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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보크 Mar 01. 2021

환상을 품은 아이


환상을 품은 아이


그리 멀지 않은 옛날, 딱히 불행할 리 없는, 그래서 대체로 행복할 것이라 여겨질 평화로운 작은 시골 마을에 어린 소녀가 살고 있었어요. 이제 갓 여섯이거나 일곱 아니면 그보다 좀 더 나이를 먹은, 아마도 여들이라거나 아홉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요. 글을 겨우 읽을 줄 아는 나이였을 테니까요.      


한가로운 마을 풍경이 떠올라요.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지 몰라요. 아마도 모두 일터에 나가 있을 거예요. 대개 마을 정자를 지키는 건 아이들이었으니까요. 아이들 틈으로 그 아이가 보여요. 그래요. 그 아이. 분명 평화로워 보이는 날들이 흘러가고 있지만, 어쩐지 마냥 행복한 것만 같지는 않은 그 아이.

아이는 여섯 살, 이른 나이에 동네 언니들을 따라 학교에 갔어요. 두어 살 많은 언니들은 이제 친구가 되었고 아이는 늘 그 틈에서 놀았어요. 그러니까 아이의 나이는 여섯이거나 여덟, 아니면 아마도 아홉이거나 일곱. 그렇게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어요.      


놀이를  할 때면 아이는 늘 콩깍지였어요. 이 편과 저 편 사이, 경계에 놓인 깍두기. 어디든 속할 수 있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수 있는, 그저 덤으로 주어지는 자리. 렇게 아무것도 아닌, 딱히 쓸모없는, 텅 빈 상징에 지나지 않는 비존재의 자리였지만, 동시에 그 자리는 그래어디든 속할 수 있는, 둘 모두를 포함할 수 있는, 그리고 아주 가끔은 그 덤이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이 되기도 했다고, 아이는 그렇게 느껴요. 놀이를 제일 못해 얻게 된 자리지만, 늘 언니 같은 친구들보다 땅따먹기도 고무줄놀이도 핀치 기도 항상 제일 못한 바보였지만, 분명한 건 이상하게도 늘 보호 속에 있었다는 거예요. 아주 따스한 품이었다고요. 아이의 기억이 혹 왜곡이 아니라면요.


그런 아이도 유일하게 잘하는 놀이가 하나 있었어요. 숨는 거요. 아이는 종종 숨바꼭질을 했어요. 마을 정자나무 아래 누군가가 시작한 숨바꼭질.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웅크리고 앉아 똬리를 틀고, 가장 작은 평수로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게 죽은 듯이 존재를 감춰버리는 일. 아이는 그게 좋았어요. 술래가 찾다 지쳐 포기할 때까지, 땅거미가 다 내려앉아 모두 돌아간 시간에도 아이는 혼자 남아 그 자리에, 그렇게 멍하니 있는 게 좋았어요. 몇 시간이고 그렇게요. 그리고 혼자 씩 웃어요. 자신이 이겼다는 걸 아무도 모를 지라도, 마치 자신이 영원한 승자가 되어버린 것처럼요. 사실 아이가 그런 의식을 한 것 같지는 않지만, 아이는 그저 좋았어요. 다만, 그렇게, 그 시간이요.


 아이는 숨바꼭질을 하며 한 해 두 해 자랐어요. 아마도 그런 날 가운데 하루였을 거예요. 여름 한 낮. 그날도 술래잡기를 했고 아이는 숨을 곳을 찾았어요. 탱자 가시 울타리 아래, 탱자 향 가득 퍼지는 아이의 집. 담 아래 작은 뒷간. 거긴 숨기에 참 좋아요. 아무도 아이가 거기 숨을 거라고는 상상 못 하니까요. 냄새 때문에라도 곧 기어 나올 테니까. 물론 아이도 처음부터 거기 숨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고요. 술래에게 쫓기다 마침 쉬가 마려워 어쩔 수 없이 들어갔고, 술래에게 들킬까 봐 차마 나올 수 없었다고. 그러다 그만, 너무 오래 그곳에 머물러 버리게 되었다고요. 탱자 향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뒷간 냄새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인지 아이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거기서, 참 아무렇지도 않게 오래 버텼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 이야기를 만났어요. 휴지로 쓰라고 둔 찢어진 책 쪼가리들요. 겨우 글을 읽을 무렵, 거기, 그 뒷간에서, 아이는 고향이 되어버린 이야기를 하나 만났어요.


 당신도 혹시 겔다 이야기를 아나요? 매혹적인 여왕을 따라 눈의 나라로 떠나버린 소꿉친구 가이. 그런 가이를 구하려고 집을 떠나 눈의 나라로 가게 된 겔다의 이야기요. 아이는 겔다가 결국 '눈의 여왕'과 싸워 자신이 사랑한 소꿉친구 가이를 따뜻한 고향의 품으로 돌아오게 할 거라 믿었어요. 아이도 그런, 따뜻하고 씩씩한 겔다이길 꿈꾸면서요...

  

 가끔씩 어떤 정체 모를 슬픔이 아이를 콕콕 찔러와요.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그러니까, 아마도 이런 거예요. 소꿉놀이의 공주처럼 모두가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꾸며주고 함께 행복해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공주의 얼굴에 이상한 분칠을 하고선 자기들끼리 깔깔대고 웃어요. 공주는 한순간 광대가 되어 버리고요. 한순간에 아이의 눈에 비친  이 세상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아요. 세상은 온통 차디찬 눈의 나라로 변하고 말아요. 충만한 행복과는 아주 먼 거리에 있는 것처럼요. 아이도, 아이의 눈에 비친 사람도, 이 세계도, 모두 포장을 벗기면 추악한 진실이 드러나는, 결코 이 세상은 그리 아름다운 공간일 수 없다고 아이에게 누군가 속삭여요. 그리고 아주 오래 그 감정이 아이 곁에 머물러요. 

아이는 생각해요. 어쩌면 미운 건 예뻐 보이고 예쁜 건 못나 보인다는 여왕이 보낸 눈의 나라의 깨진 유리 조각이, 어느새 이 세상에도, 아이의 품에도 파고들었는지 모른다고요. 

눈의 나라의 유혹에 빠진 건 가이만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고. 눈의 나라로 떠난 겔다도 어쩌면 눈의 나라에 매혹되어 길을 떠났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겔다는 지금 자신이  가이를 구하려고 왔다는 사실조차  어버린 채, 눈의 나라에서 얼음조각들이 눈에 박힌지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요.

 아이 곁엔 어둠의 밤들이  머물고, 아이는 그 속에서 지쳐 쓰러져 . 그렇게 참 오랜 시간 흘렀을 거예요, 아이는 잠을  자요. 꿈도 없는 잠을 아주 오래요.


 아이는 문득 꿈을 요.  아이는 성냥팔이 소녀가 된 겔다만나요. 성냥을 긋다 그조차 다 떨어질 즈음, 춥고 어두운 나라에서 그대로 쓰러져 잠들어 가는 소녀 겔다요. 성냥 사세요...

멀리 서는 네온사인이 꽝꽝거리고, 징글벨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산타는 성탄 폭죽을 터트리지만, 유행이 지나버린 아무도 사지 않은 성냥을 꺼내 제 몸의 온기라도 이어보려는 성냥팔이 소녀 겔다. 겔다보여요.

그제야 고향의 푸른 초원. 따뜻한 품과 햇살 한 줌. 그게 얼마나 그리웠는지를 떠올리는 성냥팔이 소녀 겔다 가요.


아이야.  성냥 불로 잠시만 추위를 녹이고 있으렴. 자신을 데워 환하게 다시 환하게 빛날 거야. 그렇게 살아날 거야. 어디선가 우리를 구하러 올 거야. 빛이 환한, 이 빛을 따라 누군가 올 거야. 그러면 온 우주가 새로운 봄의 탄생을 맞을 거야. 얼음 나라는 이제 곧 물러가고, 곧 따뜻한 봄이 올 거야. 그 봄이 너를 맞을 거야.     


아이에겐 어디선가 자꾸 이런 이야기가 들려와요. 기어코는 봄을 맞고 마는, 아주 순진한 오랜 옛이야기 들이요.       


    


***

이 이야기는 잊히지 않는 어린 날의 어렴풋한 인상과 지나온 세월의 흔적이 함께 기운 옷 한 벌다. 기억하는 자의 의식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발견한 몇 가닥의 실을 가지고 자신의 비루한 인생을 폼나게 지어보려는 몸짓 말이다.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낳은 자신만의 우화.

 '눈의 여왕' 내 기억 안에선 분명 어릴 때 읽은 첫 번째 동화다. 실제 난 숨바꼭질을 하러 탱자 울타리 아래 그 뒷간에 숨었고, 거긴 참 숨기에 좋았다. 아무도 더러운 똥 간을 일부러 열어보려 하진 않을 테니까. 거기서 난 뒷장이 찢겨 나 이 동화를 홀린 듯 읽고 그 뒷 이야기를 혼자 상상하며 한참을 보냈다.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이 사건은 이제 와 생각하니 마치  인생 전체에 대한 은유인 것만 같다. 실제 내가 기억한 그날의 이야기이자 나 삶의 여정 전체를 상징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자신에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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