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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보크 Nov 03. 2021

'봄(seeing)'은 '봄(spring)'을 낳을까.

1화 소경이야기 (장님 코끼리 만지기)


누군가는 ‘먹는’ 낙으로 산다고 하고 누군가는 ‘입는’ 낙으로 산다고 한다. 누군가는 ‘하는’ 낙으로 산다고 하고, 누군가는 ‘보는’ 낙으로 산다고 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아마도 나는 지금 ‘보는’ 낙으로 사는 편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대개 사람들은 ‘먹고, 입고, 하고’는 동적 행위로 간주하는 반면 ‘보고’는 정적 행위, 또는 무활동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보다’ 역시 분명하고 적극적인 행위다. 무엇을 보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먹고, 입고, 하는, 모든 동적 행위의 결과에 큰 비약을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는 행위를 낳는 씨앗이자 비약을 추동하는 가능태라고 생각한다.


 성과와 속도 중심 사회는 ‘봄’ 보다 ‘함’을 더 강조하고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봄을 놓친 함’은 성장의 뒷 그늘에 감당해야 할 짐을 태산같이 쌓아두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함'에 취해 제대로, 깊게 보지 않아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는' 사회에선 필경사 바틀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도리어 적극적 행위가 될 수 있듯,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을 보는 것 또한 삶을 살아가는 적극적  태도일 수 있다.


나는 이제 보지 못한 자들의 '봄'에 관한 이야기를 따라 옛길을 떠나 볼 예정이다.'봄(seeing)'이라고 쓰고 '봄(spring)'이라고 읽어 본다. '봄'이 '봄'을 낳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1화.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우물 안 개구리’에 관한 이야기로 서두를 시작 하려 했다. 나무만 보느라 숲을 보지 못 예로 둘을 함께 가볍게 언급하고,  '본다'는 것의 적극적 의미를 찾아 개안 설화를 추적해  작정이었다. (이젠 두르라고, 지나치게 늦장 부리고 있다고, 이젠 '봄'에서 '함'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치던 중이었다.) 


좁은 단견에 갇혀 있는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을 풍자한 우화로 두 우화를 잠시 가볍게 언급하려 했을 뿐인데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우화 속 '장님'이 툭 튀어나와 말을 거는 것이다. 자신을 ‘우물 안 개구리’와 동격으로 뭉뚱그려 취급하지 말라고 했다. 왕과 구경꾼의 왜곡에 억울하다고 했다. 어떤 왜곡이냐고 묻자, 대뜸 ' '본다'며? 그럼 그건 찬찬히 보아야 할 당신 몫'이라더니 사라져 버렸다. 자신의 입장을 전혀 모르는 듯 보여 화가 난 걸까. 장님은 도대체 무엇이 억울하다는 것일까. 기억 속에 있는 우화를 다시 꺼내 보기로 했다.  


인도의 한 왕이 장님들 앞에 코끼리를 데려다 놓고 눈앞의 형상이 무엇인지 맞춰보라고 한다. 장님들은 탐색을 시작한다. 다리를 만진 이는 기둥이라고도 하고 귀를 만진 이는 부채라 하고 코를 만진 이는 뱀이라 하고 몸을 만진 이는 벽이라고 한다. 장님들은 각자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주장하며 서로 싸운다. 이 모습을 지켜보며 왕과 구경꾼들은 배꼽을 쥐며 깔깔대며 웃는다.( 오래전 읽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우화의 내용으로 출처가 정확하지 않다.)


장님을 만난 탓일까. 이젠 왕과 구경꾼들의 모습이 몹시 거슬린다. 이 우화에 대한 고전적 해석은 장님들을 사물의 전체상을 파악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로 본다. 왕과 구경꾼들이 장님을 바라보는 관점그대로 투영되어 보인다. 그런데 삐딱하게 바라보니 의문이 생긴다. 왕과 구경꾼들은 코끼리의 전체상을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 역시 다만 볼 뿐 아닌가. 시각기능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본 전체상이란 것도 기껏해야 시각의 유무에서 비롯된 차이리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장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시각을 가진 자가 시각 기능을 잃은 자들에게 자신들에게 익숙한 시각을 기준으로 정해진 답을 맞히라고 강요하는 꼴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가진 자의 황포라고 말이다. 아닌가.


그들은 자신들이 전체상을 안다고 믿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이 가진 시각을 기준으로 ‘이것은 코끼리다’라고만 볼뿐, 코끼리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해선 별다른 관심이 없었는지 모른다. 만약 들이 사물의 전체 구조를 다면적으로 파악하길 원하고 관심을 갖고 있었다면 장님들의 주장도 다각도에서 신선하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들 역시 장님을 비웃을 자격이 없는 게 아닌가.


솔직히 장님의 입장에서 보면 답을 쉽게 맞히지 못하는 당연하다. 시각의 결핍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은 결핍을 메우려고 남은 감각기관을 동원해 탐색하고 추론하려 했다. 비록 전체상을 파악하진 못했다 하더라도 이들의 추론은 각 부분이 지닌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나름의 설득력도 갖추고 있다. 다리는 기둥을 닮았고 코는 뱀을 닮았으며 귀는 부채를 닮았고 몸은 벽을 닮았다. 갑자기 이들의 답이 모두 상상의 꽃으로  피어난 아름다운 세계로 보인다. 어쩌면 코끼리 속에서 우주가 펼쳐질 수도 있겠구나 싶어 진다.

 관점을 달리 하면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 장님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다. 부분에 갇혀 전체상을 인식하지 못한 이들이라고 규정짓기에 앞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무수히 많은, 다른 관점을 들을 통해 섬세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어야 했다. 오류라 해도 장님들은 보이지 않은 것을 보려고 한 자들이었다. 흔히 세계의 참된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이라며 비난하지만 뒤집어 보면 보이는 현상으로만 사물을 보는 태도에 갇혀 있는  왕과 구경꾼 들일 수도 있.

 

왕과 구경꾼들이 코끼리의 전체 구조와 본질에도 관심이 있다면 장님들을 불러다 놓고 무엇을 했어야 할까. 자신들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다양한 가능성의 세계를 장님들에게 배우려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비록 부분적 인식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경험적 진실이 담겨있음을 확인하고, 인식의 오류를 지적하기 전에 장님들이 펼치는 주장의 맥락을 살펴볼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 속에서 코끼리의 각 부분이 어떤 모습과 기능을 하고 있는지를 새롭게 자각수는 없는 것일까.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오히려 오이디푸스와 같이 눈 뜬 장님임을 깨닫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덕분에 다양한 형태로 비칠 수 있는 코끼리를 더 멋지게 상상하게 될지도 모르고 말이다.


오류라 할지라도 장님들은 시각의 결핍 덕분에 새로운 방식으로 탐색할 기회를 얻고 있다. 모르기 때문에 만지고 느끼려고 했다. 각자의 아상에 사로잡혀 싸우고 있는 상태지만 부딪히고 갈등하는 과정은 사물의 전체상을 파악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 되기도 한다. 같은 사물을 보고도 도대체 왜 우리가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일까. 이들 가운데 누군가 이런 질문하기 시작했다면 말이다. 장님들이 진짜 답을 찾기 위해 서로의 주장에 귀를 열기 시작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들 각자가 만져보고 느낀 부분을 바탕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전체상을 재구성하게 되지 않았을까. 시각을 기준으로 한 왕과 구경꾼들의 답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구조물이 그들에 의해 재창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그려낸 세계를 거꾸로 왕과 구경꾼이 풀어야 하는 순간이 오게 될지도.

 

장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 우화는 힘 있는 누군가의 권위와 다수의 시선으로 정해진 정답 맞히기 게임에 멋모르고  참가해 자기 목소리를 내어보지만 비웃음거리가 되고만 이야기가 다. 힘없는 소수자의 주체적 인식이 사회 집단의 객관적 지표 아래 폄하되고 있는 현장을 보여주는 서사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해석하는 주체의 관점에 따라 이야기의 전체상은 달라질 수 있다. 전체상은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늘 새롭게 재창조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오류라고 한다. 관찰자의 시선이 사물의 전체상을 지각하는데 개입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객관적 진리, 보편적 상식도 고정불변한 틀이 아니다. 그러니 객관을 부정해도 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불확실하고 부정확하다해객관의 틀은 분명 모두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다만 다수 필요와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객관과 보편과 상식이 주객전도되어 점령군처럼 군림해 개인재단하고 구속하 짓누르고 있다면 그것들의 이면을 제대로 려는 노력을 해 하지 않을까.


나는 우화 속 장님들이 역지사지하며 협력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코끼리의 전체상을 다시 창조해낼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왕과 구경꾼도 함께 끌어들여 수평적 차원에서 서로의 눈을 뜨게 할 그런 서사는 없는 것일까.   '봄'이 '봄'을 낳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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