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이사 올 때 커피 머신을 처분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왔다. 막상 와서 보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에 두기엔 사이즈가 생각보다 컸다. 여러 번 팔까 말까 고민했지만 그냥 그대로 두었다. 더 맛있게 커피를 내려보겠다고 디스트리뷰션 툴도 새로 마련하고 포터필더도 바텀리스로 바꾸는 등 욕심을 잔뜩 부렸는데 집이 작다는 이유로 머신을 팔자니 아쉬웠다. 그렇다고 그동안 잘 활용한 것은 아니었다. 할 일이 있으면 밖에서 하고 집에 들어오는 편이라 카페에 자주 가기도 했고, 낯선 집에 정 붙이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 집에 자주 머무르지 않으니 머신을 사용할 일이 점점 줄었다. 그러나 썩 내키지도 않는 중고 거래를 위해 시간을 내는 것이 귀찮기도 해 집에 작지 않은 공간을 내어주며 몇 달을 함께 했다.
나는 잔을 좋아한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잔을 발견할 때 그 순간의 짜릿함도 너무 좋아한다. 간혹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내 취향의 그릇이나 물건을 선물하기도 하는데, 그들이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지난 일요일에 집 근처 스타벅스에 갔다. 주문을 하고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MD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머그잔 하나가 눈에 띄었다. 손바닥에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여기에 카푸치노를 담아 먹으면 기분이 정말 좋을 것 같아. 망설임 없이 구매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다음 달에는 꼭 당근에 머신을 올리자 다짐했는데 갑자기 신선한 원두로 에스프레소를 내려 카푸치노를 만들어 먹고 싶어졌다.
집에 돌아와 겉옷과 가방을 벗어놓고 침대에 걸쳐 누웠다. 카푸치노의 시나몬 향이 천장을 타고 돌아다니는 듯했다. 아, 원두 주문할까. 오늘 주문하면 모레는 올 텐데. 원두 봉지 귀퉁이를 가위로 살짝 자르고 얼굴을 가까이해 향을 맡는 상상을 했다. 아, 너무 좋아. 그라인더에 원두 갈리는 소리. 레버를 내리면 진동하는 머신. 호랑이 무늬 크레마. 잔에 에스프레소와 스팀 우유를 붓고 큰 수저로 거품을 두어 번 떠서 조심스럽게 올려야지. 그 위에 시나몬 가루까지 살살살 뿌려준다면? 생각만 해도 너무 좋아. 다급하게 자세를 고쳐 엎드려 누웠다. 그리고는 정말 오랜만에 원두를 주문했다.
어떤 디저트와 함께 먹을까 상상하다 매그놀리아 바나나 푸딩이 떠올랐다. 초희와 분당에서 지낼 때 쇼핑을 하러 판교 현백에 가는 날이면 우리는 늘 지하 매그놀리아 매장에 들러 바나나 푸딩을 손에 들고 돌아왔다. 둘 다 사람 많은 곳에 오래 있으면 에너지를 소진하는 타입이라 집에 도착하면 옷만 풀어헤치고 식탁에 앉아 지친 육체에 생명수를 부어주듯 입에 커피와 바나나 푸딩을 한가득 넣어주었다. 아쉽게도 매그놀리아는 실적 악화로 2020년에 모두 철수해 더 이상 국내에 매장이 없었다.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미국 본점에서 우리 집까지 배송을 해준다는 데 글쎄 배송비만 3만 원이다. 왠지 서울에 매그놀리아만큼 맛있게 바나나 푸딩을 만들어 파는 곳이 있을 것 같아 한참 찾았지만 딱히 끌리는 곳이 없었다. 매그놀리아에서 공개한 레시피가 생각보다 해볼 만할 것 같아 3월에 한번 만들어 초희 집에 가져가기로 했다.
디저트 맛집을 검색하다 갑자기 네이버 지도에 난잡하게 저장해 놓은 맛집 리스트가 눈에 거슬렸다. 인스타에 남발하듯 저장해 놓은 것도 신경이 쓰였다. 이참에 정리하자 싶어 디저트 맛집, 커피 맛집, 분위기 좋은 카페 등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 분류했다. 올해는 여행을 자주 갈 계획이라 지역 별로 묶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또 정리할 거 없나. 노션을 열어 블로그와 브런치에 업로드할 콘텐츠 목록을 만들었다. 친구가 보내준 라이브러리 템플릿에 1월에 읽은 책과 올해 읽고 싶은 책도 모두 넣어 보기 좋게 정리했다. 여기까지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문득 백곰이 생각났다. 오랜만에 카톡창을 열어 백곰을 불렀다. 잘 지내, 백곰? 그럼, 잘 지내지. 무소식이 희소식인 나이잖아. 너는 잘 지내? 응, 나도 잘 지내지. 대화가 끝나갈 무렵 올해 네가 몇 살이더라 묻는 백곰. 나 35살 됐지. 백곰 만난 게 14살이었는데 벌써 21년 전이네. 21년이라... 짧지 않으이. 시간 진짜 금방 간다. 더 행복하게 살자. 올해는 우리 얼굴 좀 볼까? 좋지, 순천올 때 맞춰보자. 그래 좋아, 기회를 만들어 보자. 잘 지내고 있어, 백곰. 응, 너도 무리하지 말고 잘 지내야 해. 응, 백곰도! 연락도 가끔 하고 아프지 말고, 알겠지? 응, 걱정 마!
부족한 것도 넘치는 것도 없는, 평온한 하루.
요 며칠 커다랗게 생각의 전환이 있었다. 몇 달 동안 많은 것들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를 관통해 지나갔다. 어쩌면 특별할 것 없이 일상에서 늘 반복적으로 겪은 과정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이번엔 조금 달랐다.
성냥에 불씨를 댕긴 계기가 있었다. 그때 생긴 조그마한 불빛이 내 안에 나 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어떤 문제의 존재를 비췄다. 비록 그 빛이 너무 작아 앞이 보일 듯 말 듯 흐릿했지만 분명 거기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나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것은 마치 구부러진 못과 같았다. 때마침 손에 들린 책이 이 작은 불씨를 마른 장작에 옮겨줬다. 순식간에 활활 타올라 걷잡을 수 없이 큰 불이 만들어졌다. 뜨거웠지만 너무나 환하게 비춰준 덕분에 정말 선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던가. 며칠 뒤 유튜브에서 나는 필연적으로 어떤 영상에 눈이 이끌렸다. 그 안에서 나는 어쩌면 이 구부러진 못을 펴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피하지 않고 며칠 동안 생각의 끈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리고 감히 15년 만에 그 문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일련의 과정이 신기해 이유를 떠올려 보았다. 나에게 '자기만의 방'이 생겨서일까. 실제로 나는 혼자 지내게 되면서 이전보다 더 많은 사색을 하고 있는데 확실히 그전보다 질이 높다. 아니면 내 마음이 마치 대청소를 깨끗히 끝낸 교실 같기 때문일까. 네이버 지도에 항목 별로 분류된 맛집 리스트처럼 머릿속에 복잡하게 자리하던 관계와 일들이 이젠 있어야 할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느낌이다. 원래 깔끔한 방에 티끌이 더 잘 보이는 법이지 않나. 그것만 주워다 버리면 다시 방이 말끔해지는 그런 것과 같은 것일까. 쓸데없는 것을 모두 버리고 나니 본질이 여기 있었구나라고 알게 된 걸까.
또 하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시작해 점점 진지하게 쓰고 있는 일기가 도움이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나는 나에게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속이지 말자. 그게 너와 날 구원하는 길일 지 몰라. 내가 널 도울게. 너도 날 도와줘. 우리 부르고 싶은 이름은 끝까지 부르자. 이겨내고 싶은 문제는 지치지 말고 끝까지 말하자. 내가 네 이야기를 다 들어줄게. 볼펜은 종이 위에서 다듬을 기회도 지울 기회도 주지 않지만 그래서 더 좋아. 진짜 내 마음 같거든. 거칠게 쓸게. 내 말에 응답해 줘. 이게 바로 진짜 내 마음이야.
이 글을 완성하는 며칠 동안 원두는 이미 도착을 했다. 이번 주 일요일에는 모닝 운동을 하고 돌아와 머신과 그라인더를 청소하려 한다. 그리고 카푸치노를 정성껏 만들어 열정 다이어터에게 선물해야지. 오랜만이라 쉽진 않겠지만 관대한 그녀는 아마 맛있게 먹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