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던 때를 정확히 기억하진 못한다. 우릴 아는 주위 모든 사람들이 너와 날 하나로 인식했을 때 이미 나는 네 숨으로 숨을 쉬고 네 입김을 빌려 말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스며들어 내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너는 함께 있지 않아도 늘 내 옆에 있었고 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어디서든 네 향기가, 네 목소리가, 네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너와 함께 일 때 세상 모든 근심을 잊을 수 있었다. 세상의 어떤 풍파가 다가와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너는 내 그늘이었고 내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였다.
서로를 향한 붉은 마음이 살결을 뚫고 심장에 닿았을 때, 너와 나 사이에 우리를 연결하는 가느다란 실이 생긴 걸 보았다. 나는 그 실을 통해 늘 너에게 닿기를 기도했다. 네가 잠들어 이 세상에 없는 것만 같을 땐 붉은 실이 색을 잃지 않도록 두 손에 입김을 불어넣어 따뜻하게 널 만졌고, 너의 손을 놓칠 것만 같아 두려운 날엔 보이지 않는 너를 쫓아 숨을 다해 뛰었다.
우리의 사랑은 점점 커져갔고 단단해졌으며 서로를 연결하는 붉은 실은 점점 두꺼워졌다. 언젠가 우리가 싸우고 돌아선 날 우리 사이에 새롭게 파란색의 실이 생긴 걸 보았다. 서로 오해가 쌓여 눈물을 흘린 날엔 노란 실이, 네가 미워서 화가 난 날엔 초록색 실이 생겼다. 나는 그게 모두 사랑인 줄만 알았다. 우릴 단단하게만 해줄 실타래. 우리가 사랑해서 생긴 실타래.
시간이 흘러 우리 사이에 정리되지 않은 실타래는 뭉텅이가 되었다. 그것은 너와 나의 몸을 감싸 어느새 서로를 알아볼 수 없게 했다. 오해와 상처가 끈적이게 달라붙어 예전의 우리 얼굴을 모두 지워버렸다. 얽히고설킨 우리는 갈 곳을 잃었다. 움직일 수도 없고 끊을 수도 없어 그저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어느새 덤불이 되어 내 목을 조여왔다. 누군가의 숨을 끊어야만 이 덤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우릴 잇는 이 실타래가 힘없이 사그라들어 네가 날 놓아줄 것만 같았다.
절대 없을 것 같았던 헤어짐이 너와 내 앞에 다가왔다. 사랑의 시작은 캔버스에 실수로 뿌려진 물감처럼 한순간이었는데, 널 지우는 건 여기저기 붙어 굳어버린 물감을 하나씩 긁어 뜯어내는 일처럼 지독히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널 뜯어낼수록 내 살점도 함께 뜯어져 나갔다. 손가락에서는 피가 났다. 그냥 둘까. 시간이 흐르면 바람이 한 조각씩 떼어줄까. 내가 너를 지우고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나는 정말 거기 있을까. 끝은 끝일뿐이란 걸 우린 받아들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