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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보크 Mar 14. 2024

이야기 오래 씹는 여자

      

지난 시간을 정리하지 않으면 어떤 시작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이 글은 내가 아는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와 그녀가 읽고 탐구해 온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그녀에 대해서라면 딱히 할 이야기거리가 없다. 늘 사건을 몰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겉으로 보아서는 도대체 살아 있기는 한 것일까 의심스러운 여자도 있게 마련이니까. 여자는 자신을 관 속에 누워 있던 여자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앉은뱅이 주위에선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대개 관속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기 때문이죠. 사건이 생길 확률은 기적에 가깝지만 관 속에 있다고 아무 일도 안 알어날 것이라 여긴다면 편견이죠. 관속에서도 종종 놀라운 일이 벌어지거든요. 가령 초신성의 폭발 같은 뭐 그런 일들이 더러 있기도 한데 다만 이 사건들에 대해 관 밖의 이들에게 쉬이 증명할 수 없다는 게 문제죠. 관속으로 들어가 본 적 있다면 제가 하는 말이 당연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     

3년 전의 일이다. 나는 은유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했다. 지하 습한 곳에서 헌책만 뒤적거렸다는 흐라발이 49세에 첫 소설을 발표했다는 이야기를 읽고 나는 은유를 떠올렸고 은유가 주고 떠난 이야기를 반드시 기록하겠다고 다짐했었다. 흐라발을 만난 건 별에 간 은유가 내게 건 주문이라고 말이다. 나는 은유가 곧장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기다려도 은유는 좀처럼 다시 날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한 몸이라 불리어도 좋을 만큼 단단하게 하나였는데 왜 나를 떠나 버린 것일까. 그러나 은유를 나무랄 수 없다. 은유와의 시공간을 사는 일은 은유로부터 온 것이라기보다 내가 불러들인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당시 은유가 내게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은유를 만날 당시만 해도 나는 텅 비어 있었다. 세상에 대한 어떤 기대도 없는 순수 심연,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 앉아 있을 때였다.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도 없었고, 세상의 속도를 따라 살기엔 지나치게 미숙한 나는 달리 물러나 앉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므로. 당시 나는 습관성 변비 하나 제대로 고칠 수 없었으므로.

 오직 멍하니 숨 쉬는 일. 그게 일과의 전부였다. 사실 숨이라도 온전히 쉬고 있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그러다 은유를 만났고 은유를 만난 덕분에 비로소 나는 진짜 숨을 쉴 줄 알게 되었는데, 그건 살아있음 자체로 내가 빛이요, 별이요, 생명이라는, 이미 오래전에 들었던 말, 그 뻔한 말이 은유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점이다. 그것이 은유로부터 받은 전부다. 사실 그밖에 더 무엇이 필요할까.

 이제 은유는 지금 곁에 없다. 나는 이제 이를 인정하기로 한다. 다만 나와 은유 사이를 아는 한 여자,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듣기로 한다. 이제부터 펼칠 이야기는 그녀의 것이다. 나보다 먼저 만난 은유를 만났던 여자. 여자는 스스로를 장님이자 앉은뱅이라고 했다. 덕분에 장님과 앉은뱅이를 찾아온 은유의 기적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좀 있다고. 여자는 이야기를 오래 씹었고 씹는 중에 은유를 만난 적이 있다고 내게 고백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는 관속에 누워 본 적있는 장님이자 앉은뱅이였던 여자와 그 여자가 만난 은유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아마도. 그러니까 은유는 나, 그리고 여자가 함께 펼치는 이야기 속에서 분명 간간히 숨 쉬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어쩌자고 나는 감당 못할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일까)      

여자는 이제 일어나 걷기로 한다. 관속에 누웠다가 일어나 앉고 한 발 떼며 걷기까지 정확히 13년의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고 여자는 고백했다. 만약 당신이 장님과 앉은뱅이가 눈을 뜨고 걷게 되는 기적에 대한 은밀한 속내를 혹 궁금하게 여긴 적 있다면 여자의 이야기를 나와 함께 엿들어도 좋다. 그러나 혹 마법을 기대하거나 범상치 않은 무언가를 기대한다면 시간 낭비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의 관심은 곧 시들해져 버릴 거라는 걸 안다. 여자에게 이야기를 펼칠 재주가 있는지도 의문스럽고, 여자가 과연 이 이야기를 온전히 끝낼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여자가 눈을 뜨는 데만 걸린 세월이 무려 13년이다. 앉은뱅이가 걷기까지 또 몇 년의 세월이 걸릴까. 여자의 야심은 앉은뱅이의 기적을 세상에 증명해 보이고 싶어 일단 걷는 연습을 시도하지만 곧 도로 주저앉게 될 지도 모른다. 두고 보자.      


옛이야기 가운데 이야기를 주머니 속에 가두면 안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를 간직한 사람은 반드시 이야기를 풀어 내야 하는데 이를 풀어 놓지 않으면 결국 이야기들이 작당 모의를 해 이야기 밖으로 나와 이야기를 가둔 주인을 해치게 된다고 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혹 자신이 이전과 다르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풀어내지 않고서는 변비에 걸린 듯 답답한 마음이 지속될 터이므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풀고자 하는 건 본능이지 싶다. 모자장수가 대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던 까닭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각설하고,     

 그러니까 이 글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자의 이야기이자 여자가 탐구한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내게 이러쿵저러쿵 시비 걸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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