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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수의힘 Aug 08. 2023

불안함이 나를 만들었다.

안정적이었다면 그 안정에 안주했을 것이다.

기간제 교사라는 직업으로 일을 시작했기에, 지위의 불안함이 주는 스트레스를 끊임없이 이겨내야 했다. 기간제 교사는 1년 계약이기 때문에 2학기 시작하면 학교의 눈치가 보이기 마련이다. 혹시라도 1학기에 실수한 것이 내 자리에 영향을 주지 않을지 전전긍긍하게 되고, 내년의 인사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들리면 그 이야기에 온 신경이 가기 마련이다.


교사라면 당연히 수업을 잘해야 하고, 학생들을 잘 챙겨야 한다. 그건 교사라는 직업의 소명이기 때문에 그렇다. 문제는 그걸로는 두각을 드러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수업을 잘하는 선생님들은 정말 많다. 해년마다 학교에 면접과 수업 실연으로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사람들이 수업을 못할 일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한 학교에서 오래 근무하시는 기간제 선생님들은 수업 외에도 잘하는 게 많았다. 10년 차 넘어서는 기간제 선생님들을 보면 뭔가 엘리트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학교 일에 능통하고, 모르는 일이 생기면 사람들이 그 선생님을 찾는, 능력자 선생님들. 한국사 선생님이셨는데 학교의 모든 컴퓨터를 혼자서 고치는 선생님도 계셨고, 영어 선생님이셨는데 학교의 모든 행사를 계획하고 진행하는 선생님도 계셨다. 아마 그때쯤부터, 나도 뭔가 잘하는 게 있어야 학교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처음 근무했던 학교에서 학생들의 진로 및 성적 상담을 정말 치밀하게 해 주시는 선생님이 계셨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 선생님의 엑셀 파일이었다. 온갖 화려한 그래프와 무엇인가를 입력하면 휙휙 바뀌는 화면이 정말 멋있어 보였다. 그때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었었다. 


"선생님, 저도 엑셀을 배우면 이런 파일을 만들 수 있을까요?"


그때 들었던 답변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아마 평생을 기억할 것 같다.

"선생님이요?"


그때는 약간의 모멸감과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지금은 그 선생님의 말을 이해한다. 그때 내가 봤던 엑셀 파일은 수식뿐 아니라 VBA까지 포함되어 있던 파일이었고, VBA는 사실 지금도 자신이 없을 정도로 어렵다. 멋모르는 신입 교사가 엑셀과 VBA에 덤벼드는 모습을 본 그 선생님은 아마 어이가 없으셨을 것이다.


아무튼 그때 이후로 엑셀에 매달리게 되었다. 엑셀 수식을 만드는 일이 정말 재미있었다. 당시 근무했던 부서가 교무부였는데, 교무부장님을 도우면서 나름대로 수식들을 습득해 엑셀 파일 양식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수동으로 하나하나 입력했던 일들을 자동으로 처리되도록 양식을 만들고 그 파일을 공유하면서 칭찬을 듣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 그러면서 점차 엑셀 전문가가 되어 갔다. 사실 전문가라 불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었지만, 이미 학교에 엑셀 능력자로 소문이 나버려서, 엑셀과 관련된 일을 맡았을 때 차마 '이건 제가 못하겠는데요.'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서 만들어내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엑셀을 배우고 VBA를 배우게 되었다.


엑셀을 잘 다루게 되면서 점차 한 학교에서 근무하는 기간이 늘어났다. 처음 학교에서 1년 근무했고, 두 번째 학교에서도 1년을 근무했다. 다음 학교에서는 2년을 근무했으며, 마지막 학교에서는 6년을 근무했다. 내가 학교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되면서, 점차 학교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 갔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내 위치의 불안함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나 그 불안함은 결국 끊임없이 나 자신을 갈고닦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격언처럼, 그때의 고통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언제 수입이 끊길지 모르는 이 일의 불안함이 계속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고 있다.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그 불안함을 이제는 긍정한다. 나를 만든 건 그 불안함의 고통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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