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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나 Sep 12. 2018

동화로 쓰는 생애사 6.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 – 여섯 번째 이야기  (6월 19일)

오늘은 은혜 씨가 오기를 기대하며 수업을 들어갔다. 모두들 똑같이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5분 전에 오는 사람은 혜은 씨와 재민 씨, 제 시간에 맞춰 오는 사람은 기현 씨다. 아직까지는 이 순서가 바뀐 적 없다. 다른 학우들은 언제 오는지, 내가 15분 전에 도착해도 교실에 와 있다. 날씨가 무더워지기 시작했다. 더러 손수건을 챙겨오는 학우도 있다. 


학우들이 앉아서 관장님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보다. 

“관장님으로써 좋아하는거야.”라는 얘기가 나왔다. 수정 씨였다. 지난 주 미술선생님과 이번 수업은 친구소개하기를 주제로 잡았다. 수업 전날 미술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친구 소개가 좋은데 이 교실 안에서 같이 생애사쓰기 수업을 하는 친구들을 서로 소개하면 어떻겠냐는 말이었다. 서로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거고 그에 따라 다른 기법을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좋은 생각이라고 수긍했다. 수업준비를 하며 이런 저런 고민을 했을 미술선생님을 떠올렸다. 내가 꽤 나이를 먹은 축에 든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미술선생님의 전화를 받으며 선생님의 성의가 느껴지는 동시에 젊은 사람이 기특하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런 생각은 분명 언젠가 꼰대질로 나타날 것이다. 말을 조심할 게 아니라 생각을 조심해야 할 일이다. 나이 먹은 사람이라는 티를 내는 건 누군가를 하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수업에 참여하는 학우들을 대하는 자세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나보다 나이 어린 친구들이라서 이들에게 반말을 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을까. 나는 노심초사한다. 


강사는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강사는 수강생의 능력을 최대치로 이끌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앞에 서서 내 주장과 생각을 전파하는 것은 다소 폭력적인 면이 있으니까. 정해진 교과과정이 없는 수업일수록 조심스러워야 마땅하다. 내가 하는 말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내가 딛고 선 얼음판이 깨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학우들에게 이 교실에 있는 사람들을 서로 소개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다들 좋다고 대답했다. 누구를 소개하고 싶냐고 물으면서 한 사람씩 돌아가며 얘기했다. 수영 씨는 기현 씨를, 수정 씨는 재민 씨를, 승민 씨는 동선 씨를, 채영 씨는 혜은언니를, 혜은 씨는 채영 씨를, 서로 교차해가며 지정했는데 채영 씨에 대해서 쓰겠다는 사람이 세 명이나 나왔다. 아마 채영 씨가 제일 인기가 좋은 모양이다. 채영 씨는 피부가 흰 편이고 예쁜 얼굴이다. 몸매가 갸날픈 편인데 아주 밝게 웃는다. 늘 생글생글 웃고 있다. 


발달장애나 자폐인 경우 예민한 면이 있기 때문에 특정지점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특히 피부접촉에 대해 예민하거나 특정한 소리, 주파수에 날카롭게 반응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감정기복이 있고 난처한 상황이 잦을 수밖에 없다. 나 역시도 그런 기질을 가지고 있다. 수년전 발달장애 엄마들의 생애사 쓰기를 지도할 때 발달장애와 자폐에 대한 자료를 여럿 찾아보았을 때 특정한 섬유의 질감이나 시각적인 패턴, 특정한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는 정보를 얻었다. 말하자면 익숙하지 않은 낯선 것에 대해 대응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까다롭다는 것이다. 나 역시 특정 섬유의 질감에 예민한 편이다. 나는 면 섬유가 아닌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편이라 대부분의 옷이 면으로 되어 있다. 나일론이나 린넨이 섞인 옷을 입기 시작한 건 얼마 안되었다. 속옷부터 겉옷까지 100% 면은 아니더라도 면의 느낌이 나는 재질을 선호한다. 반짝거리는 장식이 달린 것도 기피한다. 그저 그런 게 불편할 뿐이다. 어지간해서는 바꾸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발달장애인은 특정한 주파수나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명제를 다시 생각했다. 손톱이 칠판에 긁히는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도 특정 주파수를 가진 소리를 소름끼치게 싫어한다. 아주 높고 앙칼진 사람의 목소리도 싫다. 그 정도가 다를 뿐이지 낯선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장애의 정도와 무관하지 않을까. 

발달장애인의 범주에 묶이지 않는 사람들도 특정한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기피하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 낯선 환경에 놓이는 것은 누구나 당황할 수 있는 일이다. 그에 대한 대처능력이 조금씩 다를 뿐. 받아들인다는 것의 정도 차이일 뿐이다. 


발달장애인이 스트레스가 많을 것이다, 라는 선입견은 이런 데서 기인한다.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 반응을 참지 않고 대부분 드러내기 때문이다. 비장애인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말도록 훈련을 받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감추고자 하는 것 뿐. 그리고 뒤돌아서 다른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지난 주에도 약간 느꼈던 건데, 청춘이다 보니, 학우들도 연애에 대한 욕망이 느껴진다. 누가 누구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이미 어느 정도 드러났다. 글을 쓰면서 서로간에 찌릿한 느낌들이 오고 갔다. 그 모습이 재미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는데, 아마 재미있고 불안한 것 그 자체가 연애의 시작이 아닐까. 발달장애라는 이유로 어린아이 취급을 받지만, 이미 몸은 다 성장한 상태고 남녀간의 애정도 느낄 수 있다. 때로 발달장애인중에도 성적 정체성으로 혼란을 겪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러브라인이 형성되는 걸 관찰하며 혼자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누군가 “복지관에서는 연애하면 안돼.”라고 말했다. 

나는 누가 그런 소리를 하드냐고 물었다. 학우들은 어떤 선생님이 그렇게 말을 했다고 전했다. 연애, 라는 단어가 나오자 다들 까르르 웃었다. 내가 해법을 가지고 있을 리 없다. 나는 왜 안될까요? 라고 물었지만, “몰라요. 복지관에서는 안된대요.” 라는 채영 씨의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성에 대해 정확히 알기 전에 성행위에 대해서 눈을 떠버리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비장애인들이 고약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할 수도 있다. 지적장애여성을 유린했다는 뉴스가 터질 때마다 장애인 딸을 둔 부모들은 어떤 심정일지 상상하기 어렵다. 이창동의 영화 오아시스를 생각했다. 오래전 영화라, 문소리가 맡은 역할의 주인공이 단순한 뇌성마비일 뿐인지 지적장애도 동반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장애인의 성문제와 연애 문제는 어디서 누가 풀어나가고 있을까? 성인이 된 장애인들의 성문제는 억압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하나?

생각해보면 이들은 스무살이 넘었는데, 아직 클럽도 가보지 못했을 거 아닌가. 학우들이 술은 마실까? 아닐 것 같다. 발달장애인은 “정신연령이 낮다”고 말하는 건 정당한가 생각해봤다. 역시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교실 안의 친구에 대해 써본 뒤에는 미술수업을 위해서 자기 앞에 있는 사람에 대해 소개하는 글도 더 적어봤다. 학우들 중 자폐성향이 강한 사람은 타인을 소개하는 글을 적는 것이 어려움을 겪었다. 예상한 일이다. 하지만 대부분 애정을 듬뿍 담아 친구를 소개했다. 



1 .★ 제 친구 이름은 정기현입니다. 그리고 나이는 24세입니다. 기현이의 성격은 바람직합니다. 여자친구를 좋아하는 최기현은 고기, 잡채, 북어국을 좋아하죠. 기현이는 정말 노래할 때와 운동할 때가 행복합니다. 


수영 씨가 쓴 소개글이다. 여기서 여자친구란 걸그룹을 말한다. 친구의 식성을 기억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바람직하다는 표현이 특별해서 오래 들여다보았다. 바람직하다, 바람직한 성격이라는 건 어떤 것일까. 


2.★  제 친구 이름은 최승민입니다. 승민이의 성격은 남에게 배려하면서 사랑고백을 많이 합니다. 승민이는 에이핑크를 좋아합니다. 성게알, 생선을 좋아합니다. 승민이는 노래를 아주 잘합니다. 춤도 아주 잘 춘다. 


수영 씨가 한 장 더 적은 승민 씨에 대한 소개글이다. 사랑고백을 한다는 건 “사랑해요” 라는 말을 자주 한다는 걸 말한다. 성게알을 좋아한다니, 승민 씨는 미식가인 모양이다. 존댓말어미를 쓰다가 반말어미를 쓰는 건 비장애인들도 흔히 하는 실수다. 이런 건 별로 중요치 않다.


3. ★ 내 친구 이름은 박수정입니다. 나이는 24입니다. 그리고 수정이 누나에 매력은 귀엽고 애교있는 누나이고 성격은 수줍음이 많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가수 정기고와 씨스타 소유를 좋아하며 선생님들과 관장님을 좋아합니다. 누나에 대한 행복할 때는 저에게 제 물건 챙겨주는 것과 멋지다 듬직하다면서 좋은 말로 해주고 문자 하는 것을 행복해하고 좋아합니다. 누나한테 하고 싶은 것은 물건 챙겨주고 문자는 항상 고백하는 하트 문자는 마음만으로도 좋으니까 너무 많이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물건 챙겨주고 관심 가져주어서 고마워. 


이건 동완 씨의 글이다. 비교적 수월하게 이 정도 문장을 쓸 줄 안다. 어법과 문법이 안 맞는 부분이 있지만, 나는 아직 이들의 글을 쉽게 찍찍 긋고 고치지 못하겠다. 나 아니더라도, 항상 어디선가 지적받고 질책받는 일상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 마라, 떠들지 마라, 소리 내지 마라. 그러는 거 아니다, 먹어라, 먹지 마라. 매일 그런 일상을 산다는 건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 장애인이라서 불편한 것보다, 그저 누군가에게 늘 지청구를 들어야 한다는 게만으로도 힘든 일이다. 동완 씨는 다른 여자친구들이 호감을 표현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나보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해서 혼자 몰래 웃었다. 


4.★  내 친구 은혜누나를 소개합니다. 은혜 누나는 글씨를 잘 씁니다. 은혜 누나는 복지관 카페에서 만났습니다. 은혜 누나는 커피를 잘 만듭니다. 은혜 누나는 녹차라떼 홍차라떼 자몽에이드 카페라떼를 좋아합니다. 은혜 누나는 일도 잘하고 저랑 말도 같이 해줍니다. 은혜 누나는 26살입니다. 


기현씨의 글이다. 은혜 씨는 글씨가 정말 네모반듯하다. 특별한 글씨체를 갖고 있다. 내 수업에 들어오는 이들은 대부분 바리스타이다. 아직 이들이 만들어 준 커피를 못 마셔봤다. 기현 씨가 이 글은 쉽게 썼다. 매번 나에게 확인하며 쓰던 사람인데, 은혜 누나를 소개하는 글은 하나씩 특징을 적으면 되니까 쉬웠는가보다. 


5. ★ 내 친구는 김채영입니다. 나이는 24살입니다. 채영이의 매력은 예뻐요. 성격은 귀엽습니다. 채영이는 피자빵을 좋아해요. 채영이가 놀아줄 때 행복해요. 


의사소통이 안되는 재민 씨의 마음을 하나씩 선택지를 놓고 봉사선생님이 적은 것이다. 성격이 귀엽다니, 이건 선택지를 잘못 만들어준 것이다. 봉사선생님도 글쓰기를 배워야겠다. 


6. ★ 내 친구는 민혜은입니다. 31살이고요. 많이 착하고 영원한 사람 핑클 가요 부르고 난 뒤에는 떡볶이를 먹고 나서 스트레스 확 풀릴때까지 기분이 많이 좋아하고 난 뒤에는 안양병목안수리산산림욕장에서 춤을 신나게 추니까요 기분이 많이 행복해진 것 같아 보였어요. 

★ 기현이는 복지관 1층 카페에서 바리스타 근무 하고 나서 기현이는 커피샷도 뽑고 난 뒤에는 커피샷도 내릴 때까지 먼저 커피와 음료수를 만드니까요 딴 사람 앞에서 커피와 음료수 주문을 하고 나서 기현이는 기분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은혜씨의 글이다. 이번 글에서는 글이 끝날 때만 마침표를 찍는다는 걸 발견했다. 문장이 끝나지 않고 하나의 이야기를 한 문장에 다 담는다. 여행을 갔던 글을 썼을 때는 문장을 끊었는데 이번에는 길게 한 문장으로 썼다. 


7. ★ 내 친구 우재민을 소개합니다. 재민이 오빠는 25살이고 성격은 멋있고 착한 게 매력입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음식은 치킨입니다. 재민이오빠와 5월에 만화카페에 간 적이 있었는데 재밌었고 시간이 된다면 또 놀러가고 싶어요. 


내 친구 민혜은을 소개합니다. 나이는 31살이고 성격은 좋고 착한 게 매력입니다. 혜은이 언니가 좋아하는 것은 방긋방긋 웃는 것입니다. 그리고 혜은이 언니는 먹을 때 기분이 좋아진답니다. 그리고 혜은이언니와 복지관에서 피자와 치킨을 먹었는데 매우 맛있어서 기분이 좋았고 무척 행복했습니다. 


채영 씨의 글을 자원봉사선생님이 받아쓴 것이다. 


8. ★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이름 우재민오빠. 나이 24살, 성격 착하고 부드러운 남자다. 좋아하는 것은 동료들하고 대화를 하고 여자도 좋아한다. ♡ 고재민 오빠는 웃는 여자를 좋아하고 머리 긴 여자를 좋아한다. 그리고 모든 여자 중에 잘 웃는 여자. 나를 좋아하지만 비밀로 하자. 재민오빠 지금은 동료로 지내자. ♡


수정 씨는 이 글을 쓰는 내내 쑥쓰러워했다. 재민 씨는 의사소통이 안되는데 눈빛으로 많은 감정이 오갔던 모양이다. 수정 씨도 재민 씨에 대해 호감이 있는 것 같다. 지금은 동료로 지내자는 문장을 보니 “복지관에서 연애하면 안돼요.”라는 말이 떠올랐다. 


9. ★ 동갑이자 친구 이동선. 나이는 23살이고 성격은 착하고 또 상남자이다. 좋아하는 것은 대화 좋아하고. 친절하고 멋진 남자. 부드러운 카리스마. 농담을 받아주고 좋은 친구. 승민이를 좋아하고 부드러운 친구이다. 여자아이돌을 좋아한다. 특히 여자친구를 좋아한다. 동선이와 농담을 주고 받고 놀았다. 매력은 부드러운 동선이다. 사랑해. 잡앤조이 동갑 여자. 


승민 씨는 하트를 몇 개 그려넣었다. 승민 씨가 동선 씨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동선 씨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지금까지는 동선 씨가 튕기고 있다. 문자도 자주 보낸다고 한다. 이 글을 쓸 때 동선 씨에게 이름의 한자를 물어봤다. 내가 다시 받아 써서 포스트잇에 적어 주었다. 승민 씨는 정성을 들여 동선 씨의 한자 이름을 종이에 적었다. 승민 씨의 사랑해나 하트는 흔히 쓰는 것이라 단지 그것 때문에 동선 씨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고 해석하긴 어렵다. 수영 씨에 대해 쓴 글에도 똑같이 하트와 사랑해, 라는 말이 들어 있다. 


★ 이름 오수영 언니. 25살이고. 수영 언니는 아나운서 좋아하고, 기타를 치고, 노래도 잘한다. 고음도 소화를 잘한다. 성격은 인사도 잘한다. 취미. 최기현 좋아하고, 배려심 언니다. 예쁘다. 여신님이다. 아름다운 었다! 사랑해 언니. 최고이었다. 아름아운 었다. 나랑은 착하고 친구 잘 챙기고 예쁘다. 착하고 언니다. 힘내 고백이다. 러브. 잡앤조이 동료다. 사랑해. 


승민 씨는 문장을 완성하는 것이 온전하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쓴다. 맞춤법을 잘 모르는 것도 있고 모르는 글자도 많아서 항상 나에게 물어본다. 내가 포스트잇에 또박또박 적어주면 아, 맞다, 하고 웃으며 열심히 적는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얼마나 정성을 들이는지 볼 때마다 숙연해진다. 


10.★  김채영, 스무세살, 성격 착하다. 기분이 좋아서 행복해.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자, 채영아 사랑해, 놀러가고 있는 중이야, 채영아, 예쁘다고, 제주도 비행기 탔어요. 산으로 갔어요. 사진 예쁘게 잘 찍었어요, 기분이 좋아서 설거지 깨끗이 예쁘게 잘해 이채영. 


이건 혜은 씨의 글인데, 말할 때와 글이 똑같다. 혜은 씨는 자폐 성향이 강한 사람이다. 감정기복도 많아서 힘들어 할 때가 많다. 아침에 울지 않은 날은 수업시간에 와서 꼭 그 얘기를 해주는데, 이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나보다. 글을 쓰다가 울기도 했다. 


★ 김수빈 선생님 회색 옷 바지 얼굴 눈 쌍커풀 있어요 코, 손 반지 있어요 여행가는 거 만화카페 커피 마시고 성경책 성격 말씀 혜은이 엄마한테 발신 통화해요 엄마 혜은이 엄마. 혜은이 아빠한테 수신통화해서 아빠, 혜은이 아빠. 잠언말씀. 혜은이 엄마한테 수신통화해서 엄마 혜은이 아빠한테 발신통화해요 아빠 엄마 아빠 혜은이 엄마한테 발신통화해요 혜은이 아빠한테 통화하고.


김수빈 선생님은 혜은 씨 앞에 앉아 있던 자원봉사선생님이다. 선생님을 그리기 전에 글을 써본 것인데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울면 안돼 혜은이 울면 안돼 울어도 해야 해 울지 말아야 해 참아야 해 라고 계속 뇌까렸다. 혜은 씨의 글에는 늘 저 부분이 들어간다. 혜은이 엄마한테 수신통화해서 엄마 혜은이 아빠한테 발신통화하고. 이 부분. 때로는 혜은이 아빠한테 수신통화하고, 엄마한테 발신통화해요. 라는 문장이 들어가기도 한다. 혜은 씨는 불안감이 많아보인다. 불안할 때마다 엄마와 아빠에게 전화를 하는 것 같다. 서른 한 살이다. 성인이 된 지 10년이 넘었다는 말이다. 무서운 것도 많고 두렵고 불안한 것도 많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꾹꾹 눌러닦으며 열심히 글을 썼다. 울면 안돼, 참아야 해. 라는 말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미술 선생님은 글을 기반으로 자기 앞에 앉은 사람을 그려보는 수업을 했다. 펜을 한 번도 안 떼고 그리는 것이다. 다들 훌륭하게 해냈다. 나도 옆에 앉아서 해봤는데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모두들 친구에게 사랑을 담아 그렸다. 적어도 이 교실에서는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평화로웠다.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학우들을 보니 꿈속에 들어앉은 느낌이었다. 물론 전날의 숙취가 덜 가신 탓도 있었지만. 이 시간이 끝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며 나도 그림을 따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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