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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어리 Apr 03. 2022

영원히 냅다 디귿자로 걷게 된 사연

내가 직선 보행을 할 수 없게 된 이유

뒷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영원히 뒷감당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누가 알았을까요? 방앗간 드나들듯 퇴근 후에 들르던 집 앞 서점 통로를 떳떳하게 직선으로 걸을 수 없게 되리라는 사실을요. 저자가 되기 전에 저의 신분은 그저 흔한 한 명의 고객이었습니다. 매달 월급날이 되면 정신이 팔려 신간 코너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한아름씩 책을 안고 계산대로 향하는 충성스러운 손님이었죠. 책을 쓰기 전까지는요. 직원에게 다가가 자신을 소개하고 영업을 하는 실수를 저지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책을 출간하고 집 앞 서점을 찾아가 벽 서가 구석에 꽂힌 저의 졸저를 발견한 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가족, 친구, 지인, 회사와 거래처 사람을 제외하고 대한민국에서 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책이 나온다 한들 남들의 유명세에 밀려서 구석 자리로 가는 것이 정해진 수순임을 이제는 인정합니다. 다만 당시에는 이러한 겸손함을 지니지 못했던 게 문제였습니다. 신간 도서라면 마땅히 '새로 나온 책' 평대에 자리할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었지요. 


"안녕하세요."라고 서점 직원에게 말하며 책이 어딨는지 물어보는 일은 흔합니다. 그에 비해 "안녕하세요. 저는 ㅇㅇ책의 저자 ㅇㅇㅇ인데요…"로 시작하는 첫마디를 직원에게 건네는 일은 무척이나 이상합니다. 그 순간 나와 마주한 사람은 나를 도와주는 사람에서 '정식으로 인사를 올린 갑'으로 수식과 존재의 속성이 바뀌어버립니다. '제가 사실은 어떤 책의 저자고 그 책이 이번 달에 새로 나왔는데 신간 매대에는 없어서 어쩌고 저쩌고…' 하는 예의 바르고 공손한 하소연을 전하고 다시 고개를 꾸벅. 이제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아아, 어색합니다. 서둘러 인사하고 뒤돌아서 퇴장합니다.


처음에 벽서가에 꽂혀있던 책이 (좌) 다음 방문 때는 신간 평대에 누워있어서(우) 너무 기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가만히 있는 직원에게 자신을 저자라고 '커밍아웃'하고 보도자료와 편지를 건네고 눈도장을 찍는다고 해서 책의 신분이 상승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영업을 다니면서 전후 차이가 없는 매대를 확인하고 여러 번 좌절한 경험이 있었기에 기대하는 마음도 버리고 당분간 집 앞 서점에는 발길을 끊었었습니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서점을 가고 싶어도 못 가는 불편함을 오래 참을 수는 없었지만요. 본 척 만 척 무심한 척 메인 통로를 지나는데 이게 웬걸? 'E1 자기 계발 NEW' 평대에 누워있는 책을 발견하고 감동해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저의 보잘것없는 저서에게 좋은 기회를 주신 직원 분을 찾아가서 다시 인사드렸을 때 그분의 표정과 대답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웃으며) 네 열심히 팔아보겠습니다!

뭉클했던 감동이 결국은 크나큰 업보로 돌아온다는 걸 이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NEW'가 붙은 평대는 통로를 지나는 고객의 이목을 끄는 무대인 동시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시험대입니다. 인공위성 발사를 예로 들면 아무리 강력하게 로켓을 위로 쏘아 올려도 결국엔 3단 점화를 하느냐 마느냐에 성사가 달려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목받을 기회를 어떻게든 살려서 책 판매량이 궤도에 올라야 비행에 성공해서 베스트셀러 매대에 안착할 수 있습니다. 감격스러웠던 1주 차, 2주 차, 그리고 3주 차. 갈 때마다 서점 직원분께 인사 드리기는 창피해서 미스터리 쇼퍼처럼 몰래 책의 생존을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올 것이 왔습니다.


새해가 되자 발행연도가 2021년인 저의 책은 이제 인간적으로 신간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NEW' 평대에서 바로 한 블록 옆인 베스트셀러 매대로의 이주는 애석하게도 불발로 끝났습니다. '축출' 보다도 저를 믿고 책을 평대에 올려준 서점 직원 분의 얼굴을 볼 낯이 없게 되었다는 현실이 더욱 비참했습니다. 이렇게 된 마당에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고 말을 걸기에도 민망했습니다. 다시 한번 떼를 쓰는 것처럼 보일까 봐서요. 이때부터였습니다. 가장 애정 하는 집 앞 서점 통로를 똑바로 걷지 못하게 된 시점은.


파란색 점이 서점 직원분이 앉아 있는 업무용 책상 위치입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렇게 피해다니고 있습니다.


통로 쪽에는 책을 찾는 고객을 위한 안내 데스크가 있습니다. 늘 지나치던 책상 앞을 통과하기가 이토록 껄끄러울 일인가 싶습니다. 실적을 올리지 못한 영업사원의 심정이란 이런 걸까요? 직원도, 서점도, 심지어 출판사에서도 비난하는 사람은 어느 하나 없지만, 직원 데스크가 있는 D코너를 피해서 C코너부터 E코너까지 항상 디귿자로 돌아서 다니고 있습니다. 걸그룹 에스파가 'Next Level'을 부르며 추는 안무처럼 냅다 디귿자를 만들며. 이 또한 서점 직원이 자신을 특별하게 기억해줄 거라고 착각하는 작가병의 일종이겠지요.





<손으로 쓰고 발로 알립니다>

초보 저자가 첫 책을 출간하고 경험한 절망과 기쁨을 자조와 해학으로 승화합니다.


<첫 화 읽기>

https://brunch.co.kr/@sardine/73


<출간 이후의 삶>

https://www.instagram.com/sardine.j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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