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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사 Aug 27. 2020

위기가 왔다. 나 좀 고쳐줘.

사람 고쳐서라도 써야 합니다. 특히 당신이 엄마라면요.

결혼 후 가장 많이 부딪쳤던 부분은 남편과 서로 '왜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지 않냐'는 이유였다. 내 단점도 포용해달란 거다. 그런데 이제 겨우 걷기 시작한 자식에게도 그런 요구가 통할 수 있을까? 아니 전혀. 나라는 인간, 고쳐 써야 한다.


몰랐던 것은 아닌데 이제는 정말로 뿌리 뽑고 싶은 성격이 있다. 지독한 완벽주의. 완벽주의라는 단어는 이중적이다. 일처리나 관계에서 꼼꼼함, 세련된 매너, 중간 이상의 성과 등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완벽이 아닌 경우는 일종의 파국이다. 나 같은 경우인 그 파국이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표출된다.


결혼하고서는 완벽한 아내가 되고 싶었다. 완곡하게 표현하자면 '좋은 아내'를 추구했다. 직장 생활도 잘하면서 집에서는 남편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쉼터가 되어주고, 시부모한테는 효도하는 며느리. 책에서 배운 대로 남편을 존중하고 기를 세워주기 위해 노력했고 가장 좋은 친구가 되려고 했다.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분투했기 때문에 나에 대해 남편이 불만을 말한다든가 내가 남편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 스스로에게 대노했다. 이런 이유로 부부싸움을 하며 내가 깨뜨린 포트메리온이 대체 몇 장이던가.


한해 두 해가 지나고 좋은 아내가 되는 건 포기했다. 애당초 좋은 아내라는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부부가 서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면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나를 보고 '저런 여자랑 어떻게 살아'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남편은 내 좋은 점들을 바라봐주고 미운 점들은 눈 감아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에게 늘 좋은 아내가 되었다.


내가 좋은 아내가 될 수 있던 건 남편의 성숙함 덕분이다. 그가 '눈 감아준' 부분들은 여전히 변치 않고 있다. 완벽주의와 그 이면의 분노 조절 장애. 나의 이 성격은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다.


문제는 아이를 낳고 시작됐다. 바뀌지 않은 내 성격은 육아에서도 마찬가지다. 철저한 계획표와 내 맘대로 만든 '육아 원칙'. 7시 이후엔 무조건 집안을 소등한다든가 아이 앞에서는 휴대폰을 3분 이상 만지지 않는다든가 하는 내용이다. 주체가 '나'인 경우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문제는 애를 대상으로 만든 완벽한 규칙들이다.


내 딸은 8시 이전엔 자야 했고 낮잠은 돌 무렵부턴 무조건 2시간 안팎으로, 일 1~2회 정도 정해졌다. 오후 3시까지 낮잠을 한 시간 이상 자지 못했다면 그날은 파국이다. '늦게 낮잠 자고 밤늦게 자겠네... 아님 초저녁에 일찍 잠들어서는 새벽에 깨서 또 놀아달라고 하겠네.' 발생하지도 않은 일에 벌써 우울함이 내 가슴을 짓누른다.


부모라면  알겠지만 아이는 평균 수면량만큼 자지도 않고 이유식도 권장량만큼 먹지 않는다. 이유도   없이 안아달라고 그러고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 우는 경우도 다반사다. '오늘 낮잠은  시간씩  번은 자줘야 하는데' '소고기는 이제 하루에 50g 먹어야 하는데' '지금 낮잠 자면 밤에   자는데'라고 백날 고민해봐라. 아이는  계획에 따라가 주질 않는다. 계획에  맞아떨어지게 가는 ? 로또 맞은 날이다.


아이는 기계가 니기에 절대  뜻대로 다룰  없다.  맘에  들게,  계획에  맞아떨어지게 움직여주는 완벽한 아이는 없다.


이렇다 보니 나의 육아 휴직 기간은 거의 매일이 절망이었다. 아기는 사랑스럽지만 내 마음은 진흙탕이다. 아기에 대한 사랑은 진흙에 핀 연꽃이랄까. 그저 그 한송이 아름다운 아기를 위해 진흙에서도 버티는 거다.


하지만 버티는 데엔 한계가 있고 결국 성벽은 무너졌다. 내 계획에서 어긋나게 움직이는 아기를 향해 소리치고 울어 버린다. 그럴 때마다 아기에게 너무 미안해서 곧바로 웃어 보이기도 하지만, 점점 애는 엄마 눈치를 본다.


 번인가는 그렇게 애한테 울며 화를  후에 아기가   없는 곳에 숨어서는 스스로 머리와 뺨을 때리고 울부짖은 적도 있다.  애한테 화내냐고. 애가 무슨 잘못이냐고. 네가 그러고도 엄마냐고. 그게 끝인가. 하나님에게 계속해서 절규했다.  같은 엄마 자격도 없는 인간한테  아이를 주셔서 이렇게 애한테 상처를 냐고. 이런  폭력성에  치를 떨었다.


나를 미워하고 또 미워하게 되었다. 물론 나에게도 좋은 점들이란 게 있긴 하지만 결국 나는 '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만 주는 나쁜 년'이다. 그게 내 속에서 가장 뾰족하고 딱딱한 정체성이 되었고 틈만 나면 나를 찌른다. '거봐. 너 또 애한테 화냈지. 너 같은 건 엄마 자격도 없어.'


정신을 차리고 잠시  몰골을 돌아본다. 나에게 화를 내도, 아이에게 소리를 질러도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얻는 것은 없고 잃는 것만 커진다. 부모로서의 자신감, 아이의 신뢰 .   상처만 받을 뿐이다. '내가 과연  괴팍한 성격을 벗어날  있을까.' 잠시 숨을 고르고 나니 빛이 보인다. 이제는  어둠에서 나와야겠다.  어둠은   모습이 아니라 벗어날  있는 터널이다. 어둠에 갇혀있을 , 거기서 나오면 그만이다. 생각을 전환하니 결론이 나온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완벽주의와 아집으로 상처 주는 일은 그만두자.'


그간 내 완벽주의와 그 그림자, 즉 지독하게 더러운 성미로 피해를 본 건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엄마는 엄마라는 이유로 내 이런 성격을 받아들여야만 했고 남편 역시 자기가 선택한 여자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눈을 감고는 '당신은 좋은 아내야'라고 계속해서 말해줬다. 근데 이제 한계다. 아이에게 어떻게 내 성격을 이해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이제는 내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30여 년간 만들어진 성격을 이제와 고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치지 않으면 나뿐만 아니라 아이의 인성, 엄마와의 관계, 자존감, 나아가 앞으로의 삶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사랑이 나로 인해 상처 받고 망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 자체가 공포다. 어떤 의미에서는 희생일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이게 나야'라고 뻔뻔하게 내세웠던 성격을 다듬겠다고 하니 말이다. 물론 이런 결론도 어쩌면 완벽주의적 사고가 반영된 걸 수도 있겠지만. 자기가 편하고자 아이에게 상처 주려는 부모가 얼마나 있겠는가.


지난 세월동안 고칠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 특징이라고까지 자부했던 성격에 메스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수술은 지금부터다. 문제를 인식했으니 이제 고치는 일만 남았다. 아기로 인해 부모는 인격적 도약을 경험한다.



Photo by Piron Guillaum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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