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뚝이샘 Sep 04. 2024

공감 능력이 없는 건, 아들이 아니라 나였다

우리 엄마가 나를 기다리고 걱정할 거에요. 전화해주세요. 


아이 학교 보건실에서 전화가 왔다. 

사정은 이러했다.  

아이가 오전에 코피가 나서 왔는데

방과 후에도 코피가 나서 보건실에 다시 왔다고. 

완전히 멈추고 보내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쌤이 솜으로 코피 막긴 했는데 또 터질 수 있어서, 완전히 멈추고 가자.  20분 정도 보건실에 이따가 가"

라고 하셨다고. 


그런데 우리 아들이 

"여기 20분 있어야 되면, 우리 엄마가 저를 기다리고 걱정할 거에요. 집에 전화해주세요."

라고 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고 

별로 특별날 것 없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선생님을 통해 전해들은 아들 녀석이 한 말에 

나는 한참동안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가슴이 벅찼다. 



엄마가 걱정할 거라고, 

엄마 마음을 헤아려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엄마가 기다릴까봐 

선생님께 전화를 부탁하다니






3년전, 우리 아들이 1학년 때 

나는 매일같이 교문 앞에서 하염없이 아이를 기다렸다.

하교 시간에 맞추어 썰물처럼 아이들이 빠져나가는데

유독 이 녀석만 나오질 않았다.

걱정되는 마음에 학교에 들어가보고 싶어도 

코로나때라 학교 출입이 엄격히 제한 되어서 

나는 교문 앞에서 발만 동동 거렸다. 


어떤 날은 30분, 

어떤 날은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나서야 천천히 나왔다. 

알림장을 늦게 써서, 

친구랑 놀다가 

이유는 다양했는데

공통적으로 엄마를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이 녀석에게 없었다. 

나는 그게 서운했다. 

속으로 '어쩜 이렇게 공감을 못하나.' 되뇌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아들의 마음이 되어볼 수 있었다. 

내가 워킹맘으로 분초를 쪼개쓰며 바쁘게 살던 때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할 시절이 떠올랐다. 

어린이집에서 제일 늦게까지 있는 아이였을 때 말이다. 


하루 이틀, 한달 두달이 아니라 몇년간

아이의 유아기 내내 

아들은 엄마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나는 아들에게 딱히 미안하지 않았다.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니까. 

어린이집이 나쁜 환경도 아니었고 

엄마가 교사로 아이들 가르치는 일 또한 잘못된 게 없었으니까. 

아들이 "왤케 늦게 와?"라고 할 때마다

"엄마 일하잖아. 빨리 온거야 이게." 라는 답을 돌려줬다. 

그게 서운했을테다.


내가 아이를 교문앞에서 기다린 것보다 훨씬 더 긴 시간, 

아이가 나를 기다렸다.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에서, 집에서.

공감능력이 없는 건, 아들이 아니라 나였다. 








그 뒤로는 

아들의 마음을 많이 헤아려보려고 했고 

궁금해하려고 했던 것 같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무언가를 해주기보다 

함께하는 즐거움과 기쁨을 주려고 했다. 


그런데, 항상 아들도 나에게 돌려주었다.

내가 헤아려준 그 헤아림으로 아들이 내 마음을 헤아려주었고 

내가 궁금해할 때면 늘 아들 역시 나를 궁금해했다. 

함께하는 즐거움과 기쁨을 주려고 했는데, 

내가 즐겁고 내가 기뻤다. 

사랑을 주려고 했는데, 내가 더 많이 받았다.  

오늘도 그렇다. 



아들이 집에 오면 꼭 안아줘야겠다. 

엄마가 걱정할 거라는 거, 엄마 마음을 알아줘서 고맙다고 말해야겠다. 

그럼 또 무심하게 

"알았어. 나 밖에서 놀다와도 되지?" 

라며 가방만 놓고 나가겠지?


주는 사랑은 없다. 늘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아이에게는 더더욱 그런 것 같다. 

공감도 사랑도 아이를 키우며 배워간다. 

엄마 되길 잘했다. 








작가의 이전글 아들 육아의 끝은 어디? 사리 생성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