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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보크 Jun 07. 2021

신화를 읽는 마음

신화는 무의식의 창이다.


 "신화는 사실이나 허구가 아닌 진실의 역사다." (마르치아 엘리아데)


어린 시절. 마을 입구에는 500년을 산 고목이 있었다. 종종 그 등걸에 걸터앉아 동무들과 해지는 줄 모르고 오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등걸에 기대어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당시에는 어쩐지 나무가 하늘도 우리의 이야기도 모두 품어주는 듯 여겨다. 아없이 주는 나무라 배웠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게 고마워했다. 그러나, 그렇게 나무의 존재 가치는 그저 내 필요와 쓸모를 위해 존재했을 뿐, 정작 나는 나무의 마음은 몰랐다. 사실 나무에게만 그러했을까...


다시, 나무를 찾는다. 500년을 살아온 나무는 500년의 나이테 안에 얼마나 많은 사연을 품어 을까. 오백 번겨울을 봄을 맞았을 나무. 그렇게 천둥과 벼락을 맞으며 죽고 살기를 듭해 왔을 나무의 시간. 이제야 나의 할머니의 할머니들이 당산나무 아래 밤을 새워 정성껏 기도해 온 그 심정 조금은 알듯하다. 자신에게 닥친 인생의 시련을 살아내 법을 나무에게 묻고, 나무와 교감하며 나무의 마음을 배워  옛사람의 시간을. 나무의 시간 기대어 자신의 겨울도 다시 봄을 맞을 것을 믿으며 기도해 온 옛사람의 마음을.

물론 여전히 나는 나무의 마음도, 사람마음 모른다. 모르는 채로 다만 내가 지나 온 세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 가고 있다고 여기는 것일 뿐. 이것이 해석의 전제다.



 

어린 날엔 마냥 재밌게 읽었던 옛이야기들이 자라면서는 비현실적이고 유치한 수준의 이야기로만 느껴졌다. 어떤 신화는 말도 안 되는 막돼먹은 이야기의 나열로 보였고. 어떤 신화는 현실과 괴리된 윤리의 강요로 보였다. 신들의 이야기에 대한 거부감도 커갔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류사에는 실제 신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죄악이 또 얼마나 많은가( 물론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저질러진 죄악도 많다.).

마음의 겨울이 찾아왔고 그제야 겨울에서 봄을 맞는 나무의 시간이, 그 시간을 보낸 옛사람들의 이야기들이 가슴으로 다가왔다. 신을 찾고 신을 부르인간의 마, 신화를 읽는 마음속에 이성과 논리에 길들여져 가며 놓친, 내가 몰랐던 또 다른 마음이 숨 쉬고 있 배웠. 신화의 표피만보고 내 방식대로 판단하고 비판하며 거부해 왔다는 사실 깨달았. 내 마음속에도 프루크루테스의 침대를 가진 괴물이 살고 있었다. 딱 내 수준의 침대를 가지고 멋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이 세상을 재단해 온 그 괴물. 나무의 마음도,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스스로는 헤아리고 있다고 여겼지만, 모두 내 우물 속 헤아림이었을 뿐이었다. 


나무가 시간의 나이테를 품고 있듯 수천 년을 살아남아 전해 내려오는 신화 속에  나이테  담겨 다. 실제 신화의 속살을 들여다보 신화는 윤리 너머 있는 인간 마음. 그 원초적인 욕망들이 적나라하게 뒤엉 현장이. 묻어 둔 내 감정. 내 그림자가 거기 있었다. 그럴듯하게 스스로를 포장해 둔 '나'는 신화 속 인물들을 윤리적 잣대로 비난했지만, 사실 그들은 모두 감춰둔 나의 다른 얼굴이었다. 스스로를 바르다고  믿는 건, 사실 얼마나 순진하면서도 교활한 착각인가.


나는 아버지 크로노스가 삼켜버린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일 수도 있고, 그렇게 자식을 삼킨 크로노스처럼 다시 내 자식을 삼키고 있는 크로노스 수도 있었다. 크로노스의 아내 레아는 남편 크로노스를 속여 아들 제우스 구고, 살아남은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제거해 그의 몸에서 자신의 형제자매를 구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화를 썼.

 그런데 나는, 내 의식과는 다르게 내 몸은, 지난 세대의 인습 맞서지 못하고 회피한 채, 여전히 크로노스의 몸에 갇혀 있는 아닐까. 이런 내가  크로노스의 아내 레아처럼 우스만이라도 살려낸 그런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우리 옛이야기를 떠 올려 본다. 떡을 들고 고개를 넘어 간 오누이의 엄마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호랑이만 돌아와 오누이를 집어삼키려고 했을 뿐. 이 일을 떠올리면 나는 아이에게 어떤 엄마일까를 묻게 된다. 그래도 호랑이를 피해 오누이 만인을 비추는 해와 달이 되었으니 다행스럽고 아름다운  아니냐자위해야 하는 걸. 이야기 속 엄마는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 듯하다. 엄마가 호랑이에게 먹히지 않고 무사히 살아 돌아와 이 땅에서 평화롭게 공존할 수는 없었던 것일( 물론 우리 신화에는 역동적인 모성의 힘을 보여주는 건강한 신화가 실제 많다. 단면일 뿐이고, 스스로에 대한 반성 차원의 부분적 해석일 뿐이다.).


 신화 속 영웅들은 대개 음 세대의 괴물이 다. 아버지 우라노 제거한 크로노스도, 크로노스를 제거한 제우스도 자신이 믿어 온 당대의 시대정신( 욕망)에 갇혀 다음 세대의 시대정신(욕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이 다음 세대의 짐이자 영혼의 그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우리는 자식을 위한다고 믿지만, 호랑이에게 잡아 먹주체의식조차 상실 엄마가 되어 무의식 상태에서  자식 아먹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오직 남 보기 먹음직스러운 자식을 바라 스스로 대견해만 하고 있는 건 아닌. 신화는 내게 묻는다.


우리는 모두 욕망이 꿈틀대는 존재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세대 간의 충돌들. 의식과 무의식의 불일치와 모순을 신화 속에서 목격한다. 신화는 도덕교과서 같은 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현장을 보여주는 거울이 된다. 신화 속 존재들이 어떻게 갈등하고 대립하며 질곡을 지나 타협하고 승화해 가는지, 그들이 지나 온 여정을 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금을 살 답을 구한다. 오늘의 서사가 현재 진행형이라면, 오래전부터 살아남아 고전이 된 신화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될 원형을 동시에 품고 있기때문이다. 오늘날의 서사가 여전히 옛 신화 구조를 반복, 변주하는 까닭은 오랜 신화 속에서 우리가 그려 갈 미래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일 터이다.


의식이 바뀌어야 삶이 바뀌고 자신을 둘러싼 세상도 바뀐다. 그리고 무의식에는 수많은 정보들이 모순 속에 엉켜 있다. 정신이 깨어난다는 것은 뒤엉킨 잡다한 생각과 감정들 한 발 물러나  바라보고,  모순된 생각과 감정들의 엉킨 매듭을 풀 실마리를 발견해 가 과정일 것이다. '바라보기' 내적 평심을 낳고 이를 통해 내적 확신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직관과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된. 주체적 존재란 이 내면의 힘이 내 안에 있느냐의 여부일 게다. 삶을 살아가는데 진짜 중요한 건 외적 성과가 아니라 바로 이 힘을 기르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했다. 우리 사회의 진짜 문제는 눈에 보이는 감각만을 쫒고 물질적 성과만을 탐하느라 내면의 힘. 내원리나 본질 대한 탐색을 쓸모없는 허깨비 취급하다 빈곤해져 버린 우리의 빈약한 정신인지도 모른다.


방탄의 '소우주'는 분명 이 시대의 신화다. 세계의 수은 이들이 이 노래에 반응하는 까닭은 그 노랫말 안에 지금 우리들의 의식과 무의식이 그리고 있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다만 나는 노래가 그저 노래로 끝나지 않고, 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제각각의 빛으로 빛나는 별"이 되는 신화가 진짜 우리 모두의 현실이 되기를 꿈꾼다. 단지 감각적 모방에 그치고 마는 허울적 주체가 아니라 치열한 자기 탐구를 거친 내면의 진짜 주체가 되어 빛나는 별 들일 수 있기를. 누군가 그린 신화에 종속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자신의 빛깔로 세상에 나와 자신의 신화를 그리 동시에 타자 역시 자신의 신화를 그려가도록 자리를 내어주며 함께 공존하는 꿈을 꿀 수 있기를 원한다. 그 사람이 가진 외적 소유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의 빛을 마음으로 느끼는, 그런 바라보기가 우리의 일상일 수 있는, 그런 세상이기를 원한다. 그것이 우리의 진짜 욕망이 되는 세상이기를. 누군가에겐 여전히 허깨비 같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이미 당연한 실인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와 융이 신화 속에서 인간의 무의식을 파헤치기 시작한 건 세계대전을 겪은 후였다. 스스로 이성적이며 선하다고 믿 근대 문명이 집단 광기에 빠져 전쟁을 치르는 것을 목격하며 그들은 근대 이성의 그림자 인식했다. 명인이라 자부하며 제국적 우월주의에 빠진 근대문명 안에 신화 속 원초적인 욕망이 어떻게 포장되어 왔는지, 그 무의식을  것이다. 그러니까 무의식에 대한 연구는 근대문명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했. 그들은 자신들의 그림자를 바로 보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그와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 동양신화도 함께 연구하며 자신들의 신화와 비교하고 그 속에서 자신들의 신화의 층을 한층 더 풍부하게 해석했다. 그들 우리의 종교와 학문을 연구하며 자신들의 신화 읽기를 반성하고 자신들의 신화를 다양한 분야에서 새롭게 재해석 내고 있었던 것이. 우리는 지금 주체적 수용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언젠가 정약용이 성경을 접하고 "우리는 왜 천주를 버렸던고 " 하며 탄식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여러 의미해석될 수 있겠지만 성경을 읽고 난 후 어쩐지 그의 심정을 알 것 같아졌다. 우리조상본래 하늘을 섬기는 마을 품고 살아 왔지만, 동양문명은 인격신적 요소가 낳은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종교와 사상 신화로부터 분리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반면 서양 기독교 문명 안에 신화 종교 사상이 통합되어 인격신으로서의 신이 성경을 통해 살아 움직이며 그들의 역사와 함께 역동적으로 활동 왔다. 어쩌면 이를 보며 우리 조상의 마음속에도 살고 있는 하늘의 본성 살아 활동하는 역동적인 서사들을 체계적이고 통합적으로 담아내지 못한 측면에 대한 아쉬움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 적이 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동양문명이 그동안 신화를 분리시킨 방향으로 온 건 바람직한 측면도 있다. 서로 다르게 발전해 온 덕분에 다양성 속에서 공통의 지점을 발견하며 서로에 배우고, 상호보완하며 더 큰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신화들도 성서처럼 한 권의 책 속에 체계적으로 우리 조상들의 정신문화와 의식의 변화 여정을 쉽게 접할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이는 우리 조상들의 문화가 빈곤해서가 아니라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우리 설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부족한 데서 온 문제이지 않을까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복 변주되어  우리 옛 설화들도 체계적으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다면 좋겠다. 성경과 우리 설화를 비교하며 함께 본다면 인류의 정신문화 다양하고 역동적인 성장여정을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을테니 말이다.


지금 우리 가정에서는 어떤 신화들이 펼쳐지고 있을까. 마음의 뒤엉킨 실타래를 찬찬히 풀어내고 싶지만 역시 글도 삶도 쉽지 않다. 숨을 깊게 쉬고 다시 천천히, 나는 엉킨 실타래를 칼로 자르는 알렉산더의 방식이 아니라 느리더라도 엉킨 실을 한 올 한 올 풀어헤치며 내 미로를 빠져나오길 원한다.



*** 

나는 편의상 신적 요소가 담긴 모든 옛이야기를  신화라 여기며 글을 전개. 서양신화는 신화 요소가 분명하게 살아는 편이나 동양은 신의 존재를 내적 요소로 파악하며 좀 더 인간적 차원으로 그려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 옛이야기를 일반적 신화 범주에 넣기 어려운  있지만, 이는 문화 전통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기므로 나는 모두 신화 범주로 묶어 표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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