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가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여덟 해를 보냈다. 부활절을 한 달 남긴 9살 어느 가을날에 우리 가족은 신시가지 쪽 허름한 아파트로 집을 옮겼다. 예전에 내가 살던 곳과는 차로 30분, 걸어서는 아마 두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친구들과 멀어지는 것도 싫었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다니던 교회에 갈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슬픔이었다. 이삿짐 트럭을 타고 가면서 창밖에 보이는 길을 머릿속에 넣으려 애를 썼다.
교회에서는 부활절 준비가 한창이었다. 초등부에서 몇 명을 뽑아 악기 연주를 시켰는데 나는 그 안에서 멜로디언 연주를 맡아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사를 하고 첫 번째 주말에 엄마에게 교회에 데려다 달라고 말했다. 웬일인지 데려다주셨다. 차를 타고 가면서 나는 그 길을 또 외웠다. 다음번에는 정말 데려다주지 않을 것 같았다. 가는 내내 엄마가 마지막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일주일이 지났다. 수예점에서 아주머니들과 수다를 떨며 뜨개질을 하고 있는 엄마 옆에 찰싹 붙어 교회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엄마는 정말 냉정하게 말했다. “지난주에 말했잖아. 이제 못 가.”
1시간이 지났을까? 아무리 졸라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가며 나는 결심했다. 스스로 가보자. 혼자는 무서우니 동생을 꼬셨다. 나와 2살 터울인 내 동생 주리는 언니 뒤라면 어디든 쫓아오는 아이였기에 무척 순진한 얼굴로 냉큼 좋다고 말했다. 의기양양하게 한 손에는 멜로디언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주리 손을 잡았다. 주리는 나머지 손에 실로폰을 쥔 채 쫄랑쫄랑 나를 따라왔다. “주리야, 우리 이제 모험을 떠나는 거야.” 혼자는 무섭지만 동생과 함께 라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언니이니까.
그동안 나는 이 날이 올 걸 대비해 내가 앞으로 살게 될 이곳 주변을 자주 걸어 다녔다. 어린 내가 걸어서 최대한 멀리 나갈 수 있는 거리가 어느 정도일까 생각하며 그 반경을 넓혔다. 마치 저 멀리 바다에는 무시무시한 상어가 있으니 멀리 절대 나가면 안 된다는 어른들의 말에 작은 돛단배를 타고 오늘은 2미터, 내일은 4미터씩 바다에 나가는 연습을 하는 호기심 강한 아이처럼 말이다.
한참을 걸어가다 헷갈리는 길을 만났다. 고민하다 방향을 택했다. 결국 길을 잘못 들었다. 한 블록 더 걸어가서 인도가 있는 큰 길로 가야 했는데 그만 인도가 없는 6차선 도로 가장자리를 걷게 된 것이다. 화물 트럭, 승용차 너 나 할 것 없이 쌩쌩 달렸다. 그 사이를 걸어가는 조그마한 어린아이 둘은 보이지 않는 듯했다. 너무 무서웠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무서울수록 동생 손을 더 꽉 잡고 씩씩하게 걸었다.
그러다 위기의 순간을 만났다. 큰 덤프트럭이 덜컹덜컹 큰 소리를 내며 멀리서 달려오더니 우리 바로 옆을 쌩하니 지나갔다. 도로가 덜덜덜 흔들렸다. 그 순간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주리와 나는 손에 쥔 실로폰과 멜로디언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서로 끌어안고 소리 내 엉엉 울었다. 그제서야 주리는 눈물 콧물 범벅된 얼굴로 집에 가자고 했다. 얘도 몹시 무서웠던 모양이다. 너무나 씩씩하게 앞장 서 가고 있는 언니에게 차마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못 꺼내고 있었던 것이다. 주리 말대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내 모험을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동생을 타이르고 옷자락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았다. 나는 다시 멜로디언을 쥐고 동생의 손을 꽉 잡았다.
기억을 더듬어 걷고 또 걸었다. 한참을 걸어가니 드디어 내 기억 속의 옛 동네가 나왔다. 좀 더 걸어가니 아래 시장이 나왔다. 시장이 나온다는 건 조금만 더 가면 교회가 나온다는 걸 의미했다. 좁은 골목을 이리 돌고 저리 돌았다. 마침내 저 멀리 십자가가 보였다. 그때의 내 기분은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정말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20년이 흘렀지만 며칠 전 일처럼 생생하다. 공중전화를 찾아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교회에 왔다고 말했더니 대체 뭐 타고 간 거냐 물으셨다. 걸어왔다고 했더니 거짓말하지 말라 하셨다. 거기가 어디라고 걸어가냐며 엄마는 입이 안 다물어진다고 하셨다. 나는 엄마 없이도 혼자 멀리 올 수 있는 아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그리고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엄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것 같아 신이 났다.
시간이 흘러 나는 엄마의 허락과 꼭 잡은 동생의 손 없이도 혼자 여행을 잘 떠나는 멋진 여자 어른이 되었다. 그날의 기억 때문일까. 나는 초행길이 주는 ‘낯섦’과 ‘긴장’을 그 자체로 즐긴다. 리스본에서 버스를 잘못 타 길을 잃었어도 ‘이 길에는 사람이 없으니 노래나 크게 불러볼까’ 하며 긴장을 친구 삼아 해안 도로를 따라 걸으며 노래를 불렀다. 파리에서는 ‘몇 시간 동안 구글 지도에 의존하지 않고 다녀보기’를 스스로 정하고 정처 없이 걷다가 의도치 않게 정말 아름다운 거리를 발견해 또 다른 기쁨을 얻기도 했다. 뉴욕 센트럴 파크에 갔을 땐 푸르른 나무와 파아란 하늘, 솔솔 부는 바람 아래 달리는 러너들을 바라보며 있는 것이 너무 행복해 오히려 이 곳에서 길을 잃고 하루 종일 헤매고 싶었다.
오늘도 나는 꿈을 꾼다. 낯선 길 위에 긴장하고 서있는 내가 보인다. 그렇지만 그리 두려워 보이진 않는다. 나는 알고 있다. 그 길이 얼마나 큰 설렘과 희열을 줄 것인지, 그리고 꽤 색다른 길로 나를 안내해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 다시 걸어보자, 나아가자 외친다. 오늘도 낯선 길 위의 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