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의 '타임리 코믹스'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한 만화 회사는, 1961년 '마블 코믹스'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이들은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그 문제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현실적이지만, 용기와 능력을 가진 특별한 캐릭터들을 만들어 내려고 했다.
1940년도에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면서 미국의 국민들이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때, 당시의 타임리 코믹스였던 이 회사는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를 만듦으로써, 미국의 국민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전쟁의 두려움으로부터 이겨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또한, 인종차별과 사회적 소수자의 대한 사회적 인식이 커질 시기에, '스파이더맨'과 '엑스맨' 등의 캐릭터들을 만들어냈고, 기술발전과 전쟁 무기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아이언맨'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등, 사회의 주요 이슈들을 만화라는 가상의 세계에 대입하고, 특별한 캐릭터들의 능력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과 희망의 태마를 끊임없이 제시해 왔다.
이렇게 다양한 시대 상황들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활용해 오락적인 재미까지 선사해 온 마블 코믹스는 7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마블 코믹스의 만화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마블 스튜디오' 제작사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라는 하나의 세계관을 구축한 뒤, 2008년 '아이언맨'부터 2022년 '블랙팬서 : 와칸다 포에버'(이하 '블랙팬서 2')까지, 총 30편의 장편 영화들을 만들어내면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들은 몇십 년간 이어져온 원작 만화의 스토리와 캐릭터들을 활용하여 현대적인 재해석과 함께, 캐릭터들의 현실적인 고뇌까지 잘 다뤄내면서, 영화적 재미를 선사해 줬다.
하지만, 지난 3년간 마블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그전 10여 년 과는 사뭇 달랐다. 영화 한 편을 관람하고 나면, '다음에 나올 이야기는 무슨 내용일까?',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식의 기대감이 컸던 반면, 최근에는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다음에 나올 영화가 기대되지 않는다.'는 등의 아쉬움의 목소리가 컸다.
'어벤져스 : 앤드게임'(이하 '어벤져스 4') 이후에 개봉한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과 '스파이더맨 : 노 웨이홈'의 경우에는 스파이더맨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물을 보여줬지만,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과 '이터널스'처럼 첫 솔로 무비인 영화들은 물론, '블랙 위도우'와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이하 '닥터 스트레인지 2'), '토르 : 러브 앤 썬더', '블랙팬서 2'처럼 팬들에게 익숙한 캐릭터들의 시퀄 영화들 마저, 흥행 성적과는 무관하게, 영화의 내용적인 부분에서 만큼은 팬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아쉬운 결과들을 보여줬다.
마블의 10년에 걸친 '인피니티 사가' 속에서도 분명 아쉬운 영화들은 몇몇 존재했다. 그럼에도 마블은 그 영화들 까지 품고서 세계관을 확장해 나갔다. 대부분의 관객들도 지난 10년 동안 마블의 아쉬운 영화들을 봐왔지만, 마블의 미래를 기대하며 다음을 기다렸다. 그럼에도, 최근 2~3년간 관객들이 느끼는 이 '아쉬움'은 이전과는 달리 더 명확해지고, 더 확실해졌다.
글을 쓰고 있는 '나'역시, 영화를 좋아하고, 마블을 좋아하는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근래 개봉한 마블 영화들을 관람하며 많은 아쉬움을 느껴왔다. 정말 만족했어야 '괜찮았다.'였고, 그 외에는 '아쉽다.'가 대부분이었었다.
'어벤져스 4'까지 느껴온 감정과 '블랙 위도우'부터 느끼게 된 감정의 차이는 무엇 때문에 생겨난 것일까. 14년간 마블은 무엇을 해왔고, 또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다음에 나올 이야기는 어떤 내용일까?'에서 '다음에 나올 영화가 기대되지 않는다.'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글에서는 한때 마블의 영화만을 기다려 왔던 내가 이제는 그 기대감 마저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을 생각하며 떠올린 몇 가지 생각들을 적어볼까 한다.
매인 캐릭터들의 퇴장
'어벤져스 4'에서는 프랜차이즈 영화가 선보일 수 있는 극한의 연출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의 인물들과 만나고, 자신의 억눌렸던 감정을 해소한 뒤, '어셈블'을 외치며 모두가 한 곳에 모였다. 스크린에서 펼쳐진 양쪽 진영의 세력 싸움은 스케일과 테크닉을 과시하며 볼거리를 제공했고, 10년 동안 이어져온 거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면서, 한 세대의 퇴장을 보여줬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첫 번째 요인은 '매인 캐릭터들의 퇴장'이다. 장기간의 '시리즈물'이라면, 당연하게도 기존의 인물이 후대의 인물들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고 뒤로 물러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세대교체는 영화뿐만이 아닌 드라마와 만화에서도 볼 수 있는 요소이고,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러나, 시리즈물에 익숙해진 대중도 그 흐름이 발생하는 것을 인지하고, 적응하려고 하지만,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내가 좋아하던 캐릭터가, 주인공이, 시간이 지나면서 퇴장하고, 그의 자식, 그의 제자가 해당 시리즈의 주연으로 자리 잡게 됐을 때, 그 캐릭터에게 어색함을 느끼고, 거부감을 느끼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길게는 10년, 짧게는 몇 년에 걸쳐 익숙해지고 친숙해진 캐릭터들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와 닮은꼴에 다른 인물이 그의 행동을 표방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지난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손을 놓게 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스타워즈' 시리즈 역시 비슷한 흐름을 가졌다. '스타워즈 : 새로운 희망'(1977)을 시작으로, '스타워즈 : 시스의 복수'(2005)까지, 총 6편의 이야기로 시리즈를 마무리 지었으나, 10년 뒤인'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2015) (이하 '스타워즈 7')가 개봉하면서, 새로운 캐릭터, 새로운 배경 설정이 덧붙여진, 시리즈의 확장을 시도했다.
하지만, 새로운 주인공인 '레이'를 필두로, '핀'과 '카일로 렌'이라는 새로운 캐릭터들이 대거 출연함에 따라, 과거의 주인공들이었던, '루크 스카이워커'와 '한 솔로', '레아 스카이워커'는 조연으로서 잠시나마 주인공의 스승으로 등장한 뒤, 조용히 퇴장하고 말았다. 그렇게, '스타워즈 7'이 개봉하면서 다시 한번 스타워즈의 부활을 꿈꿔온 팬들의 기대는, 점점 개연성을 잃은 설정과 스토리의 추가와 더불어, 다소 급하게 마무리된 주인공의 서사로 인해 크게 떨어지게 됐다.
마블의 영화들도 이것과 비슷하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캡틴 아메리카'와 '토르', 그리고 '블랙위도우'와 '호크아이'를 통해 마블의 이야기들을 보고 들어왔을 것이다. 10년의 시간 동안, 그들을 주축으로 마블의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그들의 심리적 갈등에 공감하고, 그들의 액션에 열광해 왔다. 그랬던 이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면서 생기는 공백과 아쉬움은 세대교체라는 명분으로 새로운 캐릭터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할지라도, 과거의 감정을 느끼지는 못할 거란 얘기다.
'토니 스타크'를 대신해 '리리 윌리엄스'가 '아이언맨'이 된다 하더라도, '스티브 로저스'를 대신해 '샘 윌슨'이 '캡틴 아메리카'가 된다 할지라도, '클린트 바튼'을 대신해 '케이트 비숍'이 '호크아이'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원년 멤버에게 느꼈던 감정을 상기시키며 후대의 인물들에게 까지 그 감정을 이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콘텐츠량의 급증
두 번째 요인은, '콘텐츠량의 급증'이다. 마블은 현재 세대교체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세대교체로 인해서 다뤄야 할 이야기들도 많이 지고, 새롭게 등장할 캐릭터들의 수도 늘어나다 보니, 지금과 같은 속도로 모든 이야기들과 모든 캐릭터들의 영화들을 하나씩 만들게 된다면, 소모되는 시간과 비용이 점차 커지게 될 것이다. 게다가, 마블은 이제 '멀티버스'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다양한 세계관을 넘나들수 있게 됐고, '판타스틱 4'와 '엑스맨'의 판권을 소유했던 '20세기 폭스'(현재, 20세기 스튜디오)가 '디즈니'로 인수되면서, 언제든지 자신들이 원하는 캐릭터들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됐다.
그렇기에 더욱더 영화라는 콘텐츠 하나만을 가지고서 과거처럼 10년, 20년을 이어가기란 무리가 있다. 이에 대해 마블은 영화와 함께 드라마와 애니메이션까지 활용하여 세계관을 확장하는 방법을 선택했고, 그 수단으로 현재 많은 이들이 이용하고 있는 'OTT(Over The Top)'플랫폼을 통해 작품을 공개하고 있다.
이처럼 OTT를 활용하여 콘텐츠를 확장하는 방식은 영상 산업에 있어 많은 이점을 가진다. 시리즈물에 경우에는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설명과 이야기의 설정이 추가가 되면서 그 흐름이 길어지기 때문에, 서로 다른 분야의 콘텐츠로 새로운 설정들에 대한 이야기를 분산해서 제작한다면, 세계관 확장을 보다 쉽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의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들을 여러 가지 콘텐츠로 제작하게 된다면, 해당 시리즈에 대한 마니아층이 아닌 이들에게는 오히려 부담감이 될 수 있다.
현재 마블은 영화는 영화대로,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개별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 드라마 시리즈였던 '데어데블', '제시카 존슨', '디팬더스', '에이전트 오브 쉴드'의 경우에는 우리가 봐온 마블 스튜디오의 시리즈 영화들과는 연계가 되지 않았기에, 영화와 드라마를 별개로서 즐길 수 있었다면, 현재의 마블 영화들과 드라마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세계관을 확장하고 있으며, 영화 속 캐릭터가 드라마에 등장하기도 하고, 드라마 속 캐릭터가 영화에 등장하기까지 한다.
과거에는 마블의 영화들 중 한편을 놓치게 될 경우, 후반 영화들의 내용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제는 영화와 더불어 드라마까지 추가되면서, 마블을 즐기기 위해 봐야 할 콘텐츠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말았다. 결국, 이렇게 늘어나버린 콘텐츠들은 영화를 즐기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고, 이는 오로지 오락으로서 영화를 소비했던 대중에게 있어 크나큰 부담감으로 작용하게 됐다.
급격한 세계관 확장
세 번째 요인은, '급격한 세계관 확장'이다. 지난 10년간 마블은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어벤져스 4'에 이르기까지 '인피니티 스톤'을 차지하려는 외부 세력과의 전쟁을 다룬 인피니티 사가를 만들어왔다.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영웅들 간의 크고 작은 대립과 개개인의 인간적인 고뇌까지 담아내는 등, 인간에서 외계인으로, 지구에서 우주로, 물리적 전투에서 마법에 이르기까지, 마블은 10년 동안 이야기와 설정의 폭을 서서히 넓혀 왔다. 그 과정에서 각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이 생기고, 스토리에 대한 이해와 몰입이 쌓여감에 따라, '어벤져스 4'에 이르렀을 때 생기는 시너지는 엄청난 효과를 일으키며 대단원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다.
그러나 드라마 '로키'가 시작하면서, 그동안의 MCU가 보여온 모든 고난과 역경이 단 한 편의 에피소드로 인해 모두 단편화되고 말았다. 또한, 영화 '이터널스'에서는 우주의 탄생과 소멸을 관장하는 '셀레스티얼'이란 신적인 존재가 등장했고, '닥터스트레인지 2'에서는 멀티버스 간의 충돌을 뜻하는 '인커전'이란 설정이 추가되면서, 마블의 이야기가 더더욱 복잡해지고, 난해해지기 시작했다.
위에서 말했듯이 마블은 멀티버스라는 개념을 도입시켜 세계관을 확장하고 있다. 이로 인해 지금껏 본 적 없는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하게 됐고, 복잡한 개념의 설정들이 추가되면서,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들이 연출되고 있다.
이제는 오락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과학적, 판타지적 이야기들이 증가됨에 따라, 그동안 대중이 봐온 다양한 설정의 영화들과 비교되고, 겹쳐 보이면서 이에 대한 거부감이 점차 커지게 됐고, 콘텐츠량의 증가와 더불어 영화를 즐기기 위해 알아야 할 정보들이 점점 많아지고, 또 복잡해짐에 따라, 대중이 마블을 선택하는 것에 주저하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익숙함에서 느껴지는 낯섦
애정하던 캐릭터들의 퇴장, 너무나도 많아진 콘텐츠의 량, 이제는 받아들이기 힘든 난해한 설정들까지. 그동안 대중이 즐겼던 마블의 이미지들이 점점 사라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내가 잘 알던 가게의 익숙한 분위기, 내가 알던 가게 주인의 미소, 내가 알던 음식의 맛은 이제 시간이 흐르면서 변해가고, 점점 옅어져만 가는 시간이 됐다. 이제는 시대가 요구하는 흐름에 적응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어벤져스'의 흥행 뒤로, 타 회사들도 대규모의 팀업 무비들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영화와 드라마, 애니메이션, 예능 등 장르를 불문하고, 이제는 어디에서나 멀티버스라는 설정을 볼 수 있게 됐다. 우리는 단지 '마블'을 통해 이것들을 처음 접했을 뿐이지만, 시대의 흐름이 마치 마블을 따르는 것처럼 줄줄이 그 흐름을 타고 이용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대중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멀티버스의 세상에 살게 됐고, 언제 어디서든 멀티버스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걸 볼 수 있게 됐다.
변화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낯섦은 시간을 들여 자주 접해야만 서서히 익숙함으로 변하게 된다. 우리가 처음으로 마블을 보게 됐을 때 느꼈던 낯섦도, 10년 동안 보게 되면서 익숙해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느꼈던 지난 3년 동안의 낯섦은 앞으로의 7년 뒤에 우리가 느낄 익숙함을 위한 준비 단계일 수도 있다.
마블은 시대에 흐름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마블은 하나의 산업으로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다 다양하게 변조하고, 시도하고 있다. 대중은 그 흐름을 알고 있음에도, '마블'에게서 만큼은 그 이야기를 벌써 듣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올해 2월에 개봉하는 '앤트맨 : 퀀텀 마니아'부터 또다시 마블은 더 거대한 세계를 보여줄 것이고, 그 시점부터 앞으로의 5년 10년은, 과거 우리가 '인피니티 사가'에서 느꼈던 그 감정을 불러일으킬 또 다른 이야기들을 펼쳐 보일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10년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우리는 또다시 예고편을 보면서 마블의 영화에 대해 기대를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실망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마블은 계속해서 그 변화에 도전할 것이다. 익숙함이 낯섦이 되고, 그 낯섦이 다시 익숙함이 되는 흐름은 언제나처럼 계속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선택만 하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