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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잊지 못할 음악은?

내 첫 번째 CD

(c)김유리


그 휴대용 CD플레이어는 광택이 없는 검은 빛이었다. 커다란 고양이 정도의 크기였다. 둥글면서 긴 몸판 앞쪽에는 스파이더맨의 눈처럼 생긴 스피커 한 쌍이 붙어 있었다. 버튼이나 계기판도 곡선을 살린 모양새였는데, 외계에서 온 우주선을 떠올리게 했다. 


중학교 때의 어느 늦가을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거실 카펫 위에 낮선 물건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와 이모부는 막 포장 상자에서 꺼낸 검은색 CD플레이어를 만지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버버리 코트 차림새였던 이모부는, 남동생이 일본에서 사가지고 온 건데 우리 가족이 혹시 관심 있을까 싶어 보여주러 왔다고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OPEN'이라고 쓰인 버튼을 누르자, CD플레이트가 ‘지이잉’ 소리를 내며 천천히 앞으로 튀어나왔다. 마치 <터미네이터> 같은 SF영화에서 최첨단 기계가 작동하는 것 같은, 신기한 광경이었다. 버튼을 누르면 불이 들어왔고, 동작에 따라 ‘PLAY' 'TAPE' 같은 단어가 디지털 표시창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리고 함께 들어있던 CD는 일본어와 영어가 잔뜩 적혀 있는 ‘카펜터즈 베스트 모음집’이었다.


지금도 전주 부분의 몇 마디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 곡, 그 연주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놀라서 숨을 들이마시던 바로 그 느낌도. CD의 첫 번째 수록곡이자 내 인생에서 생전 처음 들어봤던 디지털 음악은, 지금 생각하면 좀 웃기지만, 그 시절에도 ‘옛날 노래’였던 카펜터즈의 'This Masquerade'였다. 인켈 오디오, 휴대용 마이마이, 삼성 카세트 플레이어 그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깨끗하다 못해 날카로운 음향, 그리고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차갑고 깔끔한 공기 진동.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나와 동생은 ‘갖고 싶다’기 보다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부모님을 바라봤다. 우리는 그렇게 일본에서 갓 건너온 검은색 CD플레이어를 집안에 들였다.


동생과 나는 공부방에서도 드디어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됐다. 라디오에서 인기 가요 프로그램이 방송될 시간이면 공테이프를 넣어두고, 맘에 드는 노래가 나올때 무조건 ‘녹음’ 버튼을 눌러 불법(?) 인기가요 테이프를 만들었다. 시험 기간에는 부모님 몰래 라디오 주파수를 TV로 맞춰두고 ‘가요 톱텐’을 음성으로 듣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1980년대 후반, 급격하게 발전의 기운이 샘솟던 우리나라였지만 당시의 물건들은 그 발전상을 따라가지 못했다. 인켈 오디오는 카세트테이프를 넣을 때마다 ‘달카닥’하는 거친 소리를 내어 나를 항상 깜짝 놀라게 했고, 삼성 카세트는 걸핏하면 테이프가 말려들어가 억지로 빼내고 연필로 되감는 것이 일이었다. 하지만 멀리 외국에서 건너온 검은색 CD 플레이어는 부드럽게 열리고 닫히고 동작했으며 몸판의 무광 코팅마저도 당시엔 느낄 수 없는 신기한 촉감이었다. 십대 시절의 나는 가끔씩 CD플레이어의 외관을 쓰다듬어 보면서 이 물건을 만든 사람들은 누구일까 궁금해 했다. 


얼마 전 우리나라의 산요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더니, 당시 기세등등했던 그 브랜드는 이제는 무선 전화와 빔 프로젝터를 주력 상품으로 하고 있었다. ‘디지털카메라와 카세트는 서비스하지 않습니다’라는 쓸쓸한 문구도 적혀 있었다. 네이버 중고나라에는 바로 그 산요 CD플레이어가 새것처럼 깔끔한 상태로 매물로 나와 있었고, 1993년에 60만원을 주고 구입했다는 판매자는 ‘정말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제품’이라고 칭찬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살짝 울컥했다.


그 검은색 CD플레이어는 여전히 우리 집에 있다. 몇 번 이사를 다니면서 표면에는 박스 테이프를 붙였다가 뗀 자국이 남아있고, 미래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던 몸체도 군데군데 찌그러졌다. 아버지가 작업할 때 라디오를 듣겠다고 야외로 가지고 나갔기 때문에 온통 뿌옇게 먼지를 뒤집어썼다. 이번에 집에 가면 잘 닦아서, 내 첫 번째 CD였던 ‘카펜터즈 베스트 모음집’을 다시 들어봐야겠다. 그때의 생생한 전율과 날카로운 소리의 진동을 지금,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도 내가 느낄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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