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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어리 May 23. 2022

알고 보니 호모가 아니었다

‘이거 오류인가?’ 


네이버 사전에 ‘집돌이’를 검색했더니 호모 루덴스가 나왔다. Homo Ludens, 유희하는 인간이란 뜻이다. 인간의 본질이 ‘놀이’에 있다고 보는 인간관을 정의하는 말로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가 제창했다. 집에 있는 게 대체로 바깥보다는 즐겁긴 한데, 집돌이는 그런 뜻이 아니지 않은가? 잘못 봤다. 알고 보니 호모가 아니었다. ‘홈 루덴스(Home Ludens)’. ‘집’과 ‘호모 루덴스’를 합친 말로 주로 집에서 여가를 보내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런 마케팅 용어는 또 누가 만들었을까?


라틴어 사전에서 ‘ludens’를 찾아보았다. ‘playing, people who play’, 노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유희는 굉장한 사치다. 호모든 홈이든 나는 ‘루덴스’와는 거리가 멀다. 한국 사람은 ‘논다’는 개념적 정의에 관대하면서도 야박하다. 보통은 일하지 않는 거의 모든 상태를 ‘논다’고 말할 수 있다. 그중에는 영어 ‘play’와 의미가 연결되지 않는 단어들이 많은데, 뜻이 다소 부정적이다.


“집에서 놀고 있다.” 취업을 못 해서 집에 있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은 거기에 “놀고 있다.”는 설명을 붙인다. 취준생도 숨만 쉬고 공부만 하지는 않는다. 집에서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구직 활동에 실패해서 집에 있는 사람의 심정이 정말로 노는 사람의 즐거운 마음일까, 플레이풀(playful) 할까? 찾아보니 소설가이자 ‘엄마’인 정아은 작가는 아예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이라는 책도 냈다. 찾아 헤맸던 위화감의 근원을 발견한 기분이다.


남들은 집에 있다 그러면 무슨 집에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누워만 있다는 줄로 안다. ‘집에만 있어요.’라고 말하면 어떻게 그러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집에만 있어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회사 상사가 입버릇처럼 말할 때도 ‘놀 거리가 많다는 이야기겠지’라고 지레짐작했었다. 집에서 가만히 있어보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다. 일하지 않으면 특수 청소업의 세계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집처럼 쓰레기 천국이 되어버린다.


1인 가구는 본인이 가장이자 가구원이요, 주부다. 거기에 나처럼 고양이라도 한 마리 키우면 부모 역할까지 해야 한다. 언제, 어느 아침에 일어나더라도 고양이 화장실에 쌓인 간밤의 배설물을 스테인리스 삽으로 퍼내 변기에 버리는 일과로 시작한다. 전쟁이 일어나서 집을 잃거나 움직일 수 없는 병에 걸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한 고양이가 온전히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까지 계속되는 일상이다. 이는 애정과는 별개의 문제다.


혼자된 삶의 해방감을 x축, 가사노동의 지겨움을 y축으로 그래프를 그려본다. 어느 순간부터 노동의 귀찮음이 자유의 기쁨보다 커지는 시기가 온다. 그제야 청소는 죽기 직전까지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란 걸 깨닫는다. 그래서 엄마들이 “회사는 은퇴라도 있지.”라고 말 하나 보다. 


나는 나를 키우는 것도 벅차다. 생존이 귀찮은 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일이다. 나에게도 밥을 줘야 한다. 먹고 끝이 아니라 설거지도 해야 한다. 돈도 내가 벌어오는데. 한 달 치 식량은 인터넷으로 많이 시킨다. 그러면 또 내다 버릴 박스와 플라스틱이 잔뜩 쌓인다. 나는 정당하게 돈을 내고 물건을 산 것이지, 손을 더럽혀가며 짐을 들고 옮겨서 분리수거해야 하는 노동까지 주문한 적은 없다. 그런데도 언젠가 분리수거가 귀찮다고 불평했더니 누군가가 말했다. “본인이 시킨 거잖아요?”라고. 글쎄 나는….


가사노동이란 말의 사전적 정의는 ‘한 가정을 유지하고 살림을 꾸려 나가기 위해 하는 노동’이다. 이렇게 보면 가사노동은 집안일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가정을 유지하는 노동은 무엇이든 해당한다. 회사 일, 공부, 운동을 포함한 자기 계발 활동 역시 직간접적으로 1인 가구라는 한 가정을 존속하는 동시에 어쩌면 2인, 3인 가구로 확장하기 위한 노동이다. 사는 게 노동이다. 회사에 휴가를 신청하는 사람처럼, 집에서도 자신의 눈치를 보며 쭈구리가 된다. 쉬면 쉴수록 불안하다. 언제나 등 뒤에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


“집에 가고 싶죠?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을 거야” (Zion.T - ‘꺼내 먹어요’ 가사)


자이언티의 가사에서 가사의 고단함을 떠올리는 사람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두드려주고 싶다.  모든 의무적인 활동을 멈추고 퇴근하고 싶다. 퇴근하고 싶다. 퇴근하고 싶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나도 루덴스인가 뭔가 하는 존재가 되어 마음 편히 놀 수 있을 것 같다. 


집 밖에서도 안에서도 놀지 않는다면 언제 마음 놓고 놀 수 있을까? 놀이가 무려 인간을 동물이 아니게 해주는 본질이기까지 하다는데 말이다. 원 없이 놀았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 속을 들여다보니 그 언제가 언제인지, 절벽 아래처럼 아찔하고 아득하다. 알고 보니 나는 Homo가 아니었다.




Photo by Ciro Morr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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