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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보크 Oct 20. 2021

그냥, 혼잣말

단지 '인간실격' 감상 일지는 아니다.


인문학은 단순히 교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문제의 근본 뿌리에 대한 문제의식을 도출해 내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인문학은 비판의 정신이지, 사건을 긍정하는 정신이 아닙니다. 현재의 대중 인문학은 긍정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으며 위안의 정치일 뿐입니다.  

-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김진영의 벤야민 강의실에서)      

  

       

며칠 전엔 <인간실격>을 보다가 이 부 정의 대사에 꽂혔다. (솔직히 회를 거듭할수록 전개 방식이 아쉽지만 첫회를 보기 시작한 의리로 본다. 그러다 보면 간혹은 가슴을 후벼 파는 대사들을 만난다)      


“너 그렇게 사람 미워하면 병드는 건 너야. 어차피 넌 나 못 이겨. 그리고 넌 그렇게 깨끗해?”

사람을 회유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이정의 약점을 잡아두고 회유하려는 정아란에게 이 부정이 말한다.

( 나는 '부정'이란 그녀의 이름이 맘에 든다.)

꼭 이기려고 싸우는 건 아니잖아요. 이기진 못해도 상처를 줄 순 있어요...”      


나를 사로잡은 건 제 감정에 충실한 그녀의 솔직한 대사다. 부정의 차분한 답변은 아란의 생각과 달리 상대에 대한 미운 감정은 넘어선 듯 보였다. 진짜 싸움은 본래 ‘미움’이 사라지고 난 후에 하는 거다. 사람은 용서하되 잘못된 행위에는 맞서야 한다는 마음으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렇게 적당히 두리뭉실 넘어가는 동안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눈덩이처럼 악은 부풀어가고, 우리의 삶은 함께 점점 깊이 병들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 언젠가는 발가벗겨지게 될 것이라면, 상처가 되더라도 조금이라도 빨리 서로에게 솔직해지는 것이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더 나은 선택이지 않을까. 자신의 감정에 정직한 부정의 대사가 부러웠던 이유다.   

  



노안이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근시라 오랫동안 안경에 의지해 살아오고 있는데 요즘은 원시와 난시 현상까지 나타난다. 단지 시력만의 문제일까. 솔직히 사는 일도 그렇다.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도 자꾸만 의심스러워진다. 젊은 시절엔 근시안이 문제였다면 나이 들어가며 마음의 여유도 생기고, 이전보다는 멀리 내다보는 힘이 조금은 생긴 듯도 싶었는데, 요즘은 그조차도 원시 현상에 불과했던 건 아닐까 싶어 진다. 눈앞의 사물이 점점 흐릿해 보이면서 멀리 있는 사물이 차라리 더 잘 보인다고 느껴지는 착시현상 말이다. 사실은 시력도 인지력도 모두 점점 나빠지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고.   

   

내게는 비정상으로 느껴지는 일들이 이젠 다수의 상식이 되어 버젓이 정상 행세를 하며 너무 오랫동안 세상을 점령하고 있는 모양새를 보고 있노라면, 이런 것들에 때때로 분노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오히려 내 문제는 아닐까 싶어지는 것이다. 또렷하고 분명해 보였던 세상의 많은 일들이 점점 더 흐릿해 보이고, 예측하고 판단하기 어려운, 모호한 안개 상태로 다가온다. 분명 지독한 난시다. 이런 내게 도덕경의 구절들은 서글프지만 위로가 된다. 잠시 노자 뒤로 숨기로 한다.      


"딴 사람 모두 소 잡아 제사 지내는 것처럼 즐거워하고, 봄철 망루에 오른 것처럼 기뻐하는데, 나 홀로 멍청하여 무슨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세상 사람 모두 여유 있어 보이는 데 나 홀로 빈털터리 같습니다, 내 마음 바보의 마음인가 흐리멍덩하기만 합니다. 세상 사람 모두 총명한데 나 홀로 아리송하고, 세상 사람 모두 똑똑한데 나 홀로 맹맹합니다. 바다처럼 잠잠하고, 쉬지 않는 바람 같습니다. 딴 사람 모두 뚜렷한 목적이 있는데 나 홀로 고집스럽고 촌스럽게 보입니다...... "(노자도덕경. 20장 / 현암사.)      


도덕경 구절에 마음을 의지하면서도 솔직히 노자보다는 그리스의 등에가 되기로 작정한 소크라테스의 패기가 몹시 부럽다. 그는 ‘무지의 지’를 깨닫고 당대의 유명인들을 쫓아 가 그들이 진짜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지 따져 묻는 것으로 세상의 상식을 뒤집어보려고 정열적으로 시도해보지 않았는가.

현재의 명성과 부를 무기 삼아 마치 세상을 다 안다는 듯 큰소리치는 자의 면상엔 노자보다는 소크라테스의 패기를 빌어 기죽지 않고 침이라도 뱉어 줄 수 있는 배짱을 기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목숨. 눈치 그만 보고 당당하게 하고 싶은 소리 실컷 하고 욕먹다 죽어가는 생도 매력적이라고. ( 나는 주체적 존재의 의미를 이렇게 배우고 있는 중이다.)     


한동안은 잠잠한 줄 알았던 마음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살아 들끓어 오르는 느낌이다. 있는 그대로 세상을 긍정함으로써 평상심을 얻은 듯도 싶었으나 그것도 잠시 머무는 장소인가 보다. 마음은 쉬지 않는 바람처럼 불쑥불쑥 세상의 시류에 저항하고 싶은 감정으로 찾아온다. 세상은 비웃겠지만 내게는 시류에 불편부당함을 느끼고 분노하게 되는, 내 감정들이 소중하다고 여긴다. 나는 이런 내 감정이 ‘겨자씨만 한 씨앗’이라고 홀로 다독인다. 아무래도 긍정의 힘을 노래하는 건 내 몫이 아니듯 싶다. 훈훈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이미 차고 넘친다. 차라리 불편한 노래가 나의 정체성에 맞다고. 남은 삶은 눈치 안 보고 내가 바라고 느껴온 것들에 대해 맘껏 목소리라도 내고 죽어 가겠노라고 그렇게 자꾸 다짐하게 된다. 아직도 여전히 속으로만 부르는 노래일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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