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어리 May 30. 2022

점 대신에 쉼표 두 개

“G마켓에 들어가서 이것 좀 주문해라,,”


문자 메시지에 꼭 점 대신에 쉼표 두 개를 찍는 아버지. 부모님은 인터넷 주문을 할 줄 모른다. 아들 된 도리로 인내심 있게 부모님께 방법을 알려드리지 않은 내 탓이다. 가르쳐드리려면 또 한 바탕 감정을 소모할 생각에 지레 지쳐서 매번 직접 주문해드린다. 본가에 들르는 날에는 밀린 주문을 순서대로 처리해드린다. 매주 찾아뵐 정도로 효성이 깊지 않아서,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문자로 보내달라고 말씀드렸다.


동네 마트에서는 찾을 수 없는 건강식품이나 잡화를 쉽게 구할 수 있음을 알게 된 부모님은 거의 매번 내가 본가에 갈 때마다 심부름을 시킨다. 쓰레기 분리수거도 집안 청소도 아니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모니터와 스마트폰 화면을 번갈아 쳐다보며 타이핑을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땀 한 방울 나지 않는 쉬운 일. 나는 이 단순하기 그지없는 일을 심적으로 고단한 ‘일’로서 받아들인다는 이유로 피로감과 죄책감을 느낀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IT에 취약하다는 점이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나를 양육하면서 희생한 부모님의 노고를 갚을 기회라고 여겼다. 그렇지 않아도 무뚝뚝한 외아들이니 인터넷 쇼핑을 대신해 드려야 한다는 의무감에서라도 본가를 찾을 빌미가 되고, 문자 메시지라도 주고받을 소재가 될 테니까. 착각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아주 효심이 깊고 선한 사람인 줄 알았다. 만성피로와 무기력함에 빠져 사는 나의 인내심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추한 바닥을 드러냈다.


부모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이라 말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미지근하다. 혹시 나라는 사람의 마음이 어딘가 망가진 건 아닐까 두렵기도 하다. 날 때부터 고장 났거나, 아니면 살면서 모르는 사이에 맛이 간 걸지도 모른다. 자식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마음보다도 서운함이 앞선다.


인터넷 주문이라는 사소하고 하찮은 일도 부탁이 아니라 명령조로 말하는 아버지가 미울 때가 있다. 해줘라가 아니라 ‘해라.’, 고맙다가 아니라 ‘수고했다.’로 끝나는 대화가 정이 없다. 만약 내가 아들이 아니라 남이었다면, 예를 들어 어떤 인터넷 쇼핑몰 직원이었어도 ‘∼해라’라는 말을 들을까 싶다. 아버지에게 “이것 좀 해주겠니?”라며 다정한 어조로 부탁을 받기란 이번 생에는 좀 어려울 것 같다.


아버지에게 조금 더 말을 부드럽게 해달라고 말할 용기는 없다. 아버지는 내게 완고한 불통의 존재로, 나는 아버지에게 별 감정 없이 명령어를 입력하는 무뚝뚝한 로봇으로 서로에게 자리매김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운명 공동체다. 감동적인 글을 써도 모자란 공백의 공간에 굳이 애정결핍 티를 내는 글을 남기는 이유는 세상에 나만 이런 뒤틀린 마음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서다.


아무래도 일은 그냥 일일 뿐인가 보다. 심부름의 빈도만큼 가족애가 싹트고 효심을 마일리지처럼 적립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사랑이 필요했다면 그냥 처음부터 사랑을 했으면 되었을 일이다. 일이 아니라 사랑을. 사랑이 자라날 수 있도록 나부터 다정한 마음을 표현하고 주고받았으면 될 걸. 일을 해서 될 일이었으면 뭐, 일이 일상인 회사에도 동료애와 존경이 넘치게?

매거진의 이전글 알고 보니 호모가 아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