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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Oct 01. 2019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기적처럼 세상에 알려진 그녀의 이야기



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


여섯 개의 단어로 사람들을 헤밍웨이의 짧은 소설이다. 예술은 이처럼 한순간에 우리의 내면을 파고 들어온다. 얼마 전에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도 그랬다. 사진 속의 흑인 아이는 길바닥에서 무릎을 꿇은  백인 아이의 구두를 닦아주고 있다.  사진이 왠지 모를 묘한 울림을 주는  아마  둘이 다른 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이는 깨끗한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구두를 내밀고, 다른  아이는 지저분한 차림을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또래의 구두를 닦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은 작가의 시선이기에,  사진을 찍은 비비안 마이어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인터넷 검색을 하던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의 존재를 알았다.  말루프라는 역사학자가 시카고의 과거 사진을 구하던  우연히 비비안의 사진을 발견하고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유모였던 비비안은 여러 집에 기거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말루프는 훌쩍 커버린  아이들을 찾아 비비안의 과거 행적을 찾는다.

  그녀는 아이들을 집에서만 돌보지 않고 자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목에는 언제나 롤라이 플렉스가 걸려 있었다. 아이들은 기억한다. 어떨  자신들을 잊어버릴 정도로 사진을 찍는 행위에 몰두했던 그녀를.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바라보는 이마저 무례하다 생각할 만큼, 그녀는 피사체의 눈앞에 다가가 셔터를 눌렀다.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라면 상대의 기분이나 상태는 안중에 없는 듯했다. 자신이 돌보던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해 길거리에 누워 앰뷸런스를 기다리고 있는 순간에도 카메라를 들었을 정도였다. 누군가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놀라거나 경멸했을지 모르지만 예술가에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비안은 밝은  뒤에 어두운 면이 극명하게 존재하는 인간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녀에게  상처가 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지 않고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돌보고 있던 아이에게 선물을 주겠다며  도살장에 데리고  적나라한 동물의 죽음을 보여준다던가, 아이가 길거리에서 떼를 쓴다는 이유로 그냥 버리고 가는 행동은 유모로서 이해받기 힘든 태도였다. 밥을 먹지 않는 아이에게 화가  그녀는 바닥에 아이를 눕히고 밥을 입에 잔뜩 욱여넣은  목을 조르기도 했다. 영화는 뒤로 갈수록 이런 그녀의 이중적인 면을 보여준다.

  그녀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수집에 강박이 있었다. 자신의 방에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타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는데, 어쩌다 그녀의 방에 들어간  주인은 경악을 했다고 한다. 어느 길로 걸어 다니는지 알만큼  길만 빼고 방의 모든 곳이 신문으로 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렇게 쌓아둔 신문 때문에 아래층 천장이 가라앉을 정도였다고 하니 무얼 상상하든  이상인 듯하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강박적인 수집 병은  훗날  말루프가 그녀를 추적하는데  도움을   보면 삶이란   아이러니하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말한다.  말루프가 그녀의 과거를 캐고  그것을 영화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은 사실을 죽은 비비안이 안다면 무척 질색할 것이라고. 그녀는 때에 따라 이름의 스펠링을 다르게  정도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민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끝내 부치지 못하고 보관하던  장의 편지 속에는 고향 사진관 아저씨에게 자신의 작품으로 함께 사업할 것을 제안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분명 비비안은 자신이 찍은 사진의 가치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세상에 내보여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  미래에 스타가 되어 있는 자신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뜻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말년에 그녀와 한동네에 살았던 마을 사람들은 쓰레기통 속에서  옷을 줍던 그녀가 사실은 예술가였다는 것에 무척 놀란다. 그녀도, 마을 사람들도, 아무도 예측할  없는 것이 삶이란 녀석이었다.

  나는 그녀가 되어 시카고의 거리를 걸어본다. 나의 시선은 서로를 바라보는 노부부의 다정한 눈빛에 머무른다. 투명하리만큼 맑은 어린아이의 눈동자에도 다가간다. 그것은 내가 꿈꾸고 열망하는 세상이다. 동경하는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나의 눈길은 거리에 누워있는 부랑자들, 아픈 이들, 슬픈 사람들에게  자주 머문다. 그건 아마  외로움이 그들의 것과 같은 색이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철저히 혼자인 사람이기에 그들이 풍기는 짙은 고독의 냄새를 지나치지 못하는 것이다.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던 나는 발을 움직인다. 마음의 거리만큼 가까이 그들에게 다가간다.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누른다.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당신들의 존재가 주인공이라고 카메라의 셔터로 말을 건다.  직접 그들에게 빵을 건네줄 수도, 눈물을 닦아줄 수도, 안아줄 수도 없지만 하나의 필름 속에 그들의 영혼을 가득 담아 온기를 실어   있다. 그것이 내가 나를 위로하는 방식이고, 내가 세상을,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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