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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보크 Apr 01. 2024

다시, 옛이야기를 읽는 시간

다시, 프롤로그

1.


이야기를 좋아했다. 어릴 적엔 의미도 모른 채 마냥 재밌게 읽었고, 그것으로 족했다. 사람이 알을 낳고 쑥과 마늘만 먹으면 곰도 인간이 된다. 신한테 빌기만 하면 바다가 쩍 갈라지고,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고, 물 위를 걸을 수도 있다. 금 나와라 뚝딱 하면 금이 나오는 도깨비방망이가 있고, 박을 타면 금은보화가 우수수 쏟아진다. 고래 뱃속에 들어가도 삼일 만에 빠져나올 수 있으니 얼마나 신기한 세상인가. 누비고 다니며 신비한 기적들 속에 푹 빠져들면 되는 거다.


 은근슬쩍 기대도 해본다. 조건이 있긴 하지만 딱히 어렵지 않아 보인다. 착하게만 살면 된다 이거지. 이야기처럼 착하게만 살면 도깨비가 방망이를 줄지도 모르고 산타가 선물을 줄지도 모른다. 착한 일을 손으로 꼽아보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산타의 선물을 기대해 보지만 혹시나는 매번 역시나로 끝나고 만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울지 말랬는데 울었고, 부모님 말씀에 순종 안 하고 따박따박 대들었다. 일기도 열심히 안 썼고 거짓말도 많이 했다. 생각해 보니 잘못한 일이 너무 많다. 그렇다. 아직 자격이 없다. 다음 해를 기약한다. 그러나 작심삼일이다. 기대는 점점 실망으로 변해 간다. 드라마 속 아이들은 산타의 선물을 꼬박꼬박 잘도 받는데 왜 나는 못 받을까. 진짜 산타는 굴뚝을 타고 다니느라 내가 사는 촌구석까진 못 오는 걸까. 그렇다면 차라리 산속에 사는 도깨비한테 방망이를 달라고 소원을 비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어쩌면 저건 신포도일지 몰라. 다 거짓부렁 아닐까. 슬슬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멋모르고 어설프게 믿다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별다를 것 없는 현실에 점차 눈을 떠 가면서 옛이야기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그렇게 시시해져 갔다. 그러다 라임오렌지나무의 제제처럼 산타는 부잣집 못된? 친구에겐 해마다 어김없이 방문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제제와 함께 펑펑 울었고, ‘신비한 기적 따윈 개나 줘버려’. 가차 없이 옛이야기(신화)에 대한 미련도 버렸다. - 상대적 박탈감에서 비롯된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한 의문, 신의 정의와 기적에 대한 내 의구심의 기원은 아마도 이 무렵부터 내 뇌리에 똬리를 틀고 앉지 않았을까.


할머니 말이 옳았다. 드라마에 흠뻑 빠져 우는 날 보고 다 거짓부렁인데 왜 그런 걸 쳐다보고 눈물바람 하냐고 참 쓸데없는 짓이라 했던 할머니. 내 할머니는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정감 어린 할머니는 아니었다. 사실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정감 어린 할머니가 존재하는지조차 내겐 의문이다. 주변에서 만나기 쉽지 않았으므로. 대신 할머니의 허리춤에서 알사탕과 밀크캐러멜이 종종 쏟아졌고, 어쩌면 진짜 기적은 그것인지 모른다. 할머니에겐 옛이야기 따윈 필요 없었다. 자신의 삶으로 기적을 그려냈으니까. 식민 치하와 전쟁의 폐허더미 속에서 오직 근면 성실을 무기로 가난 극복의 신화를 써낸 할머니. 할머니의 역사는 당대 모든 이들의 역사이기도 했으리라. 그들 덕분에 풍족했고 절대 빈곤의 결핍감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랄 수 있었다. - 물론 산타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은 이와 분명 다른 문제다.- 근면 성실과 불굴의 의지로 이뤄낸 성공 신화를 써낸 윗 세대의 삶. 그처럼 살아야 한다고 막연히 믿었던 탓일까. 나의 뇌리에 똬리를 틀고 앉은, 현실적인, 실용적인,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쓸모를 증명하고 싶었던 내 의식과 달리 의지부족에 대한 자책과 무력감, 뿌리 깊은 열등감만 키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왔고, 무엇이 내 문제의 뿌리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로 비대해진 내 뇌는 한동안 자신에 대한 부정과 의심, 평가와 재단, 그리고 자책의 깊은 늪으로 빠져 들었다.


세상에 적응해 가려고 객관과 이성, 외부의 합리적 세계를 추종한 만큼, 세상의 진실을 정확히 파헤치는 예리한 시각을 갖길 원한만큼, 논리적 인과에 들어맞지 않는 이야기들은 황당무계한 것들로 치부했고, 사고를 중시한 만큼 감정과 본능적 직관의 영역은 유치하고 미개한 것들로만 여겨졌다. 그렇게 나는 외눈박이가 되어 갔다. 후에 알고 보니 내 심리적 고통의 근거는 그것이었다. 어린 시절처럼 비현실적 이야기를 즐기며 웃고 울 수 있는 마음. 맘껏 상상하고 꿈꾸는 공상의 세계. 그렇게 맘껏 놀 수 있는 마음을 상실해 버렸다는 것. 늘 외부의 시선만을 의식하며 거기 맞추려고 종종거리며 사느라 내면의 이야기를 잃어버렸다는 것. 이야기를 마냥 좋아하고 꿈꾸던 그 아이를 골방에 처박아두고 오랫동안 굶겼다는 것. 알고 보니 그것이 문제의 원인이었다. 다행히 그 아이는 골방에서 죽지 않았다. 어느 날, 내가 세상의 적응에 실패했다고 느끼며, 그간의 헛된 노력을 포기하기로 마음먹게 된 그날 이후, 딱히 어떤 욕망도 강박도 남아있지 않은 그런 순간에 아이는 다시 살아나 나를 찾아왔다. 어린 시절처럼 한가해진 그 시간의 틈으로 아이는 다시 자신이 버린 옛이야기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어릴 적 느낀 순진한 환상과는 사뭇 다른 얼굴로 옛이야기는 아이를 안내했고, 덕분에 그 아이는 지금 물오른 순진한 기쁨 속에 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life of pie )를 기억하는가. 배가 침몰된 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파이가 들려준 299일의 이야기. 침몰 이후 살아남기까지의 과정을 질문하는 조사원에게 파이는 들려준다. 난파된 후 호랑이 리처드파크와 우정을 나누며 함께 기적처럼 살아남게 된 가슴 따듯한 동화 같은 이야기를. 그러나 조사원은 이를 모두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치부한다.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있을 법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달라 했다. 그러자 파이는 이야기를 하나 더 들려준다. 생존을 위해 치러야 했던 혈투극과 인육으로 버텨야 했던 시간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묻는다. 둘 가운데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원하느냐고. 그리고 둘 중 어느 이야기가 당신에겐 진실로 여겨지는지에 대해. 당신은 이에 대해 어떤 답을 준비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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