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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서영 Feb 20. 2019

'Him too'를 외치는 당신에게

'Me too'와 'Him too'의 대결은 성립하는가

재작년 이슈가 되었던 한샘 성폭행 사건은 자신이 당한 성폭행 피해 사실을 매우 상세하게 적어놓은 여직원의 커뮤니티 글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 그 글의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매우 자세하고 구체적인 피해 사실 묘사는 읽는 사람이 분노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씩씩거리는 나와 달리 똑같은 글을 읽은 당시 남자 친구의 반응은 매우 차분했다. 그는 이성적인 어조로 “근데 요즘은 워낙 무고죄 피해가 많기 때문에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래도 이게 사실이라면 진짜 안타깝네”라는 말도 덧붙였다. 


언제나 성범죄 피해에 노출될 수 있는 여자인 나와 언제나 ‘무고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남자인 그가 느끼는 두려움의 종류가 달랐기 때문이었던 것일까. 어쨌든 그는 성범죄 피해자보다 무고죄 피해자에게 더 감정이입을 하였고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공감은 혹시나 무고죄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전제한 후에야 이루어졌다. 이것은 지극히 평범한 남성 개인이 하나의 성범죄 피해 폭로를 바라본 시각이었다.


그렇다면 이를 더 큰 범위로 확대하면 어떨까. 우리 사회의 대다수의 남성들은 미투 (me too) 운동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남성 중심적인 검사 사회에서 간부 검사의 성추행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의 용기로 시작된 한국의 미투 운동은 다수의 남성들에게도 환영을 받았다. 연이어 폭로된 조재현, 조민기 등 남자 연예인들에 대한 미투도 환영받았다. 검사라는 직책을 걸고 방송에까지 나와 피해 사실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의 진정성과 조재현, 조민기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수많은 연기 전공 학생들의 증언은 매우 신뢰할 만했기 때문이다. 이 일련의 미투에서 무고죄라고 의심 받을 구석은 없었다. 


그러나 비공개 사진회에서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한 양예원 씨의 미투는 환영을 받지 못했다. 사진회를 주최한 실장과 양예원 씨가 나눈 카톡 대화가 공개되며 양예원 씨가 자발적으로 돈이 필요해서 사진회를 갔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미 거짓말을 한 번 한 피해자의 증언은 더 이상 신빙성이 없다. 다수의 남성들에게 그 피해자는 무고한 실장을 성범죄자로 몰고 간 ‘꽃뱀’ 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많은 남성들은 양예원 씨의 미투가 미투 운동의 본질을 흐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무고죄 처벌 강화’를 바로 이 훼손된 미투 운동의 본질을 살리는 제도적 장치로 내세웠다. 한샘 여직원에게 바로 공감하지 못 한 전 남자 친구처럼 많은 남성들이 무고죄 처벌 강화를 전제로 한 후에야 미투 운동에 공감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얘기하는 ‘미투 운동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무고한 사람 없이 ‘정말 나쁜 남자’만 제대로 처벌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미투 운동을 시작한 이유는 그저 나쁜 남자가 처벌을 받게 하려고 함이 아니다.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면 가해자 개인을 고소하고 법적 판결을 기다리면 될 일인데 굳이 많은 여성들이 ‘나도 그랬다’며 미투 운동을 하는 이유는 기존의 남성 중심의 사회, 제도, 법체계에서는 말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폭로하며 피해자들 간의 연대를 통해 그 체제 자체를 바꾸고자 하는 의도이다. 


즉 미투 운동의 진정한 본질은 가해자 개개인에 대한 폭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던 젠더 권력에 대한 폭로, 그리고 그 권력을 양산한 문화에 대한 폭로에 있다. 양예원 씨의 미투 운동 또한 가해자인 실장 개인에 대한 폭로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암암리에 성행하고 있던 ‘비공개 사진회’의 젠더 위계 문화에 대한 폭로는 성공했다. 이렇게 미투 운동 자체가 젠더 권력에 대한 사회적 저항에서 파생된 것임에도 ‘그들만의’ 미투 운동의 본질을 규정하며 무고죄를 운운하는 것은 제도 밖의 미투 운동을 다시 남성 중심적인 사회 체제 안으로 끌고 들어오려는 잘못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정작 미투 운동의 진정한 본질이 내포하는 사회의 젠더 권력관계와 그 권력관계에서 자신들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은 채, 그저 ‘억울한 개인’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을 주 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미투 운동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억울한 개인’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오해를 받은 ‘무고한 남성’들은 어떻게 되는가? ‘꽃뱀’에게 잘 못 걸려 성폭행으로 고소당해 경찰에 출두하던 연예인 이진욱의 그 당당했던 눈빛을 기억한다. 그의 당당한 눈빛은 그의 기사와 관련해 ‘꽃뱀을 무고죄로 맞고소해버려라’라는 댓글이 가득했던 사회적 지지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었다. 무고하게 성범죄 고소를 당했다면, 그들에게는 무고죄 맞고소로 ‘복수’할 힘이 있으며 그 복수를 도와주는 사회적 지지가 있다. 


그렇다면 성범죄 피해 여성들은 어떻게 되는가? 가해 남성의 처벌을 위해 피해 여성이 겪는 과정은 ‘복수 게임’이 아니며 매우 지지부진한 싸움이다. 그들은 ‘너도 좋아서 하지 않았냐, 꽃뱀 아니냐’라는 수많은 2차 가해를 받으며, 특히나 사실 관계를 입증하기 어려운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어떤 이들은 이 느리고 힘든 싸움을 애시당초 포기하고 평생 피해 사실을 숨기며 살아가기도 한다. 


과연 누가 ‘억울한 개인’인가? 남성이 우위에 있는 권력관계가 지배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여성의 미투 운동은 남성에게 위협을 가하는 무기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그 무기에 대한 방패로서 무고죄 처벌 강화를 요구하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당신의 바람과 달리, ‘Me too’와 ‘Him too’의 대결은 성립하지 않는다. 성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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