것이 지금의 ‘아이들’ 앞에 놓인 현실이다. 열심히 공부해 나름대로 잘 살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기성세대의 삶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아이돌이라는 직업은 본 다큐멘터리에서 그리고 있듯 데뷔해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희박해 미래가 매우 불확실한 직업이지만, 다른 선택지 또한 지금의 아이들에게 확실한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성공한 아이돌이 누리는 사회적 명성과 경제적 부는 다른 직업으로는 꿈꾸기 힘들다. 수많은 아이돌 지망생들 중 일부는 지금의 현실에서 나름대로의 ‘대안’으로서 아이돌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외면한 채 아이돌 지망생들에게 그저 ‘아이돌의 화려한 부분만 보면 안 된다’고 조언을 하는 것은 ‘어른들의 모순’이다.


아이돌의 문제는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아이돌이 되기를 꿈꾸는 지망생들이나, 아이돌로서 성공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실패한 아이돌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본 다큐멘터리는 ‘무대가 끝나고...’라는 부제를 통해 무대 위의 아이돌의 문제는 다루지 않았다. 아직 무대가 끝나지 않은 채 성공한 아이돌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그들에게도 분명히 어두운 면이 존재한다. 노래 실력 혹은 퍼포먼스를 내세웠던 과거의 가수들과 달리 아이돌은 기획사에 의해 철저히 모든 면에서 상품화된다. 일정한 노래 실력과 퍼포먼스 수준은 기본이며 ‘아이돌다운’ 얼굴과 몸매, 더 나아가 ‘개념’까지 가득 찬 도덕적인 면모까지 갖춰야 아이돌 시장에서 잘 팔리는 상품이 될 수 있다. 상품화가 잘 된 아이돌 중 일부는 크게 성공한다. 그러나 그들은 성공한 후에도 끝없이 대중들의 검열에 시달린다. 실수로 멤버들끼리 나눈 가벼운 욕설이 방송이 돼 대중들에게 ‘아이돌답지 못하다’라는 비난을 받거나, 누군가와 연애를 한다는 이유로 ‘초심을 잃었다’라는 평가를 받는 일들이 흔하다. 그런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은 아이돌이라 하더라도 ‘예쁘고 깜찍한 개념돌’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끝없이 자기 검열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다큐멘터리 <아이돌이 사는 세상>은 무대가 끝난 뒤의 세상만을 비춤으로써 무대 위에서 고통받고 있는 아이돌의 문제는 외면했다.





본 다큐멘터리는 <SBS 스페셜>의 프로그램 중 하나다. <SBS 스페셜>은 그 기획의도에 대해 ‘제작자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화두가 분명한 다큐’라고 제시하고 있다. 이 기획의도처럼 다큐멘터리는 현실의 소재를 통해 결국 PD가 세상을 향해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수단일지도 모른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하여 다큐멘터리의 역할을 하지 못 한다고 비판할 수는 없다. 소설이든 영화이든, 심지어 현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라 할지라도 결국 우리는 작가, 감독, PD에 의해 재현된 현실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제작자는 현실의 선택적 반영을 통해 화두를 던지는 일에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누군가는 제작자에 의해 선택적으로 재현된 그 현실이 진짜 리얼리티라고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아이돌이 사는 세상>은 바로 이 책임감이 부족했다. 아이돌의 세상을 단지 기성세대의 시선에서만 그려냄으로써 아이돌이 선망받는 사회적 분위기와 구조를 양산해 낸 기성세대의 책임을 지워버렸다. 자신들의 책임은 외면한 채 아이들을 그저 안쓰럽게 바라보는 다소 폭력적인 기성세대의 시선은 ‘어른들의 따뜻한 걱정’으로 미화되었다. 한 때 아이돌을 ‘오빠’라 부르며 ‘덕질’을 했던 팬으로서, 아이돌이 연루된 가십 기사를 한 번쯤 클릭하고 댓글을 보았던 네티즌으로서, 아이돌의 노래는 듣지 않으면서 뮤직비디오와 가요 프로그램은 소비했던 대중으로서 우리 모두는 아이돌 문제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을 통감하며 우리는 이 다큐멘터리의 시선에 저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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