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부터 살아 남아온 나를 위한 기록
나는 버텼다.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부터 10년을 버티고 또 버텨서 살아남았다. 이건 살아남은 나의 기록의 시작이다. 그리고 앞으로 버텨야할 삶이 남아있기에, 나는 계속 걷기 위해 글을 쓰려 한다.
10년 전, 2010년 고등학생
공황장애에 걸렸으나 공황장애인줄도 몰랐다.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열정적이지는 않았지만 하고 싶은 것도 몇 가지는 있던 평범하고 말 잘 듣는 학생이었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여러번 들었다. 이유도 없이 몸이 여기저기 아팠다. 학교에 가려면 지하철을 타야했는데 숨이 막혀서 쓰러질 것처럼 괴로웠다. 처음에는 그냥 버텼다. 중간에 내렸다가 다시 타기 위해 좀 더 집에서 일찍 출발하기 시작했고, 몸이 아프면 약국이며 한의원이며 병원이며 온갖 군데를 혼자 찾아다녔다. 물론 나에겐 그 어떠한 병도 없었다.
미술 시간이었다. 붓으로 난을 그려 제출해야 했는데, 붓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현기증과 함께 식은땀이 흘렀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만원 지하철을 탔을 때 처럼 그랬다. 대충 그려서 제출하고 자리에 앉아 한참 멍하니 빈 책상만 바라보았다. 병도 없다는데 오진인가. 다시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삶이 계속 됐다. 병원에 가고 보건실에 가고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견딜 수 없어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학교에서는 탈의실 빈칸에 들어가 웅크리고 앉아 한참을 버티고 버텼다. 그마저도 안되는 날에는 조퇴를 하고 집에 갔다. 상담실을 찾기까지는 반 년 정도 걸렸다.
자퇴를 하고 싶다고 했다. 공부도 할 수 없었고 애초에 학교를 나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산 같아서 더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담실을 찾게 됐다.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상담 선생님은 병원을 권유해주셨는데 나는 그 무렵,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렇게 정신과 문턱을 넘어가게 되면 정말로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지 않을까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이었다.
자퇴는 결국 하지 못했다. 머리를 부수는 듯한 두통과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의 현기증, 칼로 쑤시는 듯한 위통들을 버텨가며 학교를 다녔다. 학교 행사는 제대로 참여하지도 못했지만 끝까지 버티고 버텼다. 다만 대학에는 가고싶지 않았으므로 수능 공부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억지로 수능 성적에 맞춰 대학에 보내졌다. 나 역시도 대학을 가지 않는다면 특별한 미래가 없었으므로 그렇게 했다. 결국엔 내 선택이었다.
대학 생활
자유, 병원, 신경안정제
사람을 사귀지 않았다. 사람을 사귀면 나의 상태를 설명해야 했고, 자유로울 수 없었다. 1학년때부터 혼자 학교를 다녔다. 흔히 말하는 20살의 캠퍼스 라이프같은건 없었다. 충분했다. 나는 자유로웠고 공부는 할만했으며 학교는 오히려 고등학교보다 가까워서 다닐만 했다. 지하철을 몇 번이고 내렸다 타기를 반복하는 일상은 같았으나 버틸만 하다고 생각했다.
2학년이 되었다. 공황장애 합병증으로 찾아온 폐소공포증이 심해졌다. 엘리베이터도 탈 수 없었고, 시험을 보기위해 강의실 문이 닫히는 것도 버틸 수가 없었다. 청심환을 사마시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휴학은 안된다는 엄마를 설득해서 결국 휴학을 했다.
그리고 병원에 찾아갔다.
병원은 별 거 없었다. 나는 두꺼운 종이를 넘겨가며 v표시를 그었다. 여러가지 검사를 했다. 공황장애 만점, 중증 우울증 판정을 받았다. 그 때는 지하철도 타지 못했고 백화점 지하층도 내려가지 못했다. 누워있으면 심장마비가 올 것 같았다. 그래도 약은 싫다고 했다. 병원에선 해줄게 없으니 돌아가라고 했다. 병원비도 안받았다.
두 달 후에 다시 병원에 찾아갔다. 약을 먹기 시작했다. 좀 살만했다. 내 길지 않은 인생에서 가장 살만했던 시기를 선택하라면 이 시기다. 휴학을 했고 약을 먹기 시작했다. 레몬밤과 로즈마리를 키우고, 게임도 하고, 책도 읽고, 온 동네를 걸어 다녔다. 지하철은 여전히 탈 수가 없어서 전부 걸어다녔다.
그뒤로 3년간 약을 먹었다. 복학을 하고 다시 학교에 다니면서 지하철에서 내렸다 다시 타는 일이 줄었고, 시험 시간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은 사귀지 않았다. 나 하나 챙기기도 너무 벅찼다. 이미 친구라면 충분히 있었고, 더 이상 사람을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강의 시간에는 공황이 찾아올까봐 문가에만 앉았지만, 그 정도면 버틸만 하다고 생각했다.
망망대해 위 쪽배를 타고 떠도는 삶이었다. 노를 저을 힘도, 가야할 방향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